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행복

이형선 2014. 8. 18. 09:47

 

 

‘어린이들이 행복을 느끼는 때’를

물은 설문조사에 의하면,

상급생으로 올라갈수록 부모님이

자기가 필요로 한 것을 사주거나

부탁 내지 요구하는 것을 들어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응답을 했더군요.

반면에 하급생 이하의 보다 어린 어린아이들일수록

그런 것들보다는 부모님과 그냥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응답을 했더군요.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님과 함께 있으면

그 자체가 행복이고 ‘천국’입니다. 가난해도 좋습니다.

오막살이에서 살아도 좋습니다. 때론 굶주려도 좋습니다.

때론 부모님께 꾸중을 들어도, 매를 맞아도 좋습니다.

부모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그 자체로 ‘자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커지는 사춘기가 되고, 성인이 되면서 사람들은

부모님과 멀어지고 때론 부모님께 일그러진 감정을 품기도 합니다.

물론 부모님 품을 떠난다는 것은 자립을 위해서 필요한

성장 내지 성숙 과정이지만, 그러나 돈이나 재산 문제로 다투다가

부모님을 죽이는 흉악한 폐륜까지 자행되는 오늘의 세태의

그것이 결코 행복한 시대의 가치관은 아닐 것입니다.

여하간 그렇듯 신앙인인 우리 모두 역시 ‘자기’가 커갈수록

아버지 하나님께 요구하는 각가지 자기 소원도 많아집니다.

‘영적 사춘기’가 오면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회의도 하고,

하나님과 다정하게 대화하는 것조차 꺼리면서도,

자기의 소원이나 기도가 응답되어지는 그때에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감사하며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때론 이기적 내지 소아적인 요구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바 아버지’께 우리는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고, 아버지 또한 기쁜 마음으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도 하고, 때론 기다리라며 침묵하시기도 하고, 때론 우리의 기도나 소원을 물리치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이른바 행불행이나 희비가 엇갈리기도 합니다. 응답 여부에 따라서 그 상태가 엇갈린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 유형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까요? 설령 아버지가 아들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했다고 해서, 그 아들을 시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지혜나 생각이나 마음이나 사랑은 늘 우리의 그것보다 더 크고 깊고 높고 넓습니다. 내일 일을 모르는, 한 치 앞도 모르는, 내 뜻 내 소원 내 고집대로 척척 이루어진다면 그런 일 자체가 되레 더 크게 불안하고 불행한 일일 수 있습니다.

 

솔직한 표현인즉 아버지 입장에서 보자면,

돈이나 도움이 필요할 때만 효도한답시고 혹은 기도한답시고 찾아오는 자식들이 영 고깝고 섭섭할 수밖에 없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아닌 것은 자명합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저 하급생 이하의 어린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부모님과 함께 있는 것’ 곧 ‘주님과 함께 있는 것’ 그 자체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참 행복의 관계, 그 참 사랑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 역설적인 참 행복이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28:18-20)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복음 전도 사명’이라는

저 ‘지상 대명령(the Great Commission)’의 말씀 중에서,

‘너희와 함께(with you)’ 곧 헬라어 ‘메트 휘몬’은 ‘너희와 더불어, 같이, 동행하다’는 의미입니다. 단수형이 아니고 복수형이니까, 또한 ‘너희 가운데’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사도들 내지 제자들 ‘가운데’,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오늘의 교회 그 ‘가운데’ 계시는 주님의 살아 역사하시는 그 영적 현재성과 영원성(永遠性)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참 행복 내지 참 축복은 단수 곧 개인에게도 임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를 우리는 이스라엘 12민족의 조상인 야곱이 자기에게 살의(殺意)를 품은 그의 형 에서의 칼을 피해, 어머니 리브가의 지시에 따라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는 도중인 ‘벧엘의 체험’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홀로 이천리 길의 낯선 광야 여정에 오른 야곱은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지자‘,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잡니다.

노숙자 신세가 된 야곱으로서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외롭고 고달프고 두려운 때일 수 있습니다.

