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하늘의 복(福)'과 '심령이 가난한 자'

이형선 2015. 1. 5. 11:53

 

 

우리는 누구나 복을 받는 사람이자

복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무속인들부터 시작해서 모든 하등종교나

고등종교를 막론하고 ‘복타령’을 하지만,

성경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한결같이

먼저 ‘하늘의 복’을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복’을 먼저 구하면 필요한 응분의 ‘세상의 복’도

“더하여 주신다”(마태복음6:33)면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설파하신

인생 지고(至高)의 행복 곧 ‘하늘의 복’

그 자체이자 그 참 복을 받을 수 있는

‘심령의 비밀’에 관한 말씀을 먼저 묵상해 봅시다.

‘산상 팔복(山上 八福)’의 말씀 중에서도

맨 첫 번째 말씀이 그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복음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가?

저 ‘가난한’ 곧 헬라어 ‘프토코스’는 번역 그대로 ‘가난한, 비천한, 거지 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형용사이자 ‘거지(begger)’ 자체를 의미하는 명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거지처럼 가난하고 비천한 자’인데, 그런 자가 ‘복이 있다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니? 엉뚱한 비약이자 실없는 말잔치나 위로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 나오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실례를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여리고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거지였습니다. 시각장애인인 만큼 그는 ‘구걸해서 먹고살 응분의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소문으로만 들었던 ‘나사렛 예수’가 그 길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순간 큰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들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마가복음10:48)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처지에서 지금, 주변 사람들의 꾸짖음이나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를 따질 형편이 아닙니다. 글자 그대로 진실로 ‘심령이 가난한 자’ 바디매오였던 것입니다. 당시 바디매오는 귀로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군중의 소리를 들었지만, 그는 “나사렛 예수여”라고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것은 당대의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의 별칭’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선지자나 성현 중의 한 사람이 아닌,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에 대한 신앙고백일 수 있습니다. 맹인이었기에 그는 욥과 같은 고난의 삶을 통해 되레 남달리 영안(靈眼)이 열려 메시야의 구속(救贖) 내지 대속(代贖)을 기다리던 사람일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그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다는 설명은 성경에 전혀 없습니다. 그는 중도에 ‘맹인’이 된 사람으로, 그래서 되레 더 많은 고통을 당한 사람으로 사료됩니다.

여하간 그런 그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알아보시고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거지인 자기 소유의 전부일 수 있는 ‘겉옷을 내어버리고’ 서둘러 예수께로 나아갑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마가복음10:51-52)

 

그렇게 그는 '믿음'으로, 그의 선행이나 수행이 아닌 '믿음'으로,  육안(肉眼)도 열리고 영안(靈眼)도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길’을 따르는 제자까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곧 ‘심령이 겸손한 자’를 의미합니다.

그럼 여기서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겸손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렇게 기록했으면 더 이해하기 쉬울 텐데, 당시 중동지방 공용어이자 바벨론 포로귀환시대 이후 팔레스틴 지방에서도 대중적으로 통용되던 아람어를 사용하신 예수 그리스도나 그 분의 말씀을 기록한 ‘마태복음’의 기자 마태는 ‘겸손한’ 곧 ‘타페이로스’라는 헬라어 형용사를 쓰지 않고, 왜 굳이 ‘가난한’ 곧 ‘프토코스’라는 형용사를 사용했을까?

 

저는 그 연유를 ‘겸손한’이라는 수식어 문자 자체나 체면 따위조차도 운운할 수 없는, 차라리 ‘비천한’ 지경의 사람 그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당대 사회에서 소외된 ‘지극히 작은 자’일 수 있었던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모습이 그렇고, 역시 ‘가난한, 비천한’ 당대 대다수 유대 민중들의 삶이 그랬기에 그들에게 소망과 친근감을 주고자 하는 심오한 언어적 배려가 거기 담겨져 있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따라서 ‘하늘의 복’을 많이 받으려면 먼저 저 바디매오처럼 진실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눈 뜬 나는 맹인도 거지도 아니다”고요? 그것도 ‘교만’일 수 있습니다. 아니, 그것이 ‘교만’입니다. 영적 맹인도 많이 있으니까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이런 고백을 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차피 거지들이다.”

