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새 이름, 새 사람'을 위하여

이형선 2014. 9. 1. 10:33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

눈앞으로 다가온 때문일까요.

왠지 일찍이 고인이 되신 부모님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특히 어린 저를 부르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들려온다 싶습니다.

“형덕아-.”

 

유년시절 제 이름은 ‘이형덕’이었습니다.

이후 ‘국민학교’ 곧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

‘이형선’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그 연유를 저는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길흉을 점치는 당시의 불교적 내지 무속적

혼합신앙의 영향을 받아 개명시킨 것으로 사료됩니다.

저로서는 지난날 ‘이형선’이란 이름은 여자이름 같기도 해서,

‘이형덕’이라는 이름이 더 좋겠다 싶은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여하간 사람은 누구나 고유의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인격과 이미지를 대변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생각이 말(언어)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인격이 되고,

인격이 운명이 된다’는 명언의 의미처럼,

자주 불리고 듣게 되는 ‘이름’이라는 말 내지 언어 역시

자기 자신에게 직간접으로 끼치는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것이 사람은 물론이고, 생명이 있는 동물이나 식물, 심지어 물에조차도 생명력이 있어서 감사, 사랑, 은혜, 평화 등 건전하고 긍정적인 말이나 축복의 언어에는 밝고 아름다운 성향의 반응을 나타내고, 반면에 미움, 원망, 불평, 증오, 근심, 전쟁, 바보 등 적대적이고 부정적인 말이나 저주의 말에는 어둡고 거친 성향의 반응을 나타낸다는 전문가들의 과학적 내지 검증적 리포트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인즉 말이나 언어나 이름의 영향력이나

그 중요성의 비밀은 6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의 계시를 통해 이미 증언되어 있습니다. 그럴 것이 창조주 하나님조차도 계시를 통해 고유한 이름을 가지신 분이라고 ‘자기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I AM has sent me to you)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The Lord)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애굽기3:14-15)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히브리 원어에는 저 이름이 다만 자음 네 글자(יהוה)로 되어있습니다. 영어식 음기를 하자면 ‘YHWH’가 됩니다. 그래서 모음 붙이기에 따라서 ‘야훼’나 ‘야웨’, ‘여호와’라고 통칭됩니다만 다 같은 의미입니다. 물론 히브리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고 해서 ‘여호와’ 대신 ‘아도나이’ 곧 ‘주님(The Lord)’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홍길동’이라는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그냥 ‘아버지’나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하간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예흐웨 아쉘 예흐웨”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곧 자존자(自存者)이자 전체자이자 주관자라는 정체성 그것입니다. 정서적 내지 철학적 인간들이 필요에 의해 만든 주관적 신(神)도 아니고, 피조물 형상인 신(神)도 우상도 아닌, ‘스스로 있는’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 ‘여호와’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여 부르신

인간 아브람에게도 이름 곧 ‘새 이름’을 주십니다.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세기17:3-5)

 

그렇게 ‘아브람’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24년 후인 99세에 비로소 ‘아브라함’이라는 거듭난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성숙한 신앙인격이 되었다는, 하나님의 인정 및 인치심이 되겠지요. ‘아브람’은 가부장적인 ‘큰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슬하에 친자식이 없었던 아브람은 그래서 있는 재산 내지 소유마저도 ‘내 집에서 자란 종’인 엘리에셀을 후사이자 상속자로 세워 물려주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차라리 소심한 아브람에게 꿈과 비전의 확대가 필요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네 몸에서 날 후손’을 약속하시고, 나아가 그를 이끌어 ‘밤하늘의 뭇별을 보고’ 꿈과 비전을 키우도록 하시고, 나아가 ‘아브라함’ 곧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새 이름, 새 비전을 주신 것입니다.