바로 그날 밤, 꿈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이런 언약의 말씀을 주십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세기28:14-15)

 

세상에서 말하는 외로움이나 고달픔. 성공이나 실패라는

개념이나 평가는 차라리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고요? '어린아이'나 '종(servant)'들에게는 자기나 자기 감정을 주장하는 인간 ‘내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 중요한 것은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 야곱이 실패해도 그것은 야곱의 실패가 아닙니다. 차라리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실패가 됩니다. 그것이 인간 우리가 성공했다고 해서 교만할 것도 없고, 실패했다고 해서 낙심이나 비하할 것도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생 우리는 어차피 세상에서 큰 성공을 이루었다 쳐도, 성자 성녀처럼 거룩하게 살다가 순교를 했다 쳐도, 우리의 정체성은 다만 “할 일을 했을 뿐인 무익한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unworthy servants)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누가복음17:10)

 

그렇습니다.

그것이 성경 속에 나타난 모든 신앙위인들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영적 비밀을 알고 깨닫고 믿었던 모든 신앙위인들의 고백이었습니다. 그 비밀 그 지혜를 알고 시종여일하게 그렇게 겸손하고 겸허하게 행한 자는 되레 자기에게 복이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하고 교만 내지 자만에 빠진 자들 예컨대 심손이나 사울 왕 같은 경우는 자기가 불행했습니다.

그럴 것이 영어 ‘양심(conscience)’의 라틴어 어원이 그런 것처럼, 'con'과 'scientia'의 합성어인 ‘양심’은 그래서 ‘함께 알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탐욕이 가득한 부자나 오만한 권력자나 인본주의 지식인이나 주색한(酒色漢)과 ‘함께 아는’ 양심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아는’ 양심은 전혀 다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함께 아는’ 양심과 영적으로 교만한 바리새인과 ‘함께 아는’ 양심은 다릅니다. 하나님과 ‘함께 아는’ 양심과 세상과 ‘함께 아는’ 양심이나 가치관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함께 아는’ 올바르고 선한 양심을 가진 자는 자기의 정체성이 한계를 사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 비밀 그 지혜를 알고 시종여일하게 ‘종답게’ 겸손하게 행한 자는 되레 자기에게 복이 있었고 또한 복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설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참 복의 역사는 그렇게 야곱에게도, 이후 모세에게도, 여호수아에게도, 다윗에게도, 솔로몬에게도, 그리고 오늘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고 성경은 또한 약속 및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복’은 세상의 부자나 권력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부자나 권력자는 소유한 그것으로 인해 되레 ‘하늘의 참 복’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나그네 여정에서 필요 이상의 소유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만 될 뿐입니다. 자기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하늘에서 보면 별것도 아닌, 자기의 성취감이나 성취욕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을 교만으로 인도하는 ‘세상의 신’ 곧 ‘사탄’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 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시는 삶’ 그 자체에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 내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사랑과 참 행복의 관계 안에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네 평생에 너(*여호수아)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1:)

 

끝으로,

목하 우리나라를 방문 중에 계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대한민국의 권력과 부 내지 물질과 경쟁과 번영이라는 저 ‘세상 가치’의 중심지일 수 있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그런 가치와는 전혀 다른 ‘하늘나라의 가치’인 참 사랑과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다간 순교자 124인을 ‘복이 있는 자’ 곧 ‘복자(福者)’로 공인 및 선포하는 ‘시복식 미사’를 먼저 집전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개신교인입니다만, 그것은 천주교, 개신교 등의 교파나 종교의 다름을 떠나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차원에서 대단히 의미가 깊은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하간 그렇게 순교자들이나 가난한 자들이나 약한 자들과 ‘함께 있기를’ 더 좋아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복식 미사 강론의 서두를 이런 자문(自問)의 말씀으로 시작하셨더군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신약성경 로마서 8장 35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순교자들을 위한 시복 미사의 개요를 설명하신 후,

다시 아래의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참 사랑의 의미와 관계를 강조하셨더군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장 38절, 39절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부연을 하자면,

대한민국의 권력과 부 내지 물질과 경쟁과 번영 등의 ‘세상 가치’가 우리를 우리와 “함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행복에서 결코 “끊을 수 없다”는 증언이자 선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때문에 순교한 124인의 헌신의 삶이 그것을 증언 및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진실로 선망하고 본받아야 할 ‘참 행복이 있는 자’의 삶이자 가치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교회나 사람이라면 세상 가치 내지 시대 가치의 그것과는 다른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 그 가치와 삶, 구별된 그 영원한 가치와 삶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순교자적 삶이 광화문 광장에서, 서울역 광장에서 계속해서 선포될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황님께서 ‘시복식 미사 강론’ 중에 하신 이런 말씀을 다시금 음미하며 함께 고민해봅시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 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