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벤허의 '칼', 그 불행한 양면성

이형선 2014. 11. 3. 11:47

 

 

매스컴을 통해 우리는 매일

‘싸우는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남북(南北)간, 여야(與野)간을 비롯해서

진보와 보수라는 무리들이나 이념단체간,

부부간 혹은 고부간에 대립하고 반목하는

사건들을 일상처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대화와 소통 및 용서와 포용을 잃은 채,

서로 ‘감정의 노예’이자 ‘과거의 노예’가 되어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비난하다가

오늘과 내일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다가 끝내 서로 죽이고 죽기까지 하는

살상의 모습까지도 만나게 됩니다.

 

때론 언론이 그런 싸움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막말로 싸움 있어야 사건이 되고 사건이 있어야

언론이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하긴 “개가 사람을 물면 기사가 되지 못하고,

사람이 개를 물면 기사가 된다”는 명언(?)이

고전 내지 정설이 된 지 이미 오래됩니다만,

예나 지금이나 미담이나 선행은 큰 사건이 되지 못합니다.

늘 ‘큰 싸움’이 큰 사건이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너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겐

‘구경 중에 구경은 싸움구경’이라는

‘타락한 악취미’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상대적으로 옳거나 선하다고 주장하며

대립과 반목을 일삼고 있는,

‘너’도 어차피 절대의(義)나 절대선(善)은 아닙니다.

‘나’도 어차피 절대의나 절대선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에겐 ‘나도 틀릴 수 있다’,

‘나도 악일 수 있다’는 자기 부인 내지

자기 점검이나 겸손한 자기 정체성 이해나

자세나 여유가 자기를 위하여 필요할 것입니다.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절대선’이라고 주장 및 선언할 수 있는 분입니다.

‘죄가 없으신’ 그분은 저와 당신의 구원을 위하여

‘저주 받은 십자가’에서 ‘희생양’이 되어

대속의 죽음까지 당하신 분이니까요.

그러나 그런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자신을

절대선이라고 고집 내지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eternal life)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One who is good)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태복음19:16-17)

 

‘선한 이’ 곧 ‘절대선’은 ‘창조주’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오직 한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세상의 인간들에게 주신 ‘계명들’ 내지 ‘말씀’을 믿고 지키는 삶을 통해,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것은 성서적으로,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만이 절대선이자 그분만이 종말적 내지 궁극적 판단 및 심판을 하실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부활의 생명’ 그것이 곧 ‘영원한 생명’이니까요.

따라서 세상에서 피차 부족한 죄인이자 피조물인 인간 그 누군가가 자신만이 절대선인 양, 절대의인 양, 주장 및 행세하며 타인을 일방적으로 매도, 정죄, 심판하는 행태는 곧 독선이자 교만이 되는 필연적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피차 겸손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오늘 저녁에라도 죽어서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분수들이니까요.

 

나아가 악연(惡緣)이든지 선연(善緣)이든지, 달든지 쓰든지,

그 모든 인간관계나 사건을 허락하신 분은 ‘하늘의 계신 하나님’이라는 영성의 이해나 영성의 비밀에 열릴 때, 우리는 비로소 ‘원수’조차도 용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크게 섭섭하고 야속했든지, 이른바 ‘한으로 맺힌’ 상처나 원한이 컸든지 작았든지, 더 이상의 기대도 욕심도 부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연 그 자체나 그만큼에 되레 감사드릴 때, 그렇게 모든 사건을 인간 ‘너와 나와의 사건’이 아닌,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원수’조차도 사랑할 수 있는 여유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실례를 신앙위인 ‘요셉’의 경우를 통해 살펴봅시다.

‘아버지 야곱’이 지나치도록 편애하는 요셉을 시기한 열 명의 이복(異腹)형들은, 가축을 치던 광야에서 그를 죽여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형제인지도 차마 살해하지는 못하고 형들은 그를 애굽으로 가는 대상들에게 ‘은 이십’에 종으로 팔아버립니다.

그래서 낯선 타국으로 끌려간 요셉은 그 후 ‘애굽 바로(pharaoh) 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종살이를 합니다. 요셉은 부모나 집이나 형제 등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한 마디로 파멸 당했지만, 그러나 그는 감정에 사로잡혀 ‘복수의 칼’을 갈지는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 역사나 계시로 주신 ‘꿈’의 역사를 믿은 요셉은 그래서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객관적으로 이렇게 증명되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세기39:3)

 

그렇게 주인에게 신임을 얻은 그는 그래서 주인집의 ‘가정총무’가 되어 충실하게 일합니다. 그러나 보디발 장군 아내의 끈질긴 유혹과 동침 요구를 거절하다가 그 교활한 여자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되레 감옥에 들어가는 신세가 됩니다. 그렇게 13년 동안이나 종살이, 감옥살이 등 고난과 고통의 세월을 보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 참는 그를 마침내 ‘애굽 총리’가 되도록 기묘하게 역사하십니다.

