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문화〉라는
윌로우 보고서(1978년)에 따르면,
성육신(成肉身)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놀라운 문화적 동일화의 실례’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나 비극과 멀리
떨어져 있는 하늘나라의 안전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내려오셨다.
그분은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낮추셨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으시고,
우리와 같은 삶을 사셨으며,
우리가 겪은 시험을 당하시고,
… 우리의 죄짐을 지시고,
우리의 죽음으로 죽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인간됨을 깊이 있게 꿰뚫어보셨다.
그러나 …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화되셨을 때,
그분은 그분 자신의 신원을 양도하시거나
어떤 식으로든 바꾸신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리 중 하나와 같은 인간이 되면서도,
그분은 여전히 그분 자신이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인간이 되셨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아니신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하나님)께서 그분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이제 그분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다.
다시 말해 우리의 선교는
그분의 선교를 모델로 해야 한다.
실로 모든 진정한 선교는 성육신적 선교이다.
그것은 정체성을 상실함이 없이 동일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의 기독교적 확신과 가치관들과
기준들을 타협하지 않으면서,
그분이 우리의 세계에 들어오신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존 스토트(John Stott)-
‘개신교의 교황’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존 스토트 목사이자 신학자의 저 말씀처럼
‘성육신적 선교’ 사역을 잘 감당했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자유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래서 또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선언 및 고백했습니다.
그렇듯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자기 가족은 물론이고 이웃 나아가 모든 사람을 자원해서 먼저 섬겨야 할 절대 의무를 가진 ‘종’이자 또한 ‘자유인’입니다. ‘죄인인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희생양’이 되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속(代贖)의 값’인 ‘일 만 달란트’라는 구원의 ‘빚’을 가진, 절대 채무를 가진 빚진 자이자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자유인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자원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그 심오한 하나님의 구원과 희생적 사랑(아가페)의 비밀을 망각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되레 그 가족이나 이웃, 나아가 그 사회에서 되레 비판을 받는 ‘무례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위선적 그리스도인’ 내지 ‘교만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마련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곧 ‘지극히 작은 자 중의 작은 자’이자 ‘죄인 중의 괴수’로 살았던 사도 바울은 그래서 우리를 향해 감히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린도전서11:1)
자기가 그리스도들 믿고 축복을 받아,
자기나 자기 가족이 사회적으로 성공 및 출세해서
남들보다 더 잘 먹고 잘 살고, 주류세력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을 본받으라는 것입니까?
연봉(?)이 수억 원 대라는 일부 ‘대형 목사들’의
그런 삶을 본받으라는 것입니까?
시기나 시샘을 하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삶을 본받으라는 것은 분명히 아니잖아요?
지금은 사춘기 청소년만 되어도 그 정도는 분별합니다.
분명하게 해둡시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남들보다 더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자유인이고 남달리 잘 먹고 잘 살며 누릴 수 있는 충분한 능력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작은 이웃들을 구원하고 사랑하고자 자기를 절제하며 비우고 낮추는,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동일화’의 삶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한국기독교 신앙풍토에서도 사도 바울처럼 저렇게 선포할 수 있는 ‘선한 목자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입니다.
‘세상의 소금’은 그 어떤 고급 음식이든지,
저급 음식이든지, 천하고 더러운 음식이든지를
가리지 않고 그 대상을 온몸으로 섬깁니다.