 

야곱도 계시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새 이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 ‘야곱’은 ‘속이는 자, 빼앗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타고난 성정이 간사하고 사기성이 있었던 그에게 차라리 어울리는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실인즉 그는 장자인 형 에서나 노환으로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몫인 집안의 장자권과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고, 그래서 앙심을 품은 형 에서의 살의(殺意)를 피해 이천리 타향인 밧단아람 땅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친 것입니다. 거기서 야곱은 아내로 얻은 외삼촌 라반의 ‘두 딸을 위하여 14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6년’, 도합 20년을 열심히 성실하게 일합니다. 그래서 야곱도 11명의 아들을 얻는 등 일가를 이룹니다.

 

그는 그 20년 동안에 걸쳐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도 많이 당하고, 빼앗김도 많이 당합니다.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다”(창세기31:41)고 한이나 설움을 토로할 만큼 혹독하게 당합니다. ‘속이는 자, 빼앗는 자’ 야곱이 또한 남에게 호되게 속임을 당하고 빼앗김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혹독한 연단의 과정을 통해 보다 성숙하고 성실한 신앙인격이 되어갑니다. 그러면서 일가와 ‘두 떼’가 되도록 많이 이룬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의 고백처럼 오직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은혜이자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마침내 가족과 양떼 및 가축떼 등을 죄다

거느리고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자 결단이었습니다.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창세기31:13)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귀향길에 올랐지만

곧장 형통의 대로가 열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형의 용서와 자비를 기대하며 돌아왔지만, 그러나 기별을 받은 형 에서는 무려 무장사병 ‘사백 인을 거느리고’ 마주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야곱 너를 죽이겠다’는 선전포고에 다름 아닙니다. 해묵은 원한과 보복의 칼을 갈면서 다가오고 있는 형 에서와 그의 군대! 사랑하는 아내들과 어린 자녀들까지 거느린 야곱의 심정은 ‘심히 두렵고 답답’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야곱은 그 절대해법으로

사람이나 환경과의 ‘씨름’이 아닌, 하나님과의 ‘씨름’을 택합니다.

치열한 철야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홀로’ 곧 일대 일로 만나는. 오직 하나님의 응답과 도우심을 구하는 ‘씨름’을 선택한 것. 요단강 지류인 ‘얍복강 씨름 사건’이 그것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야곱과 날이 새도록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세기32:24-28)

 

그렇게 야곱은 그의 고백이자 간증처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창세기32:30)는

신비한 영적 체험을 통해서 응답을 받습니다.

‘영(靈)이신 하나님’과,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물론 저 신비한 ‘얍복강 씨름 사건’은 난해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 역사성이나 실제성에 의문을 품고 ‘현몽설’이나 ‘환상설’ 등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습니다만, 그 후 실제로 ‘허벅지 관절’ 내지 ‘환도뼈 힘줄’이 상한 야곱은 절었습니다. 장애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저 사건을 기념하여, 짐승의 고기를 먹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터치 부분으로 바쳐진 희생제물일 수 있는 ‘허벅지 관절’은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실인즉 치열한 ‘얍복강 씨름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치열한 기도 체험을 통해서, ‘속이는 자, 빼앗는 자’ 야곱은 마침내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새 이름,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두 떼’나 이룬 기존의 물질적인 유형의 복이 아닌, 하늘의 ‘참 축복’을 받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언어적 표현이 그렇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자’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씨름하는 경우를 간혹 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나름대로 치열하게 들어붙는 아들을 이기지 못하고 늘 지곤 합니다. “아빠가 졌다”며, 두 손을 들고 맙니다. 그렇듯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야곱의 승리는 ‘스스로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굳게 믿고 치열하게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인 것입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언16:7)

 

야곱은 그렇게 먼저 만유의 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는 곧 ‘씨름하는’ 길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야곱을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여호와께 ‘새 이름’까지 하사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자 과연 하나님은 야곱의 원수인 형 에서와도 ‘더불어 화목하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칼을 품은 에서의 강퍅한 마음을 부드럽게 변화시켜주신 것입니다. 물론 형 에서와의 화해에는 야곱의 ‘회개에 합당한’ 섬김과 겸손한 인간적 자기 노력이 또한 있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세상에 오신

신약시대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새 이름’을

받은 수제자 베드로를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형 안드레의 인도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됩니다. 그때 선지자로서의 영적 통찰력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한복음1:42)

 

‘시몬’이라는 이름은 ‘들으심’이라는 평범한 그리고 흔한 이름입니다. 아들을 달라는 그 부모의 기원에 대한 ‘하나님의 들으심’이 있어서 얻은 아들이었던 것일까요. ‘게바’는 예수님이 당시 사용하시던 아람어이고, 헬라어 ‘베드로’는 ‘바위, 반석’이라는 의미입니다.

