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그래도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이형선 2012. 7. 23. 09:30

 

   지구촌에서, 남극과 북극에 이어 세 번째의 사막지대인

   북부아프리카에 위치한 사하라사막은 주지하다시피 북쪽으로는 이집트와 리비아,

   남쪽으로는 수단 등 12 나라에 걸쳐 그 지형이 광활하게 펼쳐져있습니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나무나 풀 등이 살기 어려운 땅이지만

   지금도 그곳에는 여전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사막의 배’인 낙타를 타고 남북을 오가며 물건을 사고팔면서 사는 대상(隊商)들이 그들인데,

   아라비아 사람들은 그들을 ‘투아레그’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하늘이 버린 사람들’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다 의미가 심장한 것은, 투아레그족 자신들은 스스로를 ‘이무하’ 곧 ‘자유로운 사람들’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하늘이 버린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자유로운 사람들’로 사는 무리들. 저들의 그런 삶의 지혜와 여유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구약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위인 ‘요셉’. 그는 불과 17세 소년시절에 그를 시기하는 이복형님들에 의해 저런 사막의 대상들에게 ‘은 이십개’에 팔려 애굽(이집트)으로 끌려가서, 다시 종으로 팔리게 됩니다. 그 후의 삶은 사막 혹은 광야에서 고난의 행군을 하는 것 같은 인생 여정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은혜를 받아 마침내 애굽총리로 성공합니다.

 

   그래서 그를 각별히 사랑했던 그의 아버지 ‘야곱’은 물론이고, 그를 종으로 팔았던 형님들과 그 가족들을 모두 당대의 대기근으로 인한 굶주림에서 되레 살리는 신분이 됩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하늘이 버린 사람’이 되레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는 구원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 인생 혹은 운명의 섭리와 역사는 누구에 의해 비롯되는 것일까요?

   구약성경은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편118:22-23)

 

   나아가 이중적 내지 복합적으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기도 한 저 말씀의 궁극적 성취는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됩니다. 주님께서 친히 저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성취됨을 증언하셨던 것입니다.(*마태복음21:42)

 

   그렇듯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친히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시해주신 예언의 말씀이 기록된 구약성경과 그 예언의 성취인 신약성경에는 지구촌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의 세속사(世俗史)가 중심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 중심으로 예언과 그 성취가 증언되어 있고 또한 미래적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비밀’이자 지혜의 보고(寶庫)인 성경 말씀을 ‘사막에서 물을 마시듯’ 항상 읽고 묵상해야 할 필연이 거기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요셉의 경우는 그의 이름의 의미가 곧 해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 및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더하실 것이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는 고난을 당할수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하셔서’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고,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는 구원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론 영적으로 때론 정신적으로 때론 육신적으로 모두 광야 혹은 사막 같은 인생 여정을 살아갑니다. 각종 생활의 염려와 걱정과 불안의 사막에서 살기도 하고, 크고 작은 어려움과 환난에 시달리며 살기도 합니다. 그런 삶의 애환이나 문제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하긴 ‘무덤’에 들어가면 없겠지요.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삭막한 광야. 암담한 광야. 안식할 수 있는 희망의 세계는 언제 나타날 것인가? ‘가나안 복지(福地)’엔 언제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프랑스 작가 쌩 텍쥐뻬리가 쓴, 잘 알려진 걸작〈어린 왕자〉에는 저 희망의 세계, 구원의 세계를 찾아가는 인생 여정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막에서 비행기가 고장을 일으킨 지 여드레째 되는 날 … 비축해두었던 물의 마지막 한 방울’을 마신 ‘나’는 그 후 ‘어린 왕자’와 같이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서 우물을 찾기 위해 무작정 걷기 시작합니다.

   ‘심한 갈증’과 고열의 고통을 앓으면서 지친 ‘나’는 별나라에서 내려온 ‘어린 왕자’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도 목이 마르니?”

    하지만 그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물은 마음에도 좋은 것일 수 있는데….”

    나는 그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잠자코 있었다.-

 

 

   당시 어린 왕자 역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을 만큼 지쳐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왕자는 ‘육신의 물’보다는 먼저 ‘마음의 물’을 구하는데 더 큰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다 현실적인 우리 어른들은 그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여하간 어린 왕자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지.”

   어른인 ‘나’도 이렇게 화답을 합니다.

   “그래. 집이든 별이든 혹은 사막이든 그들을 아름답게 하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지.”

   그렇게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추인 보물’을 찾아 헤매던 ‘나’와 어린 왕자는 마침내 ‘동이 틀 무렵에 우물을 발견’하고, 그 물을 마십니다.

 

 

    그럼 내일 일을 전혀 알 수 없는 그래서 한편으로는 무능한 한계를 살 수밖에 없는 우리가, 광야 혹은 사막 같은 현실 속에서 찾아야 할 진정한 인생의 ‘우물’은 어디에 있을까요? 누구에게나 있을 수밖에 없는 빛과 그림자 그 명암이나 애환에서 비롯되는 세상의 모든 불안과 염려와 고통 등을 이기는 진정한 구원과 평안과 안식의 ‘우물’은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답변을 들어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야곱의 우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4:13-14)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물론 주님의 저 대답을 들은 ‘우물가의 여인’은, 저 어린 왕자의 대답을 금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현실적인 어른 ‘나’처럼 이해를 하지 못하고 핀트에서 어긋난 엉뚱한 말까지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닌’, 그렇게 안식을 찾지 못하고 버림받고 헤매기를 반복하며 이른바 험악한 세상을 살아왔고 지금도 시쳇말로 기구한 혹은 팔자가 사나운 운명을 살고 있는 ‘우물가의 여인’ 역시 마침내 ‘우물가’에서 진정한 ‘우물’을 찾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마신 그녀의 삶은 이렇게 전도자 내지 증언자로 거듭 납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메시야)가 아니냐.-(요한복음4:28)

 

 

   그렇습니다. 우리가 금세에서도 현재적으로 심령에 품을 수 있는 진정한 ‘우물’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로마서14:17)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만사가 다 형통하여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염려도 불안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되레 세상에서 주님을 잘 믿고 진실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일수록 어려움이나 환난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으니까 그것조차 각오 및 감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16:33)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환난을 이기는 저 ‘평안’ 곧 헬라어 ‘에이레네’는 앞의 '평강'이나 '평화(peace)'와 같은 언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 한 몸, 한 동아리가 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사막’ 같은 세상을 이기는 진정한 ‘평안’은, 세상에서 안식할 수 있는 진정한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 한 몸, 한 동아리’가 될 때 거기서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래도 사막이 아름다울 수 있는 ‘영의 비밀’입니다.

 

 

   우리는 과연 ‘인생의 사막’에서 세상의 모든 염려나 불안이나 환난이나 두려움, 죄악이나 죽음 등을 능히 이기는 진정한 구원과 진정한 평안의 ‘우물’을 찾은 사람들일까요?

   주님.

   우리가 미망(迷妄)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믿음이 작음을 도우소서.

   우리의 사랑이 작음을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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