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헤밍웨이의 '너를 낚은 것이 잘못의 시초'

이형선 2014. 10. 13. 09:32

 

 

금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프랑스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라고 발표되었더군요.

저는 아직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유대계 혈통인 저 작가는 히틀러 치하의 전쟁과

대학살의 와중에서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유대인들의

삶에 주목하고 그것을 다수 작품화했다고 합니다.

 

인류 역사의 교훈이 그렇고 깊이 있는 작가들이나 사가들의 메시지가 그런 것처럼,

실인즉 사람들은 전쟁이나 대학살 등 역사적인 큰 고통이나 불행이나 비극을 통해서도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늘 있습니다.

의미 없는 사건은 없습니다. 양면성(兩面性)이 다 있다는 것.

저 유대인들 역사의 경우에도 역시 그렇습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저들은 잔인한 ‘홀로코스트’ 그 대학살의 질곡에서 수많은 생명을 잃었지만, 그 대가로 UN의 동정표(?)를 얻어 이스라엘은 1948년에 기적처럼 나라의 독립을 얻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지 무려 2천여 년 만에 말입니다.

 

개개인의 인생 역사에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개개인에게는 누구나 ‘장점과 단점’ 내지 ‘천사의 성품과 악마의 성품’이라는 양면성이 다 있습니다. 크고 작은 애환(哀歡)이나 희비(喜悲)라는 ‘슬픔과 기쁨’, ‘영광과 치욕(榮辱)’, 밝음과 어둠(明暗) 등의 양면성이 다 있습니다. 결혼과 독신이라는 ‘인생 대사’의 제도 그 자체에도 역시 ‘장점과 단점’ 내지 ‘애환’ 내지 ‘편한 면과 불편한 면’이라는 좋고 궂은 양면성이 다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든 사건이든 그 양면성을 다 알고

접근할 때 우리는 보다 지혜 있고 보다 포용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면이나 한 얼굴만 알고 그것에 지나친 기대나 꿈을 가질수록 다른 면이나 다른 얼굴을 만날 때 실망이나 좌절은 그만큼 크기 마련이니까요. 좌파 내지 진보, 우파 내지 보수, 어느 한 쪽만 알고 그것에 지나친 기대와 꿈을 가진 자가 다른 쪽을 만날 때 되레 반목과 대립을 야기하는 사회 현상도 그런 맥락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제시 잭슨의 명언처럼, “새는 두 날개로 납니다.”

 

성경 말씀으로 풀어보자면,

하나님은 그 양면성을 다 아시는 분이고, 그 양면을 ‘하나’로 포용하며 승화시키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처럼, “선인에게도 악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동일하게 주시는”(마태복음5:45)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품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온전’이란 ‘반편’의 상대어이자 완성어입니다. ‘온전’이란 양면(兩面)이 하나로 ‘통일’된 상태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one head)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1:10)

 

한편,

1954년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미국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

수상작은 지금도 명작으로 평가받는

〈바다와 노인〉이었습니다.

실존적 인간의 불굴의 의지나 인생의 의미를 이른바

‘하드보일드 스타일 문체’로 간결하고 깊이 있게,

상징적으로 잘 그려낸 걸작이었다고

저 역시 지금도 기억 및 평가하고 있습니다.

 

망망대해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 어부 산티아고는 84일째가 되도록 아직 원하는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잠이 들면 그래도 늘 꿈을 꿉니다. 젊음 날 그가 뛰놀았던 무대인 ‘아프리카’나 ‘사자’ 등에 관한 꿈 내지 비전이 그것입니다.

 

85일째 되는 날, “오늘은 자신이 있다”고 말하며 여느 때보다 일찍 바다에 나간 그에게 과연 거대한 물고기 ‘청새치’가 걸려듭니다. 노인은 그 거대한 물고기와 끌리고 끌어당기는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며 사투를 벌립니다.

비약을 시키자면, 그 ‘거대한 물고기’와의 사투는 헤밍웨이가 종군했던 세계1차대전과 2차대전이라는 그 ‘전쟁’에서의 사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긴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인생살이 자체를 ‘전쟁’이라고 표현하기는 매일반입니다만, 여하간 그렇게 사흘 동안이나 사투를 벌이다가 작살로 청새치의 심장을 찌름으로서 노인은 마침내 청새치를 포획하게 됩니다. 노인이 승리한 것입니다. ‘인간 승리’입니다. 그 물고기는 노인이 타고 있던 배 길이보다 더 큽니다. ‘거대한 성공’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되레 ‘자기’라는 배에 싣지를 못하고 뱃전에 매달아 끌고와야만 했습니다.