그 후 ‘온 세상’에 대기근이 오고 그래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요셉의 형들도, 아버지 야곱은 물론이고 자기들의 처자식 등 가족을 살리고자 유일하게 양식이 있는 애굽 땅으로 양식을 사고자 찾아옵니다.

그때 ‘애굽총리 요셉’은 자기를 종으로 팔았던 형들을 금세 알아보지만, 형들은 전혀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물론 요셉은 모른 척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정탐꾼들’이라고 몰아붙이며 그들의 마음이 지금도 여전히 사악(邪惡)한지, 아버지 야곱이나 유일한 동복(同腹) 동생인 베냐민은 아직도 살아있는지 등의 여부를 알아보고자 유도심문 및 시험을 합니다.

그러다가 두 번째 만난 상봉의 자리에서,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베냐민의 안전을 위한 넷째 형 유다의 희생적 사랑과 탄원에 감동한 총리 요셉은 마침내 통곡하며 자기 신분을 밝히고 맙니다. 그리고 차라리 ‘원수’일 수도 있는, 형들을 용서하며 되레 이렇게 위로하기까지 합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세기45:5-8)

 

물론 현실적으로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나를 죽이려고 했고 나를 종으로 팔아치운 이들’은,

분명히 이복형들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저 원한의 사건조차도 ‘형들과 나와의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와의 사건’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장에 내게 ‘축복’이다 싶은 사건만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섭리 역사는 아닙니다. 당장에 내게 ‘재앙’이다 싶은 사건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 역사인 것입니다. 그 모든 범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그 모든 것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 역사 안에서 마침내 ‘합력해서 선(善)이 되고’. ‘합력해서 복(福)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20세기 최고의 영화’인

‘벤허(Ben-Hur)’를 통해서 치열한 ‘악과 선’의 대결,

반목과 대립을 일삼는 두 인간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메살라’의 가해와 ‘벤허’의 복수가 그것입니다.

 

초기 로마제국시대(서기 26년), 유대지역 신임총독을 모시고 로마군 주둔 사령관으로 오는 메살라. 그는 유대 명문 귀족이자 예루살렘의 부호인 유다 벤허의 절친한 친구입니다. 그러나 로마에 반역하는 유대인들을 색출해줄 것을 요구하며, 로마를 위해 같은 길을 가자는 메살라의 권유를 벤허가 거부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가로막힌 벽이 생깁니다.

그런 메살라는, 벤허의 누이동생 티자르가 집 옥상에서 신임총독의 부임 행렬을 지켜보던 중에 실수해서 기왓장을 총독의 머리에 떨어뜨리자 그것이 우발적인 사건임을 익히 알면서도, 벤허 가족들에게 총독 암살음모라는 반역죄명을 씌워 죄다 잡아들입니다. 그래서 벤허는 노예로 팔려가고, 어머니 미리암과 누이동생 티르자는 감옥으로 가게 됩니다.

 

가족의 생사조차도 모른 채 노예선에서 노를 저으며 비참한 노예의 삶을 이어가는 벤허는 그러나 노예선이 해적선의 습격을 받게 되었을 때, 극적으로 로마의 귀족이자 집정관인 아리우스의 생명을 구해주고 그 공로로 벤허는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아리우스의 양자가 되어 자유인으로 삽니다.

그러다가 화려한 양자의 신분조차 그만두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벤허는 거기서 첫사랑 에스더를 만나고 그녀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지만, 감옥으로 간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소식은 그 생사 여부조차도 알지를 못합니다. 감옥살이 중 나병에 걸린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그 병의 피해를 벤허에게 주지 않기 위하여 나병환자마을 골짜기에서 숨어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에스더도 그래서 벤허에게 그런 소식을 숨깁니다.

 

이후 벤허는 ‘내 가족 내 집안’을 파멸시킨

메살라에 대한 복수의 기회를 노립니다.

복수의 칼과 이빨을 갈고 또 갑니다.

그렇게 벤허와 메살라는 철천지원수지간이 된 것입니다.