여하간 그렇게 ‘시몬’은 그리스도를 대면한 후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얻었고 그는 과연 그 후 수제자로서 ‘반석’이 되었습니다. 실인즉 위기에 처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등 변화무상(變化無常)한 다혈질 베드로에게 ‘바위, 반석’이라는 ‘새 이름’은 ‘새 사람’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새 비전’이자 ‘새 덕목’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불학무식한 어부 출신 베드로’와는 달리,

당대 최고지식인이자 ‘율법적으로도 흠이 없는 바리새인’ 출신인 사도 바울의

본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런 그 역시 이름이 바뀝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사도행전13:9)

 

이후의 사도행전 및 성경의 기록에서 ‘사울’이라는

‘옛 이름’은 사라지고 ‘바울’이라는 ‘새 이름’만 살아남습니다.

히브리어인 ‘사울’은 ‘희망’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초대왕의 이름 역시 ‘사울’입니다. 그리고 ‘바울이라는 사울’도 ‘사울 왕’과 같은 혈족인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따라서 사울의 아버지는 사울을 얻은 후에 그가 사울 왕 같은 큰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그런 큰 ‘희망’을 가지고 그렇게 이름을 지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곧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꿈도 비전도 희망도 길도 다 뒤집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 된 것입니다. 헬라어 ‘바울’은 ‘작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 그가 얻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백이자 또한 로마 시민권이나 대단한 학문 등을 가진 그가 겸손해지기 위해 꼭 필요한 비전이자 덕목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지금 우리에겐 어떤 ‘새 이름’이 필요할까요?

‘교만이’에겐 ‘겸손이’라는 이름이 필요하겠지요? ‘소심이’에겐 ‘대심이’라는 이름이, ‘겁쟁이’에겐 ‘담대한’이란 이름이, ‘악랄한’에겐 ‘선량한’이라는 이름이 필요하겠지요?

무엇보다도 이기적인 우리 모두의 이름이 저 ‘야곱’처럼 ‘속이는 자, 빼앗는 자’로 살았던 지난 삶에서 거듭나서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합니다. 그것은 기도 응답을 통해 운명이 변화된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래서 야곱은 마침내 자기의 ‘험악한’(창47:9)‘ 운명과 겨루어 이긴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현재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불행한 운명을 이긴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인간 야곱과는 달리 ‘내 뜻’보다 더 큰 ‘아버지의 뜻’을 응답으로 받고 그 응답대로 ‘골고다 언덕’에서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분입니다. 그것이 인간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를 포함한 모든 죄와 ‘사망의 몸’이라는 타고난 죽음의 운명(mortality) 내지 비참한 운명을 ‘대속(代贖)하는 죽음’이라는 절대사건이었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한 판결인 ‘사흘 후의 부활(復活)’과 이후 ‘오직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이천 년 성령의 역사와 섭리가 그것을 증명 및 증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입고 ‘험악한’ 혹은 ‘불행한 팔자’나 운명을 이길 수 있는 온전한 ‘새 이름, 새 사람, 새 비전’ 그 자체가 됩니다. 그렇게 ‘새 이름’을 가진 ‘새 사람’으로서, 내세까지도 보는 ‘새 비전’을 가진 사람으로서, 죄악과 불행과 비참과 허무한 죽음으로 인도하는 세상의 악한 영(靈)들과 그 모든 세력과 운명을 죄다 이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고후서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