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상대적 비교의식

이형선 2014. 9. 15. 08:20

 

 

2009년, 영국 왕립경제협회 연차학술대회에서

이런 내용의 결론적인 보고서가 발표된 적이 있습니다.

 

-비교의식이 클수록 만족도는 낮고,

 특히 소득을 비교하는 사람은

 질투심 때문에 두 배나 더 불행하다.-

 

우리 인간은 남녀의 성별이나 노소나

배움이나 신분의 높낮이를 막론하고,

마치 죄인의 숙명이 그런 것처럼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자기의 외모, 학벌, 재산, 신분, 아파트 평수,

심지어 무덤의 위치나 평수조차도 비교하며

남보다 더 좋은 곳, 더 큰 것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비교우위다 싶으면 행복해하며

우쭐하거나 교만해지기도 하고,

비교하위이다 싶으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시기 내지 질투를 하며

스스로 불행이나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모습이 50점이라면,

백점짜리와 비교해도 50점이고,

30점짜리와 비교해도 여전히 50점인데도, 남과의

상대적 비교의식에 의해서 스스로 허세나 허위의식에

빠지기도 하고, 좌절이나 비관이나 자포자기에

빠지거나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남을 죽이기도 하고,

자신이 죽어버리기도 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자살율 1위’라는 우리나라의 비극적인 오늘의

자화상이 그런 현실을 여실하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기를 살았던 영국의 학자이자

설교가였던 토마스 풀러도 이렇게 갈파했던 것이겠지요.

 

-남과 비교하면부터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좌우된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도

형제간의 상대적 비교의식에서 비롯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최초의 ‘선악과 사건’이 ‘아담과 하와’라는 부부간에서 비롯되었고, 최초의 살인 사건이 형제간에서 비롯되었다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 내지 태초적 죄악성에서 인간 우리는 그 누구도 자유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부부나 형제나 이웃 등 ‘가까운’ 친족관계 내지 인간관계일수록 더욱 더, 먼저 ‘자기를 부인하며’ 조심스럽게 성찰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건 곧 ‘선악과 사건’으로 인해 ‘에덴(樂園)’에서 쫓겨난 후에 낳은 맏아들의 이름은 가인이고, 그의 아우의 이름이 아벨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농사하는 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祭物)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양 치는 자)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여-(창세기4:3-)

 

농민이나 유목민이라는 직업이나, 농산물이나 축산물이라는 제물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제물’이 먼저가 아닙니다. ‘아벨과 그의 제물’입니다. ‘아벨’이라는 신앙인격 그 중심 그 마음이 먼저라는 것.

그 마음 그 심령을 통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십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며 구별된 ‘믿음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십니다. 가인은 형식적 내지 외식적인 ‘악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겸손하게 회개하며,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그러실만한 필연적인 이유를 겸손하게 성찰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인은 먼저 아우와의 ‘비교의식’에 빠지고 잡혀서 되레 ‘안색’이 변하도록 시기 질투하며 분노합니다. 인간 자기의 불운이나 불행을 세상이나 사회나 다른 사람을 탓하며 원망 불평 증오하는 형국입니다.

그런 가인은 마침내 아벨을 쳐죽여 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세기4:8)

 

사람은 과연 ‘타락한 죄악성’이라는 덫에 잡혀 회개할 기회를 잃고 뻔뻔해지면 갈수록 더 뻔뻔해집니다. 완악해지면 갈수록 더 완악해집니다. 재물이나 육욕 등의 탐욕에 잡히면 갈수록 더 탐욕스러워집니다.

가인 역시 자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립니다. 어리석은 뻔뻔함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되레 항변까지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세기4:9)

 

‘가인의 후예’인 우리들 역시 오늘도 여전하게 형제나

이웃과의 비교의식을 통해 예사로 시기 및 질투를 합니다. 때론 죽이기까지도 합니다. 딱히 피 흘리는 살상이 아니더라도, 기독교윤리에서 보자면 남을 미워하는 그것 역시 살인행위입니다. 마음의 생각이 행동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남을 미워하는 사람의 그 마음을 통찰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미움도 역시 살인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의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한일서3:15)

 

아벨이 죽었다고 해서, 가인이 아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인이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가인은 되레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더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땅에서 피하며 유리(流離)하는 자’로 살아가는 신세가 됩니다. 시쳇말로 ‘떠돌이 인생’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선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 이웃 아벨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여전하게 이렇게 대답하며 반문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내가 내 이웃을 지키는 자니이까?”

