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아는 ‘방랑시인 김삿갓(金炳淵)’을
미국시인 월터 휘트먼과 일본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와
함께 ‘세계 3대 혁명시인’으로 평가하는 학설이 있더군요.
그렇다면 그가 ‘혁명적으로’ 희구했던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였을까요?
물론 그는 조선왕조시대 곧
봉건후기시대인 19세기를 살다간 사람입니다.
오늘의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김병연은,
그가 다섯 살 때 저 유명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당시 선천 부사였던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은
홍경래군(軍)에게 항복함으로써 우선은 살아남았지만,
이듬해 난이 평정된 후 김익순은 결국 처형당하고
‘역적 집안’이 된 그의 가문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그 한을 이기지 못하고 요절했습니다.
20대의 나이에 과부가 된 그의 어머니는
그나마 살아남은 가족들을 데리고 가평을 거쳐,
강원도 영월 산중으로 들어가 죽은 듯이 살아야했습니다.
김병연이 20세 되던 해,
영월도호부 동헌에서 과거응시자격이
주어지는 백일장이 열립니다.
시제(詩題)인즉 홍경래의 난군과 전투 중 순직한,
〈가산군수 정시(鄭蓍)의 충절의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탄하라
(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는 것.
김익순이 자기의 친할아버지라는, 가문의 비극을 모른 채 성장한 김병연은 반란의 무리 홍경래군에게 항복해서 목숨을 구걸한 김익순의 비겁하고 부끄러운 죄상을 추상 같이 논하고 꾸짖으며,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다’는 문장으로 글월을 맺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연 장원급제를 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그 기쁜 소식을 알려드렸지만, 그것은 되레 어머니의 폐부를 칼로 찌르는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가문의 내력을 털어놓습니다. 벼슬을 할 수 없는 폐족(廢族)이 된 가문의 비극을 알게 된 김병연은 자기가 역적의 자손이라는 것과 조부를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다’고까지 꾸짖은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책하며 은둔생활을 하던 그는 마침내 스스로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는 죄인’임을 절감하고, 처자식조차 버려두고 이후 삿갓을 쓴 채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의 일생을 보냅니다.
빛을 볼 수 없는 폐족인 그의 천재성이 그를 시대의 방랑자로 만든 것이겠지요. 그렇게 시대의 ‘방랑시인’ 내지 ‘혁명시인’으로 살다가 그는 57세를 일기로 전라도 화순 땅에서 객사합니다. 사후에 그의 아들이 수소문 끝에 유해를 수습했기에 그의 묘소는 현재 강원도 영월 땅에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해보고 싶은 것은,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는 죄인’이라는
저 천재시인 김병연의 자기 정체성 이해입니다.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는 죄인’이라는 자기 정체성 이해는
과연 저 폐족 김병연에게만 국한되는 정체성 이해일까요?
그것이 ‘원죄(原罪)’라는 죄의 유전자,
이기적인 욕망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정체성 이해가 아닐까요?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는 죄인’이라면 응당 죽어야 합니다.
차마 죽지는 못하고 살아서, 저 김병연처럼 우리가 한세상
다 삿갓을 쓴 채 방랑생활을 하며 살 수도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죄인’이라는, 태생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정체성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고민은 인간 우리 모두의 최대 숙제가 됩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에게 있는 ‘죄악의 유전자’에 대한 구원의 해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물림된 원죄와 스스로 지은 자범죄로 인해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는 죄인’인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을 통해, ‘내’가 오직 거듭남(born again)으로써 진정한 그리고 영원한 구원과 자유와 평안 내지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 김병연이 당시 ‘그리스도의 비밀’이자 ‘십자가의 비밀’을 알았더라면, 이후 사도 바울처럼 아주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으리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그럴 것이 그 의미의 차원은 좀 다르더라도 김병연은 그만큼이나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는 죄인’이라는, 자기 피 속에 흐르는 죄성(罪性)에 대해 철저하게 절감 및 통감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누구나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절망이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한 모든 종교나 신앙은 실상인즉 모두가 인위적인 허위이거나 위선이거나 자기 기만이거나 교만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비참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백이자 절망을 다시 들어봅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a wretched man)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7:24)
저 ‘곤고한’ 곧 헬라어 ‘탈라이포로스’는
‘비참한, 불쌍한’ 등과 같은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색 방탕했던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던 바리새인’이자 당대의 최고지식인입니다. 시쳇말로 성자(聖者) 중의 성자이자 수도자 중의 수도자이자 엘리트 중의 엘리트입니다. 그런데 왜 저런 고백을? 왜 저런 탄식을?
