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메시야 대망(待望) 사상'과 성탄

이형선 2014. 12. 15. 10:53

 

 

스웨덴의 동화작가 린드그렌이 쓴 〈말괄량이 삐삐〉.

작품의 주인공 삐삐는 아홉 살 난 소녀입니다. 삐삐는 아빠가 남겨놓은 재산이 있기는 했지만, 실상인즉 의지할 데 없는 불우한 고아입니다. 그럴 것이 엄마는 자기가 갓난아이 때 죽었고, 자기와 함께 여행 중이던 선장인 아빠마저 폭풍이 불던 날, 밤바다에 떨어져 행방불명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짝짝 양말에 큰 장화를 즐겨 신고 ‘흰 밀짚모자를 쓴 긴꼬리 원숭이’를 어깨에 얹고 다니는, 얼굴에 주근깨투성이인 삐삐는 의외로 기죽지 않고 활달하고 당당하게 잘 삽니다. 어른들의 정형화된 권위나 가치관이나 예절이나 상식이나 탐욕 등을 되레 야유라도 하는 듯한 말썽과 모험을 일삼으며 잘 삽니다.

 

홀로 잠 잘 때는 자기가 자장가를 부르고, 외출할 때는 씩씩하게 말도 탑니다. 학교에도 잘 가지 않고 ‘홀로 제멋대로 사는’ 삐삐를 수용시설인 고아원에 보내려고 경찰아저씨가 찾아오기도 합니다만, 지붕에서 쫓기고 쫓는 소동을 벌인 끝에 그 아저씨를 깨끗이 물리쳐버리기도 합니다. ‘어른들도 당해낼 수 없는 괴력’을 가진 삐삐는 가는 곳마다 소동을 일으키지만, 때론 재물을 탐하는 나쁜 아저씨들을 골탕 먹이며 혼내주기도 하고, 때론 화재가 난 집의 다락방에서 남자아이들을 구해내기도 합니다.

 

‘말썽쟁이’ 삐삐가 자기의 불행 혹은 운명을 이기고 그렇게 기죽지 않고 가는 곳곳마다 거기 있는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 불행한 일 등을 되레 즐겁고 신나는 일로 바꿔버릴 수 있었던 것은, 성경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의 동심에 ‘세상을 이기는 천국’이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어린 소녀 삐삐가 나름대로 간직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자 꿈이자 비전인즉 이렇습니다.

 

“엄마는 천사가 되어 저 높은 하늘에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셔.

 아빠는 어느 흑인들 섬에 떠내려가서

 그곳 임금님이 되어 계실 거야.

 언젠가 오셔서 나를 배에 태워 데리고 가실 거야.”

 

천사가 된 엄마가 하늘에서 늘 자기를 지켜보고 있고, 지켜주고 있다는 삐삐의 믿음. 그리고 언젠가 임금님이신 아빠가 다시 오셔서 자기를 아빠가 있는 곳에 데리고 갈 것이라는 삐삐의 간절한 소망과 기다림. 그것은 한마디로 삐삐가 간직한 ‘대망(待望) 사상’일 수 있습니다. ‘못생긴’ 삐삐가 세상을 능히 이기고 되레 즐겁고 신나게 살 수 있었던 ‘천국’의 비밀이자 지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저 어린 아이 삐삐의 믿음을 이렇게 비약시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저 높은 하늘에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셔.

 하늘나라 임금님이 되어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실 거야.

 언젠가 다시 오셔서 나를 데리고 가실 거야.”

 

우리가 그런 믿음과 ‘대망 사상’을 가졌다면 우리 역시 저 삐삐처럼 세상의 불우한 모든 역경도 여건도 능히 이기고, 늘 소망 가운데서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유다왕국 곧 이스라엘은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제국에 의해 최종적으로 멸망을 당합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망국의 한을 안은 채 바벨론, 페르시아, 마게도냐, 로마로 이어지는 열강세력들에 의해 계속 짓밟히며 억압 및 착취를 당하는 서러운 신세가 됩니다. 나라도 잃고 부모도 잃은 ‘고아’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사백여 년을 보내는 암울한 고난의 세월이자 신구약 중간기의 세월을 통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메시야 대망(待望) 사상’이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막연한 소망의 확대가 전혀 아닙니다. 인간의 간절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주관적인 신(神)’도 아니고, 인간 중심의 주관적인 사상이나 이념이나 비전이나 희망사항의 확대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이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곳곳에서 분명하게 계시해주신, ‘메시아’에 관한 말씀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언의 말씀일 수 있는, 기원전 700년대에 선지자로 활동했던 이사야를 통해 주신 계시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virgin)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Immanuel)이라 하리라.-(이사야7:14)

 

그러니까 남자를 모르는 ‘동정녀’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부터가 ‘기묘’이자 ‘신비’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저 히브리어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God with us)’이라는 의미이자 장차 세상에 오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구원자, 구세주’를 의미하는 ‘메시야’는 구약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이고, 같은 단어인 ‘그리스도’는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입니다.