 

그렇게 하나님과는 물론이고 형제 내지 작은 이웃과의 화평의 관계, 공존의 관계가 태생적으로 이미 깨져버린 우리 인생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이렇게 근원적인 인생 구원 내지 회복의 해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22:37-40)

 

물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저 말씀도 일종의 비교의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구별해야할 것은 저 말씀은 공존적(共存的) 비교의식, 상생적(相生的) 비교의식이라는 것입니다. 공존을 해체하는 상대적(相對的) 비교의식이 전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전자는 살리고 후자는 죽여야할 텐데 우리는 대개 전자에는 무관심하고, 후자에는 열을 올리는 타락한 성정을 길들여져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먼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웃 사랑 곧 ‘내 사랑’ 역시 인간 자기중심의 주관적인 동정이나 선행의 한계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그 이상인 객관적 차원입니다. 궁극적으로 타자(他者)를 위해 헌신하는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상대적 비교의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우리 속의 각종 이기적인 탐욕 그 죄악성처럼

비교의식 역시 끊임없이 우리를 충동질합니다.

주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조차도 주님께서 친히

예언하신 대로 부활 승천하셔서 대신 보내주신

‘오순절 성령’의 세례 및 충만함을 받아

‘거룩한 사도’로 변화되기 전에는,

여전히 상대적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래서 하나님의 신분임을 스스로 증언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느 날 제자들 앞에 홀연히 나타나십니다. 그때, 베드로에게 사명을 각인시켜 주신 후, 베드로의 미래를 이렇게 예언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한복음22:18)

 

저 ‘네 팔을 벌리리라’는 말씀은 십자가에서의 처형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죽음 곧 순교 당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의 상대적 비교의식이 먼저 고개를 듭니다.

 

-이에 베드로가 (사도 요한)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요한복음21:21)

 

사람의 심리는 참 묘합니다.〈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나라 속담도 있습니다만, 비교의식 그 죄성(罪性)의 뿌리는 그렇게 깊고 노골적일 수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라이벌인 혹은 동기동창인 요한 너도 죽어야지? 나는 비참하게 죽은데 너만 살아있거나 성공하면 내 배가 아프지? 너도 같이 죽어야 내가 죽어도 덜 억울하지? 그것이 또한 우리의 심보 아닙니까?

 

실인즉 사도 요한이 죽지 않고 잘 산다고 할지라도 베드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요한이 죽는다고 해서 베드로가 대신 사는 것도,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독배(毒杯)를 마시고 의연하게 죽은 그리스의 철인 소크라테스도 그런 의미의 말을 했습니다만, 육신을 입고 세상에 살아있는 자가 더 행복한 자인지, 죽어서 육신을 벗어버리고 하늘나라로 간 자가 더 행복한 자인지의 여부 그 자체부터를 인간 우리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먼저 불행을 당했다고 너무 슬퍼할 것도 없고, 먼저 성공했다고 너무 교만할 것도 없습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동양 지혜의 의미가 그런 것처럼, 오늘의 상대적인 성공이나 행복이 내일의 실패나 불행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의 상대적인 실패나 불행이 내일의 성공이나 행복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따라서 남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시기 및 질투하거나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배가 아프거나 우울해질 필요도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은 ‘내 모습 이대로’를 허락하신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자 ‘주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 곧 ‘일대 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성공하나 실패하나 다 ‘주의 것’이고, ‘죽어도 사는’ 관계이자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잘났든지 못났든지 ‘내 모습 이대로’에게 부여된 자기 몫의 길을 묵묵히 가면 된다는 것. 자기 몫의 삶 그 사명의 길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중심으로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자유의 해법이자 참 행복의 해법을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단순합니다. 과연 진리는 단순합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한복음21:22)

 

남과 비교하지 말고, 네 모습 그대로 “나를 따르라”는 것. 베드로인 ‘너’와 그리스도인 ‘나’, 오직 ‘일대 일의 관계’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비교해야 할 대상은 내로라 위세부리는 세상도, 잘 나고 잘 사는 이웃도, 잘 나가는 친구도 아닙니다.

오직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하며, 따르며, 닮아가며, 늘 ‘코람 데오’ 곧 ‘하나님 앞에서’ 보다 뜻있고 보다 소신 있고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노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