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에 만나자고 먼저 연락한 쪽은 대주였지만,
남산타워에 먼저 나온 쪽은 복녀였다.
약속시간 십오 분 전이었다.
복녀는 주변을 산책하다가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계시는 시골쪽 하늘을 먼눈으로 바라보았다.
여중학생시절 언젠가 어머니에게 들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복녀’라는 이름이 너무 촌스러워서 창피하다며,
이름을 바꿔달라고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렸을 때 들려주었던 말이었다.
“작년에 하늘나라로 가신 니 아버지가 갓난애인 너를 껴안고,
싱글벙글하면서 축복하듯 당부하듯 하시는 말씀이 ‘먼저 살아계신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이웃을 배려하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라! 그것이 참 복이 있는 사람의 길이니라!’라고 하시더라.
그러고 나서 니 이름을 복녀(福女)라고 부르자고 하시더라.
그래서 니 이름이 김복녀가 된 거야. 얼마나 좋은 이름이냐? 김복녀!”
그리고 어머니는 복녀의 손을 꼭 쥐며 이렇게 말했었다.
“네가 먼저 ‘복녀’가 되어라. 그래야 또한 ‘복녀’를 만나는 법이니라.”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인 복녀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왠지 오늘은 ‘복녀’가 ‘복녀’를 만나는 날이 될 것 같은 즐거운 그림이 그려지기 때문이었다. 그럴 것이 친구인 영아가 며칠 전에 ‘기대할만한 사건’에 대한 귀띔을 해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녀와 여고시절 및 대학시절 친구 사이인 영아의 소개로, 반년 전부터 복녀와 만나고 있는 ‘그림 애호가’라는 대주는 영아의 사촌오빠였다.
약속시간이 되자 대주(大主)는 시계처럼 정확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복녀는 그런 그가 멋지게 보였다. 촌각의 시간도 아낄 줄 아는 현실적인 남자다 싶었다. 과연 청년실업가이자 펀드매니저답다 싶었다. 실인즉 대주는 ‘한국 증권가의 메카’이자 ‘자본의 메카’라고 불리는 여의도 증권가에서 잘 나가는 유능한 펀드매니저였다. 지난번 복녀와 둘이 만났을 때 같이 식사를 하면서 대주가 말했던 바처럼, 그의 선택이나 결단 여하에 따라 수억 때론 수십억의 자금이나 주식이 이동을 하고 부침을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복녀와 대주는 타워의 고층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서울의 도심이 젊은 그들의 눈 아래로 온통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난 대주가 이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복녀 씨.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저와 결혼해주신다면
제가 그림에 뛰어난 복녀 씨의 그 재능을 살릴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언젠가 복녀 씨의 소원이라고 말했던 ‘파리 유학’을 제가 꼭 갈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대주의 프로포즈는 고객과 거래하듯이 깍듯하고 정중했다. 그의 몸에 밴 직업의식에서 나온 매너일 수 있다 싶어서 복녀는 그것조차도 좋게 받아들였다. 대주라는 유능한 사람도, 더더구나 파리 유학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대주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음 주말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서로 헤어졌다.
일주일 후.
복녀는 화장하는데 여느 날 보다 더 신경을 섰다. 그리고 우아하게 정장을 하고 부푼 기대를 안은 채 약속했던 한강 주변의 찻집으로 나갔다. 지난주에 서로 결혼을 약속했으니까, 오늘은 대주 씨가 고운 반지나 목걸이를 가져와서 손가락에 끼워주거나 목에 걸어줄 거라고 복녀는 내심 생각했고 그렇게 기대했다. 이번에도 먼저 나온 쪽은 역시 복녀였다. 이윽고 약속 시간이 되자 대주가 시계처럼 정확하게 나타났다.
대주는 일주일 내내 돈과 정보와 씨름하느라 정신없이 보냈다고 토로했다. 실인즉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면서도 대주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각종 은밀한 정보와 수억의 돈다발이 밀물과 썰물처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찻집을 나와 두 사람은 나란히 한강변을 산책했지만 여전히 대주는 복녀가 기대했던 그런 반지나 목걸이를 내밀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인적 없는 곳으로 자꾸만 걸어갔다.