자기의 형체를 전혀 나타내지 않고 전적으로 자기를 비우고 버립니다. 전적으로 ‘동일화’ 된다는 것입니다. ‘성육신적 동일화’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짠맛’ 그 정체성을 결코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되레 음식의 맛을 살립니다. 모든 ‘음식’을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음식 속에 ‘내로다’ 하는 자기의 형태 내지 결정(結晶)이 남아 있는 소금은, 자기에게도 섬기는 대상인 그 음식에게도 다 실패한 경우가 됩니다. ‘네 탓’이 아니고, ‘소금’인 내가 ‘동일화’에 실패한 ‘내 탓’의 경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표현으로, 진심으로 너를 섬기지 못한 나의 아집이나 고집의 탓이자 상대적으로 우월하거나 유식하거나 신실하다고 생각하며, 일방적으로 남을 가르치려고만 드는 ‘나의 교만’이나 ‘우리의 독선’ 때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는 네가 구원을 받지 못한 것도, 세상이 어둡고 혼탁한 것도 다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 역할을 하지 못한, ‘내 탓’이자 ‘우리의 탓’이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주인의식 내지 역사의식 내지 시대의식을 가진 ‘깨어있는 청지기의 탓’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창조주 하나님도 피조물인 세상 인간들의 타락한 죄를 ‘내 탓’, ‘내 책임’으로 여기셨기에 스스로 ‘육신을 입고(成肉身)’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대속과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제 몫의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가 ‘탕자’가 된 불효막심한 아들의 타락한 모습, 그것조차도 아버지는 ‘내 탓’이자 ‘내 책임’이라고 여기셨기에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스스로 구원의 길과 구원의 문을 미리 열어두셨고, ‘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성육신적)동일화’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자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이른바 ‘개발시대를 이끄는 동일화’에는
성공했다지만 정체성인 ‘짠맛’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동일화’가 아닌 타협이나 야합이 되고
그래서 ‘세속화’ 내지 ‘속물화’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되레 세상 내지 사탄의 욕심이나 정욕이나 교만 등의
가치관에 먹혀버린 경우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동일화’는 실상인즉 ‘그리스도가 없는 동일화’이기에
인간 자기의 동일화일 수는 있어도, ‘성육신적 동일화’는 분명히 아닙니다.
오늘 한국교회풍토의 병폐도 그 요인은 한 마디로, ‘성육신적 동일화’가 되지 못하고 되레 ‘세속화’가 되어버린 목자들의 위상이 ‘지배적 소수’나 ‘성공의 모델’처럼 부상되어있다는 데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병폐는 딱히 목자들 탓만이 아닙니다.
‘패역한 백성들’에게는 ‘패역한 왕’을 허락하셨던 하나님의 역사 섭리처럼, 세상의 떡이나 이기적인 복만을 구하는 ‘양들’에게는 세상의 떡이나 이기적인 복만을 구하는 목자를 허락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일 수 있으니까요.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선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양’도 아니고, 다 ‘하나님의 목자’도 아니라고 또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7:21)
따라서 ‘짠맛’이란 정체성을 잃은 ‘소금’은
세상과의 ‘동일화’에 성공했다고 해도 그것은 ‘세속화’의 성공일 뿐이지, 진정한 ‘세상의 소금’의 모습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이란 곧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처럼 낮은 곳에서 낮은 마음으로 세상의 죄인들이나 약한 자들이나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기는 ‘성육신적 소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이방인들’도 세속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권력이나 금력의 실세인 높은 자들이나 강한 자들이나 지극히 높은 자들을 섬기는 데는 다투어 줄을 섭니다. 작위적으로 편을 갈라 분쟁을 일삼으며, 기득권을 누리고자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치열한 권력 투쟁이나 금력 투쟁도 불사합니다. 우리가 그 정도의 열정이나 탐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고 구할 수 있었다면 진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 삶이 과연 어느 쪽의 삶을 “배우라”는 말씀입니까? ‘참 성공’이나 ‘참 축복’의 삶이 과연 어떤 삶입니까? ‘자기의 삶’에는 성공했으나 ‘주의 삶’에는 실패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성공’의 끝은 세상의 바람처럼 결국엔 허무하고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바람’으로 시작해서 ‘세상의 바람’으로 끝나는 사람의 끝은 되레 더 허무하지 않던가요.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늘의 한국교회나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에게 주신
경종의 말씀을 다시금 음미해봅시다.
눈앞으로 다가온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묵상하며,
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고민하는 서로의 염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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