그는 태생적으로 ‘타락한 인간’ 우리의 죄악성 내지 정체성 그 진면목을 그만큼 크게 깨달은 것입니다. ‘비참한’ 인간 자기 영혼의 정체성에 그만큼 깊이 열린 것입니다. 골짜기가 깊을수록 산봉우리는 높고, 사망의 골짜기가 깊을수록 구원에 대한 감격은 또한 그만큼 큰 것이 됩니다.
따라서 문제는 도저히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그 절망의 심연에서의 구원의 해법입니다. 진정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 길을 몰랐다면 저 사도 바울도 당시 스스로 잘 믿는답시고, 교만에 빠져 되레 ‘독사의 자식들’이 된 ‘바리새인들’처럼 ‘율법’ 내지 ‘할례’라는 외식의 ‘삿갓’을 쓴 채 한세상을 방랑하는 지식인으로 살았을는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파스칼의 명언을 다시금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인간의 비참만 알면 절망에 빠진다.
인간의 비참을 모르고 하나님만 알면 교만에 빠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곧 그리스도를 모르고, 인간의 비참만 알면 죄다 절망에 빠집니다. 영혼도 육신도 다 방랑이나 방황이나 미혹에 빠집니다. 그것이 ‘영(靈)이신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사도 바울은 뿌리 깊은 인간 자기의 비참을 잘 알았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잘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8:1-2)
저도 인간 김삿갓이나 그의 시들을 좋아합니다만,
그러나 진정한 ‘혁명’은 영적 자기 혁명이 먼저입니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혁명 내지 중생(重生)을 이룬 자가, ‘세상의 빛’이나 ‘세상의 소금’이 그런 것처럼 사회혁명도 자연스럽게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세상에는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사람을 진정으로 살리는 세상 최고의 지혜이자 지식은 성경 안에 있습니다. “가장 고상한 지식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빌립보서3:8)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 믿든지 못 믿든지, 사회적 존경의 대상이 되든지 비판과 경멸과 경원의 대상이 되든지, 그 여부에 상관없이 인간 구원을 위한 성경 자체의 위대성이나 예수 그리스도 자체의 위대성은 수천 년의 역사의 열매를 통해 자타가 이미 공인하고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靈)이신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말씀을 보다 겸손하게 읽고 배우며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힘쓰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구도자(seeker)로서의 열심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자기 자신을 바르게 살리고, 자기 가족을, 이웃과 사회를 바르게 살리는 진실로 ‘참 복이 있는’ 생명의 길이자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문학청년’이던 시절 저 ‘김삿갓처럼’ 때론 정처 없이 방랑하며 살기도 했던 저의 체험적 인생고백이자 결론적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비밀’을 몰랐으면,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는 죄인’인 저 역시 어떤 사건이나 우환질고를 통해서든 진작 죽었어야 할 인생이라는 것을 스스로 절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자체부터가 ‘하나님의 큰 은혜’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것은 ‘은혜에 크게 빚진 자(debtor)’라는 고백의 의미가 됩니다. ‘빚진 자’가 뻔뻔하게 살면 안 되겠지요? 제멋대로 살아선 안 되겠지요?
각설하고, 다른 한 편,
김삿갓의 방랑시에 나타난 세태는 한 마디로 사람다운 사람이 행세하는 세상이 아니라 돈이나 권세가 행세하는 세상, 그것일 수 있습니다. 당시 조선사회에도 고리대금이나 상업 자본 등의 위세가 이미 농촌까지 뻗쳐 있는 실정이었으니까요.
실인즉 김삿갓은 ‘지상에 신선이 있으니 부자가 신선이요, 인간에게 죄 없으나 가난이 죄’라고 탄식합니다. 물론 저기서 말하는 ‘죄(罪)’는 인간들의 상대적인 죄를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여하간 그래서 권세나 부를 좇아 아부하면서 선비나 양반 행세를 하는, 분수 이상으로 허세를 부리는 ‘속물들’을 해학과 풍자를 통해 신랄하게 야유합니다.