그리고 갈대가 잔잔하게 날리는 강변의 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때 복녀는 변함없이 살아서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면서 커플링 반지를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주는 것도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기대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긴장한 대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차라리 엉뚱했다.
“복녀 씨.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저와 결혼해주신다면
제가 그림에 뛰어난 복녀 씨의 그 재능을 살릴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언젠가 복녀 씨의 소원이라고 말했던 ‘파리 유학’을 제가 꼭 갈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지난주와 꼭 같은 대사이자 매너였다.
배우처럼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순간 복녀는 크게 모욕을 당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한 마디 말도 없이 등을 보인 채 총총걸음으로 그곳에서 멀어져갔다. 자칭 ‘큰 주인(大主)’이라는 저 사람은 자기의 토로처럼 온종일 돈과 정보와 씨름하다가 거기 중독이 되어 건망증에 걸렸든지, 인간을 상품처럼 거래하는 그런 거래성이나 상습성이라는 타성에 빠졌든지 해서 사람다운 사람의 성품이 메마른 사람이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인간 냄새보다는 차라리 돈 냄새나 상거래 냄새가 더 진한 사람이다 싶었던 것이다.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불쑥 가버린
복녀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대주는 의아해서
한동안 고개만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한편으론 자존심이 구겨졌다 싶어 크게 불쾌하기까지 했다. 자타가 ‘유능한 대주’라고 공인하고 선망하는 나에게 여자가 어디 너 한 사람 뿐이냐 싶기도 했다. 그래서 뒤쫓아 가서 붙잡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뒤늦게 머리에 불이 번쩍 들어온 대주는 그제야 지난주에 이미 청혼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제 머리를 두어 번 세게 쥐어박았다. 그리고 서둘러 뒤쫓아 가며 “복녀 씨-, 복녀 씨-” 하고 연방 불러댔다.
그러나 그 ‘복녀’라는 부름에 자기도 대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을까. 복녀는 여전히 말없이 그대로 서둘러 차도로 뛰어나가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렇게 복녀를 태운 택시는 떠나가고 말았다.
돌풍같은 찬바람이 휘잉 강변을 휩쓸었다.
갈대들이 물결처럼 크게 흔들렸다.
대주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잘 나가는 나 대주의 능력과 돈을 싫어한 여자는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살아왔던 대주는 그런 자기를 말 한 마디 없이 버려두고 그렇게 가버릴 수 있는 복녀의 모습에서 되레 의외다 싶은 상대적 허탈감과 박탈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왜소감이었는 지도 모른다. 그것은 분명 자존심이 상처받은 문제도 거기서 비롯된 감정의 문제도 아니었다.
저 복녀는 내가 가지지 못한, 나보다 더 크고 소중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무엇인가를 나에게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보다 더 큰 그 무엇인가를? 내가 가지지 못한, 더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그 무엇인가는 무엇일까?
그렇게 마음이 허탈하도록 어지러웠던 대주는 그대로 벤치에 홀로 앉아 한강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것은 그가 ‘자본의 메카’인 여의도 증권가에서 멀리 바라보던 다만 그림 같은 한강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다 싶었다.
정녕 그랬다.
한강은 결코 그림이 아니었다.
살아서 힘차게 흐르고 있는 실재였다.
그림이라고 생각했던 어제의 한강과 살아서 움직이는 오늘의 한강과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이나 이질감 때문에서일까. 대주는 스스로 적잖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대주는 그제야 한강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극심한 갈증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절감해야만 했다. 내적 갈증조차 느끼지 못하고 외적 재물이나 조직의 일상이나 잘 나가는 인기 등에 매여 거기 중독된 사람처럼 살아온 삶이 대사나 배역에 충실한 어릿광대의 삶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진정한 자기의 삶이나 사람다운 사람의 삶일 수는 없다는 자괴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다 털어버리고, 강태공처럼 거기 앉아 자연과 세월과 사람을 낚아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그때 휴대폰의 시그널이 울리며 이런 문자가 왔다.
복녀에게서 온 문자이자 마지막 편지였다.
-대주 씨.
우리 먼저 살아계신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이웃을 배려하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자고요.
그것이 참 복이 있는 사람의 길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아직 ‘복녀’가 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먼저 ‘복녀’가 되어, 저도 대주 씨도
더 좋은 ‘복녀’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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