그런 벤허는 장관인 전차경주에 참가해서 야비한 술수로 벤허의 전차를 전복하려던 메살라마저 누르고 마침내 우승을 차지하고, 메살라는 결국 자기의 야비한 꾀에 자기가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게 됩니다. 벤허는 그렇게 통쾌하게 복수를 했지만 그러나 그의 심령까지 통쾌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참 기쁨이나 평안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으로 다 끝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요인은, 오직 복수의 화신이 된 벤허가 연일 적이자 원수인 메살라를 향해 증오의 칼과 이빨을 갈던 와중의 어느 날, 아내인 에스더가 그에게 했던 이런 말로 집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서도 메살라의 모습이 보여요.”

 

그렇습니다.

과연 ‘시어머니와 싸우면서 시어머니를 닮아갑니다.’

‘악한’ 원수나 적이나 독재자와 싸우면서 ‘악한’ 원수나 적이나 독재자를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통쾌하게 복수를 한다고 해서, 심령까지 통쾌한 것은 아닙니다.

증오와 복수의 화신이 된 벤허 속의 ‘메살라 모습’.

그것이 바로 벤허가 걸린 ‘불치의 나병’일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내 눈 속에 있는 또 다른 들보’ 그것이 근원적인 자기 구원을 위해서 진정으로 치유해야할 ‘심령의 나병’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음습한 감옥생활 중에 ‘육신의 나병’에 걸렸다면, 벤허는 증오와 복수의 ‘칼’을 가는 도정에서 ‘심령의 나병’에 걸린 셈이지요. 거기에 벤허의 ‘칼’, 그 불행한 양면성이 있습니다. 반목과 대립 관계에서 남을 찌르고 죽이는 그 ‘칼’이 아울러 자기의 심령도 찌르고 죽인다는 그 불행한 양날의 양면성 말입니다.

 

따라서 가해자 메살라도 피해자 벤허도,

악인 메살라도 선인 벤허도, 절대악이나 절대선이 되지는 못합니다.

양쪽 다 ‘불치의 나병’에 걸린 사람들일 뿐이지요. ‘심령의 나병환자’ 메살라는 패배에 대한 일종의 복수심에서 죽으면서까지도 벤허를 괴롭히고자,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나병에 걸려 격리된 나병환자마을 골짜기에 숨어살고 있다는 비참한 소식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자기의 그 태생적 내지 운명적인 ‘나병’을 치유하지 못한 채 그대로 죽습니다.

오늘의 ‘나병(癩病)’은 분명히 치유되는 병입니다만, 당시 나병은 ‘불치의 천형(天刑)’ 그 대명사였습니다.

 

‘불치의 나병’에 걸린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비참한 실존 앞에서,

인간 자기의 한계를 절감한 벤허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 무렵의 벤허에게 에스더가 또한 이런 말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가 아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에요.”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나나 우리가 아는 인간중심적인 혹은 세상중심적인 정의나 선이나 이념이나 지식이나 열정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내가 아는 판단이나 감정이나 복수나 증오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인생의 저주 같은 ‘나병’이나 불행이나 죽음마저도 전부는 아닙니다. 따라서 그것들로 인해 나나 우리가 절대선인 것처럼 너무 내로라 설쳐댈 것도 없고, 너무 독선이나 교만에 빠질 것도 없고, 너무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벤허에게 때론 강직한 고언(苦言)을, 때론 다정한 격려의 말을 해주면서 한결같은 정성으로 그를 돌봐주던 에스더는 마침내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하며,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장인 골고다로 인도합니다. 벤허는 거기서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잃고 비참한 노예로 끌려가던 그 때 그 현장에서 다가와 ‘생수’를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과거적 구원의 은혜를 돌이켜 확인하고, 아울러 오늘의 현재적 구원을 또한 기적을 통해 재확인하게 됩니다. 그 십자가 현장에서 빛이 발하면서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나병이 깨끗하게 치유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십자가 현장에서

벤허의 ‘심령의 나병’도 비로소 치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목격한 벤허는

이렇게 에스더에게 그 현장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비체험’을 한 벤허의 신앙고백일 수 있습니다.

 

 “그때 난 그분의 말씀을 들었소.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저지르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리고 그때 그분의 말씀이

  내게서 칼을 거두어가는 것을 느꼈소.”

 

그렇게 ‘복수의 화신’이었던 벤허의 심령의 ‘칼’ 그 ‘나병’이 치유된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의 비밀, 기적의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을 체험한 벤허는 이후, ‘원수’가 된 절친했던 친구 메살라를 생전시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지 못한 것을 내내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오늘 대립하고 반목하는 ‘원수 사이’인 서로를 위하여, 뒤늦은 후회를 하지 않도록 저 에스더처럼 누구를 ‘용서와 구원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할 수 있을까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셨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5:4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