영성 편지

'복이 있는 눈'과 '복이 있는 귀'

이형선 2012. 7. 16. 10:02

 

   18세기, 조선 영조와 정조 시대를 살았던 실학파의 선구자인 연암 박지원(朴趾源).

   그가 저술한 중국 여행기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요동 땅을 건넌 그는 큰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탑니다. 때는 여름이고 많은 비가 내린 뒤인지라 시뻘건 황토색 강물이 흐르는데, 한 번 출렁거렸다 하면 산더미 같은 파도가 일기도 합니다. 누구나 보면 볼수록 두려워지는 파도입니다. 그러자 일행은 물론이고 승객들 모두가 무서운 파도를 보지 않고, 약속이라도 한 듯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하늘만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사하게 강을 건넙니다.

 

 

   그리고 또 길을 가다가 다시 날이 저물어 이번에는 한밤중에 강을 건너게 됩니다.

   역시 사나운 파도가 출렁거리는 강물입니다. 물론 밤인지라 그런 강물의 파도가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귀에 들려오는 두려운 파도소리는 도무지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낮에처럼 오직 집중해서 바라볼 하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승객들은 파도와 귀에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질려서 모두 바닥에 쓰러져 뒹굴고 맙니다. 눈과 귀의 세계 그 한계에 대한 그때의 깨달음을 연암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넓고 넉넉한 사람은 눈과 귀가 누(累)가 되지 않으나, 눈과 귀만을 믿는 사람은 보고 듣는 것이 병통(病痛)이 된다.-

 

 

   오늘의 우리는 이른바 ‘디지털 시대’를 삽니다.

   지구촌의 각종 신속한 정보나 화려한 문화와 문명을 일상적으로 보고 듣고 누리며 삽니다. 젊은 세대일수록 전철 속에서는 물론이고, 걸어가면서도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끝없이 편리함을 추구하는 발전적 시대의 흐름을 누구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눈과 귀의 세계 그 한계에 있습니다. 너 나 할 것이 없이 눈과 귀로 무엇을 자주 보고, 무엇을 자주 듣느냐에 따라 우리의 성향이나 성품이나 심령이 달라진다는 그 한계 말입니다.

   바다나 강 같은 자연이나 인생의 사나운 파도는 오히려 하늘을 우러러 보게 만들지만, 세상의 화려한 문화나 문명은 각종 이기적인 탐욕이나 소비욕 등을 자극하며 세상에 더욱 깊이 빠져 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긴 '하늘'을 자주 우러러보게 해야 할 사명을 가진, 오늘의 기독교의 ‘성공한 대형 목사님들’의 설교부터가 대부분 사람들의 이기적이고 잠재적인 꿈이나 야망이나 욕망을 자극하는 세상 중심의 ‘성공논리’나 ‘부자논리’나 ‘강자논리’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청년들이나 장년들을 막론하고 그런 만사형통 식의 ‘기복(祈福)설교’가 아니면 먹혀들지가 않을 정도로 왜곡된 혹은 ‘하향(下向)평준화’된 신앙 풍토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테면 ‘축복’을 받아서 그 ‘축복’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義)’를 위해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되레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사회적 악이나 부정부패나 비리를 자행해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면 그런 ‘축복’은 차라리 안 받는 것이 오히려 ‘축복’입니다.

 

   그럴 것이 저를 포함해서 사람이란 한편으로 ‘참 간사한 동물’ 아니던가요? 세상에서 성공하여 권력이나 재물을 가지면 가질수록 ‘내로다’하는 인간의 교만함이 나타나고, ‘배가 부르면’ 비윤리적이고 불륜적인 색욕까지도 뻔뻔하게 자행하는 것이 또한 우리 인간들의 공통된 성정이자 죄성 아니던가요? 그 필연을 성경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한일서2:16)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겸손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드리는 때가 어느 때이던가요? 건강하거나 매사가 잘 나가거나 성공가도를 달리는 그때이던가요? 병들거나 실패하거나 고난을 당하는 그때이던가요?