방랑생활 중에,
그는 때론 부자들이 동정이나 적선하듯 던져주는 엽전을 받으면서 외려 모멸감을 느끼며, ‘한 번 죽어 사라지면 이런 일 다 없으련만(一死都無事), 몸뚱이 있음이 평생의 한이로다.(平生恨有身)’라고 설움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그에게 따뜻한 인간애나 인간의 존엄성을 느끼도록 해준 사람들은 고관대작이나 부자들이나 지식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대개가 인생의 고통이나 한을 아는 가난한 농민들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상처가 있는 서민들이었습니다. 자기의 고통이나 상처를 아는 자가 남의 고통이나 상처를 품어줄 수 있었다는 것.
그는 가난한 어느 농부 집에서 ‘묽은 죽 한 그릇’을 얻어먹으면서, 밥을 드리지 못해 너무 죄송하다고 되레 용서를 구하는 주인을 향해 이런 시를 한 수 읊습니다.
-개다리 소반에 죽 한 그릇.
하늘빛 구름 그림자 떠도는구나.
주인이여,
면목 없다 하지 마소.
죽물에 비친 청산 풍경을 내 아끼노니.-
물론 저 시는 주인의 성의를 아끼는 감사의 표현이겠지만, 한편으론 가난한 서민들의 삶에 대한 설움의 사회적 토로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왠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도 그런 설움을 느끼고 계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럴 것이 헌금함에 ‘여러 부자들이 많은 돈을 넣었고, 한 가난한 과부는’ 당시 가장 작은 단위의 동전인 ‘두 렙돈’을 넣었는데, 그때 그것을 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마가복음12:43-44)
김삿갓이 가난한 농부의 ‘묽은 죽 한 그릇’에서 되레 진정한 인간애를 느낀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에서 되레 진정한 사랑을 느끼셨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한 수’ 말씀하신 것이겠지요. 말을 바꾸자면, 사람의 생명이나 사랑이나 성의는 돈 내지 재물 그 소유나 분량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인간의 존엄성이나 그 가치가 세상의 물질적 가치에 의해 평가 내지 재단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의미의 우회적 강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나 권세나 지식 자체가 행세하는 세상은 피차 불행합니다. 자기의 비참함을 모르는 ‘독실한 바리새파 신앙’도 교만한 냉혈(冷血)인간으로 인도하기에 역시 불행합니다. ‘묽은 죽 한 그릇’이나 ‘두 렙돈’이나 ‘따뜻한 격려의 말 한 마디’로도 나눌 수 있는 이심전심 내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이나 배려나 여유 같은 인간애 그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행세하는 세상’은 피차 태상적으로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는 죄인’인 저나 당신이 나선다고 해서 되어지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일 역시 세상의 정치권력이나 재물의 힘이나 그 영향력보다는, 우리 개개인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마음’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선적으로 가질 때 비로소 세상이나 사회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성경은 역설 및 증언하고 있으니까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2:5-8)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는’ 삶,
그것을 신학용어로 ‘케노시스’라고 합니다.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가난한 마음, 욕심 없는 마음을 본받으라는 것! 그것이 진실로 복이 있는 마음이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축복’이자 ‘참 성공’의 삶이라는 것!
‘자기를 채우는’ 탐욕이나 ‘자기를 높이는’ 출세가 곧 성공이자 축복으로 통하는 이 세상에서 그것에 장단을 맞추는 그래서 되레 더 잘 나간다는 어떤 목사들이나 자칭 하나님이라는 교주들의 그런 마음 그런 사심이나 욕심이나 야심을 본받으라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오직 '선한 목자'인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허무한 ‘사망의 몸’ 그 자기 골짜기의 깊이를 아는 자는 또한 자기 산봉우리의 허무한 한계도 알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 그 깊이를 아는 자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닮아가는 자는, 비밀한 부활의 생명과 내세의 높이까지도 또한 알게 될 것입니다.
'영성 편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축, "옳다(Yes)"와 "아니다(No)" (0) | 2014.10.06 |
---|---|
'심령의 가난'과 '물질적 필요' 사이 (0) | 2014.09.29 |
상대적 비교의식 (0) | 2014.09.15 |
저녁놀에 붉게 타는 구름 (0) | 2014.09.11 |
'새 이름, 새 사람'을 위하여 (0) | 2014.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