 

‘메시야’의 원래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전통적으로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 등 백성의 지도자를 옹립할 때 신적 권위의 인증으로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을 행했으니까요. 그러나 망국의 한을 안은 채 열강국의 노예처럼 살아온 신구약 중간기를 통해 그런 메시야 사상은 유일한 절대 메시야 사상으로 집약됩니다. 신적 권위를 가진 막강한 구세주에 대한 간절한 기대와 비전으로 집약이 된 것입니다.

물론 당시 유대인들 대다수가 소망한 메시야는 로마제국을 통쾌하게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독립과 자유와 젖과 꿀이 흐르는 부국으로 인도할,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 모세나 다윗과 같은 그런 혁명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정치적 메시야’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차라리 이기적인 메시야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물론이고 이방 민족 모두를 포함한, 인류의 모든 죄악을 대속(代贖)하기 위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상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세상에서 흥해도 살고 망해도 사는, 세상에서 건강해도 살고 병들어도 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초월적 메시야’와는 그 이해의 거리가 아주 멀었다는 것입니다.

여하간 그렇게 대망하던 메시야가 마침내 세상에 오십니다. 구약시대에 계시된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 마침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성육신(成肉身)’ 사건이 실현된 것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누가복음2:10-11)

 

한편,

신약성경 ‘누가복음’의 기자 누가는

‘메시야 대망 사상’을 가진 당시 수많은

유대 민족들 중에서, 유독 경건한 신앙위인 두 사람을 증인처럼 부기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므온’이라는 노년의 남자와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선지자’가 그들입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남자 한 사람과 여자 한 사람을 평등하게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두 사람 중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는 인물소개처럼, 그는 메시야의 강림 곧 성탄을 간절히 ‘기다리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메시야 이해’에 관해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그런 국가 내지 집단이기주의적인 ‘정치적 메시야’를 고대하던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과는 달리 ‘초월적 메시야’로서의 진면목을 제대로, 온전하게 꿰뚫어봤던 참 신앙위인이었다는 그것입니다.

그럴 것이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서’ 부모가 안고 오는 ‘아기 예수’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때 이렇게 찬송 및 예언합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누가복음2:28-33)

 

시므온은 과연 참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고,

‘만민 앞에 예비하신’ 메시야이자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서의

‘초월적 메시야’의 진면목을 분명하게 예언한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안나라는 여선지자’는,

‘과부된 지 팔십사 년’이 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안나는 나라 잃고 ‘과부된 지 오백여 년’이 된 이스라엘 민족 자체의 고달픈 모습 그 상징적 대변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안나라는 여선지자’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혹은 이스라엘 민족 중심의 메시야를 기대한 모든 무리들을 향한 위로의 대변자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안나 역시 메시야의 성육신을 선지자의 안목으로 확인하고 ‘하나님께 감사’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다만 제한된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동족 이스라엘에게만 위로와 소망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뿌리’가 이스라엘이자 예루살렘인 것도 강조되어야 할 메시지인 것은 분명합니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redemption)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누가복음2:38)

 

여하간 그렇게 ‘만민과 이방을 비추는 빛’이자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해 오신 참 메시야의 진면목이 증언 및 예언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골고다의 십자가 그 현장에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19:30)는 말씀 그대로, 구세주로서의 사역이 최종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보내주신 ‘오순절 성령’을 통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구원과 하늘나라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곧 금세와 내세로 이어지는 ‘초월적 메시야’임이 역사적으로도 증명되었습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세상에 “다시 오리라”고, 사도 요한에게 주신 계시를 통해 이렇게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요한계시록22:20)

 

 

물론 저 종말론적 재림의 ‘때’를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카이로스’는 오직 ‘하나님의 때이자 시간’이니까요.

따라서 소위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점치듯 예언(?)하는

그 때나 시간 등에 미혹을 당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밤의 도적처럼 오리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태복음24:26-27)

 

나아가 주님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25:13)

 

그렇습니다.

‘깨어 있는 삶’이 우리의 몫이자 역할입니다.

따라서 ‘깨어 있는 자’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나

철인 스피노자가 그렇게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의연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

 

성탄을 통해 이미 이루어진 초림(初臨)과

장차 이루어질 재림(再臨)을 막론하고,

‘메시야 대망 사상’을 가지고 ‘깨어 있는 자’들이

영원한 메시야를 보았고 또한 영원한 메시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꼭 종말 때의 재림만이 아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 인해 구속사가 ‘다 이루어진’ 지금은 오늘도 내일도, 바라며 기다리는 자들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늘 현재형으로 ‘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늘 ‘오시는 메시야’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성경에 증언되어 있는 약속이자 언약입니다.

 

 

동양의 성현인 공자의〈논어(論語)〉에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공자의 소망일 수 있었겠지요. 저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

 

그렇습니다.

아침에 참 구원의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습니다.

오늘 참 구원의 메시야를 보면 내일 죽어도 좋습니다. 내일 죽어도 기쁩니다. 생(生)과 사(死)가, 하늘과 땅이 하나로 열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영원한 구원자이신 참 메시야의 진면목을 온전하게 볼 수 있었던 저 시므온은 진실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들 역시 설령 내일 죽을 몸이다 쳐도, 저 선지자 시므온처럼 오늘 이렇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복된 성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가치 있는 유종지미(有終之美)의 생애가 될 수 있기를!

 

-내가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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