   그 답은 각자의 몫입니다만, 저의 경우는 대개 후자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영혼을 위해서는 병들고 실패하고 고난 당한 것이 되레 은혜이자 축복일 수 있다는 증언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나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믿음의 사람들 곧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부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이나 입을 것’이 없어서 죽은 사람은 결코 없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정작 먹을 것이 없으면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에게 그러신 것처럼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먹을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의 사람들은 순교는 물론이고, 병들어 죽는 것조차도 감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부활의 세계, 영원히 사는 천국의 세계를 체험적으로 곧 눈과 귀를 통해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예수 그리스도)이시니라.-(요한일서1:1-2)

 

 

   그렇듯이 육신의 양식이나 세상의 모든 영광의 가치보다 천국의 가치를 ‘눈’과 ‘귀’로 더 크게 보고 듣고 믿는 것이 진솔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세상의 재물이나 영광이 ‘하늘의 보화’보다 더 크게 보이면 우리는 속고 있거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반증이 됩니다.

 

 

   교회에서 ‘성공논리’나 ‘부자논리’나 ‘강자논리’를 강조하며 가르치지 않아도, 그것은 사춘기가 되면 자연스레 이성(異性)을 알고 성욕을 아는 것처럼 세상 내지 육신이 자연스레 가르쳐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선 그런 우리의 야망이나 탐욕이나 정욕을 부채질하며 합리화 시켜주거나, 기름을 부으며 상승화 시켜주는 말씀이나 설교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선 ‘성공하는 삶’이 아닌 ‘섬기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되는 삶’이 아닌 ‘나누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약육강식의 삶’이 아닌 ‘사랑 내지 헌신의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정녕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려면 ‘이웃보다 더 많이 차지하는’ 기복적인 축복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의와 그 사랑과 헌신의 비밀이자 능력의 비밀인 ‘십자가의 비밀’을 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도록 하는데, 그래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데 보다 더 큰 비중을 두고 강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웃들은 ‘하나님의 자녀’이자 영적 가족인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직 모르고 믿지 않는다 해도, 다른 종교인이나 설령 ‘악인’이라고 해도 그 역시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햇빛과 비’라는 세상의 ‘일반은총‘을 똑같이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5:44-)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누가복음6:35-)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인간애나 타인을 이해하는 우리의 시각에 대해서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심판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소관이자 권한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희생의 삶은 없으면서, 어줍거나 어설픈 종교적 독선(獨善)이나 신앙적 독선이나 교파적 독선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한 해나 조선 최초의 병원 ‘제중원’이 설립된 해가 1885년이니까, 130여년 된 오늘의 기독교가 산업화에 성공한 대한민국의 경제력 그 이상으로 벌써부터 ‘세속화되어’ 내외적으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이 땅 위에 성공한 ‘존귀한’ 목사님들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존귀한’ 장로님 대통령들이나 장로님 부자들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유식한 신학박사님들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와 종려나무 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그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그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이사야9:14-)

 

 

   그렇듯이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존귀한’ 권력자들이나 부자들에게 너무 속지 맙시다. ‘존귀한’ 특정 혹은 일부 목사님들이나 지식인들에게도 너무 속지 맙시다. 그런 인간들과 그리스도의 다름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비밀’에 열리면,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는데 그렇게 거창한 지식이나 존귀한 신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선 오히려 ‘어린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눈과 귀의 중심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집중될 수 있을 때, 이 땅 위에 진정한 그리고 복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와 그 사랑이 확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이나 금세와 내세에서의 복된 삶이나 사회성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와 지식’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라도 아는 그것을 삶으로 실천 내지 구현하지 못하는 우리의 신앙적 오류나 일탈이나 사보타주(怠慢)에 있을 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

   그러나 너희 눈은 (*나 예수 그리스도를)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태복음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