그렇습니다.

바디매오만이 ‘맹인 거지’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맹인 거지들’입니다. ‘가난한’ 거지들입니다.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거지들’이자 ‘죄인들’인 것입니다.

 

나아가,

‘심령이 가난한 자’의 실례를 성경에서 하나 더 들어봅시다.

이번에는 상대적이고 비교적인 경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상대적 비교의식 내지 우월의식의 경우가 됩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稅吏)’, 두 사람의 사례가 그것입니다. 당시 사회적 지도자 신분이자 부유층에 속하던, 전형적인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서서 따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영성(靈性)에 열리면,

‘영(靈)이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는 물론이고 거리에서도 골방에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눈을 뜨고도, 눈을 감고도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기도도, 독백 같은 중얼거림도, 묵상도, 소원의 간구도 다 대화이고, 저 바리새인이나 세리의 기도도 다 대화입니다.

심지어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하나님께 되레 ‘성내며’(요나서4:1) 투덜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네가 성내는(to be angry) 것이 옳으냐?”(요나서4:4)고 인격적으로 반문하시며, 타이르고 책망하는 ‘말씀’을 주시기도 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인생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대화가 있으면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이자 대화가 있다는 그것입니다. 소통이 있어야만 비로소 대화(對話)가 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대화가 곧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검증된 성경 ‘말씀’을 통해 오늘도 우리들과 ‘대화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성경 말씀을 배우기에 힘써야 할 필연적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럴 것이 성경 말씀을 떠난 영성 생활은 다 자기체험이자 자기중심적인 곧 주관적인 신비주의나 독선이나 미혹의 영에 빠지기 마련이니까요.

 

특히 저 바리새인처럼 ‘심령이 교만한 자’가 되어버리면, 일방적으로 자기 말이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터진 입’은 있어도 ‘들을 귀’는 굳어지고 막혀버립니다. 그래서 정작 들어야할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기도도 대화도 다 무위로 끝나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럼 결국 누가 불행해집니까? ‘영적 교만’에 빠진 바리새인, 자기는 물론이고 그런 자들이 지도자로 행세하는 그 사회의 이웃들까지도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무섭게 꾸짖은 당시의 대상이 세리도 창녀도 흉악범도 아닌, 자칭 ‘거룩한 의인’이었던 ‘바리새인들’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윤리 도덕적으로 의롭게 살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삶을 산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나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평범한 인간 우리의 상식이나 통념으로 보자면 크게 칭찬 및 평가를 해줘야 할, 아주 ‘거룩하고 경건한 신앙인’의 삶이자 구별된 삶일 수 있습니다. 여타 종교에서 남달리 기인처럼 수행 내지 고행하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아주 ‘거룩하고 경건한 신앙인’처럼 여겨지는 것이 평범한 인간 우리들의 상식이자 통념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 생각까지 꿰뚫어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안목과 평가는 그런 우리의 상식이나 통념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의외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복음18:14)

 

당시 창녀처럼 죄인 취급을 받았던 저 세리는 사회적으로도 별볼일 없는 신분이니까 ‘자기를 낮추는’ 행태는 차라리 당연한 소이일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지도자로 성공한 ‘거룩한’ 바리새인이 ‘자기를 높이는’ 행태는 세상에서 차라리 당연한 행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저 바리새인처럼 남의 것 토색질도 안하고, 불의나 간음도 행하지 않고, 금식을 하고, 십일조 드리는 등의 경건하고 거룩한 삶이 별것도 아니라는 것입니까? 창기처럼 돈이나 권력 앞에서 술이나 웃음을 팔고, 세리처럼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을 팔아도, 성전에 나와서 "주여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으며 가슴만 치면 "의롭다"는 구원을 받고 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선 이런 말씀도 분명하게 선포하셨으니까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righteousness)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certainly)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5:20)

 

