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두 축, "옳다(Yes)"와 "아니다(No)"

이형선 2014. 10. 6. 08:03

 

 

사람들은 자기의 말이나 주장이나

진술이나 사상을 강조할 때,

“하늘에 맹세코” 혹은

“하나님 앞에서 맹세코”라는

등의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하늘 혹은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인간 자기의 진술이나 사상이나 이념이 옳다는

그 정당성을 공개적으로 ‘하늘’이나 ‘하나님’처럼

절대화시키는 경우가 됩니다.

그러나 ‘맹세’라는 것은 일종의 자기 ‘율법’입니다.

‘맹세’라는 밧줄로 자기가 자기를 묶어버리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어리석은 자기 제한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영감이나 말이나 뜻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계시나 말씀이나 뜻은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인간 자기 말이나 뜻의 가치를 절대화시키는

“맹세를 도무지 하지 말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왕정 이전 시대의 ‘사사’ 곧 ‘지도자’였던

입다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대적 암몬과 먼저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끝내 ‘암몬 자손의 왕이 듣지 아니’합니다.

전쟁이 불가피해진 것입니다.

그 무렵,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합니다.’(사사기11:29)

전쟁을 허락하시는 응답이 됩니다. 그러자 입다는

그때 이렇게 공개적으로 ‘여호와께 맹세’를 합니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made a vow)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사사기11:30-31)

 

저 입다의 서원에서 우리는 “옳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과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두 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옳다”는 측면은, 전쟁에서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입다의 간절한 간구와 신실한 신앙고백 그 열정 자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호와의 영이 임해서’ 이른바 ‘성령 충만해졌다’고 해서 그대로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 곧 성경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분별력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그것입니다.

당시 이방종교에서는 최고의 정성인 신앙예식으로, 사람을 불에 태워 번제물(燔祭物)로 바치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효녀 심청이’도 제물로 바쳐진 경우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사례가 없었습니다. 양이나 소나 비둘기 등 짐승을 ‘대속(代贖)의 제물’로 바치기는 했어도, 사람을 제물로 직접 바치는 경우는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그를 번제물로 바치겠다”는 저 입다의 서원은 하나님의 뜻도 말씀도 아닙니다. ‘민족의 지도자’라는 인간 입다의 영적 무지 내지 오해 내지 오류에서 비롯된, 차라리 교만일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번제물로 드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 내지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한 발상입니다. 그래서 그는 치명적인 자기 비극을 자초한 경솔한 맹세, 어리석은 맹세를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분명하게 “아니다”라고 말해야 할 측면입니다.

나름대로 기도를 열심히 해서 이른바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성경 말씀에 무지하거나 성경을 잘못 이해하면, 무속(巫俗)신앙화 내지 이방신앙화 내지 혼합신앙화 되는 오류와 치명적인 비극이 바로 거기 있습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20:7)

 

그렇습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도,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망령되이 왜곡하는 것도,

오용 내지 남용하는 것도 다 죄가 되는 행태입니다.

입다 역시 ‘여호와께서 (암몬)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민족을 구원한 개선장군이 되어 기쁜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때 그가 서원했던 바,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다른 사람도 아닌 ‘무남독녀’ 그의 딸이었습니다.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라 하니,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사사기11:34-36)

 

우리가 ‘입에서 낸 말’,

‘입에서 낸 맹세(서원)’의 무게가

차라리 두렵기까지 한 대목입니다.

사사 입다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전쟁을 눈앞에 두고, 승전해서 돌아올 경우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라고 서원한 것은, 대의멸친(大義滅親)이라는 구국적 차원에서 비롯된 그의 열정이자 결단일 수 있습니다. ‘내 집’이나 ‘내 집 일’을 희생시켜서라도, 먼저 ‘하나님의 일’을 구하고, 먼저 조국을 구원하는 일을 구하겠다는 그의 열정과 결단은 실인즉 고귀한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적인 혹은 정치적인 자기 뜻이나 자기 의식이 너무 커진 그것으로 ‘여호와를 향하여’ 공적으로 ‘서원’까지 했다는 데 있습니다. 보다 겸손하고 보다 신중하게 ‘기도’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입다는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 채 앓아야 하는 큰 슬픔과 고통을 자초하고 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민수기30:2)

 

입다는 마침내 애초의 동기 그대로

대의멸친(大義滅親)의 결단을 내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민족 앞에서 드린

그의 서원대로 그의 딸을 번제물로 희생시킨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입다보다는 차라리 그의 딸의 신앙이 더 신실하고 위대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럴 것이 저는 되레 그의 딸에게서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과 ‘희생양’의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싶으니까요. 무남독녀이자 아직 숫처녀인 ‘입다의 딸’의 말을 다시 음미해봅시다.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한편,

신약성경에서 수제자 베드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이렇게 호언장담을 합니다.

