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창조주 하나님’은 존재하실까요?
우리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신(神)을 과연 어떻게 보고,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정말 ‘하나님의 나라’는 존재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이성으로 실증할 수 없는
그 나라를 과연 어떻게 보고,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름대로 유식하고 배부른 현대인들은
무신론이나 불가지론(不可知論)의 함정이나
미혹에 빠지는 경우가 더욱 흔해지고 있습니다.
거창한 사변이나 현학의 끝에서 만나는 것은
늘 인간 내지 이성(理性)의 한계입니다.
따라서 이성적 내지 과학적인 지식이나
철학 등의 유식이 인간의 전부는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머리의 세계’와는 또 다른
‘마음의 세계’가 또한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역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사람의 마음’의 실재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너희 안에(within you)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시적(可視的)인 세계가 아닌,
불가시적인 “심령(心靈)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17:20-21)
그렇습니다.
인간 지고의 행복인 ‘천국’은 부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성공이나 출세 여부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늘 가시적인 그런 소유의 행복에서 ‘천국’을 찾고자 합니다만, 그런 물질적 내지 세상적 내지 기복적 신앙의 끝은 역시 늘 ‘볼 수 있는 것’의 한계 그것입니다. 허무한 한계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감옥이나 박해의 현장이나 순교의 자리에서조차도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들의 심령에 확실한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안에 있는’ 천국은 다만 ‘현재적 천국’이자 ‘부분적 천국’입니다. 온전한 천국은 아니라는 것. 온전한 천국은 ‘종말적 천국’입니다. 하늘에 있는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의 세계’에 위치한 눈은 때론 피곤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저쯤 뒷산에 있는 코발트빛 하늘이나 청록의 숲을 먼눈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피곤해진 눈과 마음에 안식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현재적 안식’일 수 있습니다. 물론 온전한 하늘이나 숲은 내 손이 전혀 미치지 않는 ‘종말적’ 저 멀리에 있지만 그곳에 눈을 주면 그 하늘과 그 숲은 금세 내 마음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현재적’ 휴식이 되고 안식이 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도, 천국도, 그 평화도, 그렇게 오는 것이겠지요.
한편, 근본주의와는 구별된 복음주의와
삶으로서의 사회책임을 강조하며,
낮은 자나 낮은 곳을 지향하는 ‘제자의 삶’을 살았고
그래서 ‘개신교계의 교황’이라는 평가까지도 받았던,
20세기 ‘세계 기독교계의 거목’ 고(故) 존 스토트 목사.
영국인이자 신학자이기도 했던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란 문제를 이렇게
현재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으로 풀어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똑같은 문제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도전을 한다.
특히 과학적 방법으로 자란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들은 … 실증적인 검사로
분석할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의심하고 심지어 거부하도록 배웠다. (…)
그렇다면 하나님께선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가?
우선 그분은 그분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해결하셨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복음1:18)
따라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한복음14:9)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으며,
바울은 그분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라고 증언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냄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친히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존 스토트는, 그럼 오늘 이 시대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세상에 친히 보여줄 수 있는 길은 없는가?
그렇게 자문하면서 또한 이렇게 그 해법을 제시합니다.
-그런 길이 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전술한 요한복음1:18)에서 언급했던 것과 똑같은 문장으로
그의 첫 번째 편지(*요한일서)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그 문장을 다르게 결론짓는다. (…)
요한일서에선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한일서4:12)라고 썼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사랑이시고, 우리를 위해 사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도록
자신의 아들을 주심으로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
“새롭게 되는 일이 없는 선교는 위선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만 세상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믿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친히 당신을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영성의 비밀이자 성경의 비밀이자 계시의 비밀입니다.
그렇듯 오늘 이 시대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보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친히 당신을 세상에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군림하는 높은 곳의 높은 자가 되는 것이나, 거룩한 수도승이 되는 것이나,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대형 목회자가 되는 것이나, 해박한 지식인이 되는 것 등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헌신적 내지 희생적인 사랑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도’ 바울도 저 모든 것이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증언했던 것입니다. 물론 저 사랑은 인간 ‘내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가 없으면 결국은 “내게도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아가페)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13:3)
지금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의 삶을 통해
과연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요?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요?
대한민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종교나 정파나 이념의 차이나 다름을 떠나서
수많은 국민들로부터 환영과 존경을 받은 것은,
낮은 곳 낮은 자들을 향한 그분의 관심과 사랑에
진정성을 느끼고 그런 그분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고자 하는 삶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현재적으로 보았고,
또한 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극심한 영적 갈증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쪼록 한국 개신교 곧 기독교계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현재적으로 몸소 보여줄 수 있는 진정성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존경하고 싶은 목사님들,
존경하고 싶은 지도자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 및 기원합니다.
실인즉슨 심령적으로 극심한 갈증을 앓고 있는
21세기 신자본주의 내지 물질주의 시대를 사는
이 시대의 국내외 양들 내지 군상들에게,
‘케노시스’ 곧 자기 ‘비움과 낮춤’의 삶을 통해,
‘너희 안에서’ 우러나는 진정성이 있는 사랑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현재적으로 몸소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존경하고 싶은 지도자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 및 기원합니다. 이런 바람조차도
"나는 '바담풍' 해도 너는 '바람풍' 해라"는 식의,
역시 이기적인 제 기대나 기원이 될까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존경할만한 지도자들이
없는 사회는 피차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갈수록 절로 존경하게 되는 지도자들이
없는 사회는 피차 목마르다는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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