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할 만한 걸작 희곡을
많이 발표했던 20세기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그는 작품 속에서 모든 인간들은 예외 없이
‘자신’ 내지 ‘자아’라는 ‘독방에 갇혀있는 사형수’라고
끊임없이 외쳐댔습니다.
물론 그가 그리는 인간들은 그 ‘독방’의 벽을
부숴버리기 위해 타인과 대화도 교제도 나누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노력은 매양 ‘헛수고’로 끝나고 맙니다.
그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작품〈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주인공 블랑슈의 경우도 역시 그렇습니다.
미국 남부의 몰락한 지주의 딸이자 교사인 블랑슈.
그녀는 이른 나이에 연애결혼한 남편의 충격적인 죽음으로 불행한 신세가 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욕망과 허영을 간직한 여인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도도하고 우아하고 사치스러운 여인입니다.
그런 그녀는 미성년자인 학생과의 성적 스캔들로 인해 사실상 고향에서 쫓겨나서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에 살고 있는 여동생을 찾아가게 됩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낙원’ 역에서 내려서, 거기살고 있는 동생네집을 찾아간 것입니다.
물론 동생이 살고 있는 마을이나 집은 ‘낙원’이 아닙니다. 블랑슈의 눈에 가난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마을일 뿐입니다. 술과 포커게임을 즐기는 평범한 노동자인 스탠리와 살고 있는 동생 스텔라.
블랑슈는 그런 동생집에서 자기의 과거를 숨긴 채 우아하고 고상한 여인처럼 살아갑니다. 더부살이하는 신세이지만 그래도 때론 남부 지주의 딸처럼, 때론 언니처럼 양반(?) 행세를 하며 살아갑니다. 현실적이고 야성적인 스텐리는 그런 그녀가 영 못마땅해서 자주 불화가 빚어지기도 합니다.
블랑슈는 그래도 그 집에서 스탠리의 친구인 미치를 알게 되고, 그와 사랑에 빠지고, 그에게 청혼하기까지에 이릅니다. 그러나 블랑슈의 과거나 스캔들을 알게된 스탠리가 미치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주며 이간질하자, ‘더러운 여자’가 된 블랑슈는 결국 버림을 받고 맙니다.
그 후 동생 스텔라가 출산을 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러자 제부와 단둘이 있게 된 집안에서 블랑슈는 술 취한 제부 스탠리에게 겁탈을 당합니다. 그래서 그 충격으로 정신이상자가 됩니다. 언니를 늘 이해하며 돕고자 했던 동생 스텔라는 그런 언니를 하는 수 없이 정신병원으로 보냅니다. 스탠리는 무관심한 채 친구들과 포커게임을 즐길 뿐입니다. 희곡은 그렇게 끝납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간
그곳이 과연 ‘낙원’은 아니었습니다.
되레 영혼도 육신도 또 다른 인간의 ‘욕망’에 의해
‘더럽게’ 짓밟히고 찢겨짐을 당한 채,
‘정신이상자’가 되어 정신병원으로 가는 곳이었습니다.
인생 우리 모두는 오늘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낙원’을 찾아 헤매지만,
진정한 낙원은 여전히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메테르링크의 작품 〈파랑새〉의 결말이
또한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가난한 나무꾼의 자녀인 틸틸과 미틸 남매는 이웃집에 사는 병든 소녀에게 주고자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찾아 나섭니다. 꿈속에서의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남매는 사람은 물론이고, 의인화된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 그리고 물, 불, 빛, 빵 같은 사물 그리고 나무 등과도 대화를 나누며 꿈과 환상의 세계 및 과거와 미래의 세상을 두루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파랑새는 없습니다. 그래서 남매는 헛수고만 한 채 마침내 지친 몸과 마음으로 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꿈에서 깬 남매의 눈에는 달라진 것이 있었습니다. 오두막인 자신의 집이 아름답게 보이고, 제 집에 이미 있던 새장의 새가 ‘파랑새’로 보였던 것입니다. 파랑새는 바로 자기 집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본 새장의 새는 물론 과거와 똑같은 평범한 새였지만, 틸틸과 미틸의 ‘마음의 눈’이 새롭게 열리자 바로 자기 곁에 있는,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집안에 있는 그 새가 ‘파랑새’가 되고, ‘행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낙원’ 역시 그렇습니다.
저 블랑슈가 뉴올리언스의 ‘낙원’이라는 지역에서
내려 여동생집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집의 계단에 걸터앉아있던 한 백인여자가 블랑슈에게,
아니 인생이라는 미로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을 건넵니다.
“이봐요. 어딜 찾아요? 길을 잃었어요?”
블랑슈의 대답인즉 이렇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오다가,
‘무덤’이라고 써진 전차로 바꿔 탄 다음,
여섯 번째 정거장에서 내리라고 가르쳐주던데요.
‘낙원’에서 내리라고요.”
그러자 예의 백인여자가 수수께끼의 비밀 혹은
낙원의 비밀을 블랑슈에게 가르쳐주기라고 하듯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있는 곳이 그곳이에요.”
“낙원?”
“여기가 낙원이라니까요!”
그렇습니다.
‘낙원’은 동생네가 살고 있는 마을도 집도 아닙니다.
‘당신이 있는 곳’ 곧 ‘내가 있는 곳’이 낙원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는 말이 있지요?
내킨 김에 여기서 작고하신 ‘구도자적 시인’이었던 구상(具常)
님의 짧은 시〈꽃자리〉전문을 다시금 음미해 봅시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물론 저 시는 시인 ‘자기와의 대화’일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구도자적 시가 됩니다.