성격은 다르지만 일종의 서원 내지 맹세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 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마태복음26:33-35)

 

당시 베드로의 저 고백은 결코 위선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것도 아닙니다. 당시 그의 순수한 마음을 직선적으로 표출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조차도 아십니다. 아울러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도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도 아십니다. 인간 베드로의 장점과 단점, “옳다”와 “아니다” 그 두 축을 다 아시기에 되레 끝까지 사랑하실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과연 저 베드로는 주님이 체포당하신 그날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모든 제자들도 역시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저는 다르다고요? 당신은 다르다고요? 그래서 호언장담을 할 수 있고, 서원 내지 맹세도 할 수 있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당시 그 상황에 처해 있었더라면 저나 당신도 저 베드로나 저 모든 제자들의 모습과 꼭 같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태생적 죄성이자 한계이니까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그 죄성 그 한계 말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Yes) 옳다, 아니라(No)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태복음5:34-37)

 

그렇습니다.

절대 말씀이나 절대 진리나 절대 가치는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과 ‘네 머리’와 생명의

참 주인이신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몫입니다.

인간 우리의 몫은 다만 “옳다”와 “아니다”,

“예”와 “아니오”를 구별 내지 분별하며 사는 삶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거룩한’ 곧 헬라어 ‘하기오스’는 ‘구별하는, 분별하는’ 삶 그 자체를 의미하니까요. ‘이에서 지나서’ 인간 자기를 절대화시키는 호언장담이나 맹세는 되레 ‘악으로부터 나는’ 것이니까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이 세대를 본받는”(로마서12:2) 삶 역시 그래서 되레 ‘악으로부터 나오는’ 삶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분별력 없이 “옳다”라고 말할 것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것을 ‘내 가족’이나 ‘우리 편’이라고 해서 미화시키거나 과장해서 “옳다”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악에서 나오는’ 것이 됩니다.

“옳다”고, “예”라고 말하는 것만이 사랑은 아닙니다.

‘축복 타령’하는 것만이 사랑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성숙한 신앙이나 사랑은 피차 자기 희생을 고민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축복’과 ‘저주’를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복음은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는” 세상의 이기적 내지 자기 과시적인 부자나 권력자나 지도자들에게 ‘저주’ 내지 ‘심판’이 있다고, 곧 “화(禍)가 있다”고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닌 것은 당장에 욕을 먹더라도 “아니오”라고 말해주는 것 역시 구원이고 사랑입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옳다”를 연발할 뿐 “아니오”를 말하지 못하는 복음 선포는 결국 ‘반편이’가 되고 맙니다. 부자나 권력이나 기득권을 위한 지당대신이나 들러리 노릇만 하는 ‘반편 교회’는 그 사회에서 되레 사회적 악으로 치부 되어 비판 및 질시당하다가 마침내 쇠락했다는 세계교회사의 증언을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이유도 바로 거기 있습니다.

 

어버이가 사랑하는 자식을 매로 때리는 것도

다 “아니오”라는 행위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자도 ‘반편이’지만,

“아니오”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도 역시 ‘반편이’입니다.

인간 자기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보다 더 커져버리면

동시에 매를 때려줄 ‘어른’도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결코 ’축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 없는 고아의 삶이 결코 축복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분명한 것은 그래서 우리가 더욱 조심할 것은,

진정한 사랑(*아가페)이 없는 “아니오”는

부정을 위한 부정이자 비판을 위한 비판이 되어,

상처만 남길 뿐 피차에게 유익이 없다는 그것입니다.

우리가 “옳다”도 “아니다”도, “예”도 “아니오”도,

‘감정 안에서’나 ‘상황 안에서’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해야할 필연적 이유가 역시 거기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로새서3:23)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