따라서 저 바리새인의 ‘의로운 삶’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그나 그들의 겉과 속이 달랐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중심이 사람들에게 보이며 행세하기 위한 외식(外飾)이나 형식을 위한 형식에 빠져서,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과 공존하는 삶이 아닌 교만과 차별과 독선과 위선의 삶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인(義人)이라고 ‘자기를 높이는 자’인 저 전형적인 바리새인의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 토색질이나 불의나 간음을 행하는 것보다 더 큰 죄악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인 우리가 절대 주목해야 할 심오한 영성의 비밀이자 심령의 비밀입니다. 가장 크고 무서운 죄악은 ‘심령이 교만한 자‘ 의 그 ‘영적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남다르게 신실한 ‘의인’이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지도자로 ‘성공’했다는 자기과시나 자기도취 그 자체가 교만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거지들’입니다. “내 능력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성공했다”고 해도, 그런 능력과 여건과 건강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 중심을 망각하고, 스스로 교만에 빠지면 그 교만이 상대적으로 작은 이웃과의 모든 관계나 소통을 가로막아버립니다.

 

상대적으로 세리는 분명히 더 나쁜 ‘죄인’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자 죽어야할 죄인이라는 응분의 정체성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럴 것이 그가 기도한 저 “불쌍히 여기소서” 곧 “힐라스데티”는 “구속(救贖)하소서, 긍휼히 여기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등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계를 사는 인간 우리는 하늘의 햇빛이나

이른 비 늦은 비나 공기 중의 산소가 없으면 오늘 당장 죽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후천적 의로운 공로나 선행이나 수행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이자 ‘전적 은혜’로 그 자녀들에게 값없이 공평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삽니다. 거기에 또한 값없이 공평하게 주어지는 ‘복음의 비밀’이자 ‘구원의 비밀’이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에 ‘빚진 자’로의 자세로, 겸손하게 살아야 할 ‘영성의 비밀’이 또한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1:17)

 

저 말씀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인

‘이신득의(以信得義)’ 사상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태생적으로 타락한 정체성을 가진 인간 우리는 그 누구도 후천적인 자기의 선행이나 의로운 공적이나 수행이나 학문이나 재물 등으로 자기를 근원적으로 구원 내지 구속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과 그 은혜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공기 중에 우리가 살 수 있는 '산소'가 있다는 그 은혜의 발견이 '믿음'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하늘에는 우리가 살 수 있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다는 그 은혜의 발견이 '믿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그 ‘본래적 은혜’를 ‘오직 믿음으로’ 인간은 호흡하며 살 수 있고, 하나님의 그 비밀 그 은혜를 겸손하게 믿고 구하는 자가 곧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자기의 한계나 정체성을 늘 명심하고 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겸손하게 대속(代贖)의 구원자인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삶이 과연 진실로 ‘하늘의 복이 있는 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달리 세상에서 성공 및 출세했다고 해서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교만하게 군림할 것도 없고, 남달리 경건하고 거룩한 의인의 삶을 산다고 해서 교만이나 독선에 빠질 것도 없습니다. 남달리 학문 댓 줄 더 배웠다고 해서 유식한 체하며 교만이나 위세의 폼 잡을 것도 없습니다. 이웃을 섬기는 사랑으로 표현되지 못한, 세상의 권력도 재물도 학문도, 신앙이나 수행조차도 다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13:)

남달리 크게 성공 및 출세한 자는,  남달리 큰 의인의 삶을 살고 있는 자는, 다 하나님과 그 사회에 '남달리 크게 빚진 자'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들입니다. 빚을 갚는 것은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의무입니다. 좋으나 싫으나 갚아야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섬기는 사랑(*아가페)으로 갚아야하는 것입니다. 나누고 베푸는 그 자체가 또한 복입니다. 그 영성의 비밀을 아는 것이 겸손이자 진정한 행복이자 축복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 위하여, ‘성 어거스틴’의 명언을 다시금 명심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의인이 되어 교만한 것보다

 죄인이 되어 겸손한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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