우리가 시방 앉은 자리는 늘 ‘가시방석’입니다. 그래서 불만과 원망 일색입니다. 늘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부정적인 마음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실인즉 ‘가시방석’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자리입니다. 가시가 하나만 있어도 괴로운데 그것이 ‘방석’으로 있는 자리에서이랴!
그러나 그런 자리마저도 저 ‘시인의 마음’ 내지 ‘구도자(求道者)의 마음’을 가지면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자기 욕망이나 탐욕이나 허영이나 허세 등을 ‘비우고 낮추면’ 그곳 역시 기쁨과 평안과 감사의 여유가 있는 ‘꽃자리’ 내지 ‘낙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불행한 고난과 고통의 대명사인
‘욥의 자리’는 처참하도록 절망적인 ‘가시방석’이었습니다.
‘동방의 의인’이었지만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를 당하면서, 가진 부요한 재산은 물론이고 열 명의 자식들조차도 다 잃고, 자신의 몸마저 악창에 걸려 ‘잿더미 위에 앉아서 기왓조각으로 몸을 긁어대는’ 처참한 막장으로 떨어진 신세였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욥’은 고통과 고뇌를 앓으며 신음하면서도 그 자리에서 되레 영안(靈眼)이 열려져, 창조주 하나님이 장차 보내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통한 미래적 대속(代贖)의 비밀과 부활의 비밀을 비전으로 보게 됩니다. 그것은 미래적 희망이자 궁극적이고 종말적인 희망이기도 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my Redeemer)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기19:25-26)
그렇게 심령의 눈이 새롭게 열려진 욥은 ‘육체 밖에서(*미브싸리)’가 아닌,
인생으로 살아있는 ‘육체 안에서(*미브싸리)’ 되레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현재적 천국'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기42:5-6)
인간 욥이 주어진 현실의 자리를 ‘가시방석처럼 여기고’ 때론 원망하고 불평하며 차라리 죽고 싶기까지 했던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자기의 그릇된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을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자, 그 자리가 마침내 ‘꽃자리’ 내지 ‘낙원’이 됩니다. 현재적 ‘부활의 자리’가 됩니다. 이후 하나님이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기42:10)
한편,
‘고난의 자리’에서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편119:18)라고 기도했던 한 무명의 시편기자도 역시 그 자리가 되레 ‘꽃자리’가 되었음을 이렇게 신앙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decrees)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 보다 더 좋으니이다.-(시편119:71-72)
삶의 가치관이 바뀐 것입니다.
행복에의 가치관, ‘낙원’에의 가치관, ‘꽃자리’에의 가치관이 바뀐 것입니다.‘천천 금은’에 대한 이기적인 욕망과 소유욕 일색이던 가치관이 ‘주의 말씀’, ‘주의 율례’ 중심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존재의 기쁨 내지 심령의 기쁨이 재물 등 소유의 기쁨이나 세상에서 행세하는 기쁨보다 ‘더(more)’ 커진 것입니다.
저 신앙위인 내지 인생선배들의 경험에서 보듯이,
오늘의 우리가 처해 있는 모든 자리도 역시
우리의 마음의 자세, 심령의 자세 여하에 따라,
‘가시방석’이 될 수도 있고 ‘꽃방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옥’이 될 수도 있고 ‘낙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within you) 있느니라.-(누가복음17:20-21)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너희 안에 있는 천국’을 보지 못하면 죽어서도 천국을 보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의 ‘가시방석’의 자리를 천국 곧 ‘낙원’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죽어서도 천국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그 처절한 ‘저주의 자리’조차도 ‘낙원’으로 만드시고 ‘꽃방석’으로 만드신 분입니다. 감사의 자리로, 용서와 대속의 자리로, 구원과 부활의 자리로 만드신 분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을 본받는다고
우리는 입으로 고백하면서도 오늘 우리의 삶은
매양 그 길에서 벗어나 여전히 헤매고 있습니다.
이미 주어진 가족이나 의식주, 건강, 직업, 환경이나 여건 등을 감사하다가도 ‘사흘만 지나면’ 더 이상 감사할 줄 모르게 됩니다. 기존의 ‘내 것’은 당연한 것이고, 더 크고 더 많은 것, 보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창세기3:6) 것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욕망’입니다. ‘허영’입니다. 그래서 저 블랑슈처럼 늘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내려서,
스스로 ‘무덤’이라고 써진 전차로 바꿔 탈 수 있는
‘영의 눈’ 내지 ‘마음의 눈’이 열려야할 것입니다. 그런 눈이 열리지 못하면 전차를 바꿔 타도, 나아가 ‘여섯 번째 정거장’에서 내려도 거기가 동생집일 수는 있어도 그곳이 ‘낙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럴 것이 빈손으로 ‘무덤’ 곧 죽음을 향해 가는 허무한 인생의 종말적 한계를 깨닫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생명과 그 가치를 볼 수 있는 눈(靈眼)이 열려야만 진정한 ‘낙원’이 보인다는 문학적 알레고리가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낙원’은 세상이나 육체 중심의 욕망이나 탐욕이나 사심이 비워진 겸손한 마음, 겸손한 눈 안에만 있는 ‘실존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섬김’이라는 이름의 전차,
‘희생’이라는 이름의 전차,
‘헌신’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갈 때,
되레 진정한 ‘낙원’ 내지 ‘천국’을 찾을 수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종말적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이지만,
‘현재적 천국’ 내지 낙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오늘의 자리,
오늘의 마음 자리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within you)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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