 

노인은 그 거대한 고기가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팔릴 것을 기대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귀항합니다. 그러나 노인의 승리나 성공이나 기대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청새치’가 흘리는 피의 냄새를 맡고 ‘백상아리’나 ‘청상아리’ 등의 상어들이 대거 몰려든 것. 노인은 자기의 ‘거대한 성공’ 내지 ‘거대한 소유’를 지키기 위해 다시금 필사적으로 상어들과 사투를 벌입니다. ‘내 고기, 내 소유’를 지키고자 각가지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 사투를 벌립니다. 그런 쉼 없는 고통의 연속과 힘겨운 투쟁 그 와중에서 노인은 그래도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런 노인은 또한 이렇게 혼잣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우리는 저기서 인생이라는 ‘바다’를 무대로 해서 ‘거대한 물고기’와 싸우는 인간의 위대한 집념과 불굴의 의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저기에도 양면성이 있다는 것에 우리는 또한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의 거대한 혹은 화려한 성공이나 승리에도 양면성이 있다는 것. 인생의 실존적 허무와 무의미, 회한이 또한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것이 마침내 귀항했을 때, 거대한 물고기는 상어들에게 죄다 물어뜯긴 채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으니까요. 노인은 이렇게 독백합니다.

 

-“이것이 모두 꿈이었으면 … 그리고 차라리

   이 고기가 낚시에 안 걸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에게 미안하게 되었다.

   너를 낚은 것이 잘못의 시초였다.”

 노인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고기를 쳐다볼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패배나 실패를 해도 실존적 허무와 회한이 거기 있지만,

소기의 꿈이나 목적을 이루는 성공이나 승리를 해도 역시 실존적 허무나 무의미나 회한이 거기 있습니다. ‘피 냄새’가 나는 곳에 ‘상어들’이 모여들기 마련이고,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들기 마련이고, 그래서 물고기도 인생도 결국엔 ‘뼈’나 ‘티끌’만 남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노인은 그런 허무의식이나 무의미를 극복하려고, 세계전쟁을 경험했던 당시의 실존주의 철학자나 작가 등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본주의적인 자기의 실존적 의지를 새롭게 다지고 다시 꿈을 꿉니다. 노인이 순수한 ‘소년’과 함께 나누는 휴머니즘을 통해서 미래적 희망일 수 있는 앞으로의 ‘고기잡이’를 다시 약속하고, 잠이 들면서 ‘리니아 해변의 사자의 꿈’을 다시 꾸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납니다.

 

그러나 ‘위대한 작가’ 헤밍웨이도

‘리니아 해변의 사자의 꿈’을

다시 이루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인간 자기의 불굴의 집념이나 의지에 대한 자긍보다는 실존적 허무와 무의미를 앓는 회한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럴 것이 말년에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토로하는’ 등 정신과 치료를 자주 받기도 했다고 전해지니까요.

그 요인이 세 번 이혼하고 네 번 결혼하는 등 화려한 연예인 못잖은 그의 ‘여성 편력 기질’의 영향 때문인지, 자살했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트라우마의 영향 때문인지, 정치적으로 사찰 당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나 구속감 때문인지 그 속사정을 우리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자기’의 진정한 한계 상황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자기의 불굴의 의지나 집념의 한계상황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인지 그는 ‘노벨문학상’이라는 세상의 그 ‘거대한 성공’마저 버려두고 마침내 사냥총으로 자살함으로서 61년의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한편,

‘전무후무한 지혜자’ 솔로몬도

인간 자기의 ‘거대한 성공’이나 ‘화려한 영광’을 향해

스스로 ‘사냥총’으로 난사라도 하듯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도서1:2-3)

 

저 헤밍웨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를 낚은 것이 잘못의 시초’이자

너를 낚은 것이 ‘헛됨(meaningless)’의 시초라는 것.

세상적 성공이나 영광이나 소유 등 인간 자기 집념이나 의지 중심으로 사는 삶 그 ‘모든 것’의 허무한 한계를 절감한 솔로몬은 그래서 저 헤밍웨이와는 달리 체험적인 신앙고백을 우회적인 참회록처럼 또한 이렇게 남겼습니다.

진실로 복이 있는 인생 최고의 삶, 최고의 선택이자 영원한 길이자 가치를 ‘실패한’ 자기의 삶을 통해 되레 역설적으로 이렇게 실토 및 증언한 것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도서12:13-14)

 

그렇습니다.

‘전도서’의 내용이 그런 것처럼,

인생은 생로병사나 흥망성쇠나 희로애락이나 영욕이나 장단점 등 양면성 속에서 극히 제한된 한 시대를 살다가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따라서 인간 자기나 자기 의지 중심으로 어느 한 쪽에 잡혀 일희일비하지 않고, 오직 만물의 창조주이자 역사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굳게 믿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말씀 중심으로 사는 삶이 참 지혜이자 참 생명입니다. 달고 쓴 양면성의 그 ‘모든 것’ 곧 인생 범사 일체를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사는,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삶이 진실로 복이 있는 ‘모든 사람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