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한 개의 사람'과 갑(甲)과 을(乙)의 관계

이형선 2015. 1. 19. 10:05

 

 

지난날, 당시 종로 기독교연합회관에

본부가 있었던 ‘그루터기선교회’에서 사역할 때,

한 외국인 선교사가 저에게 했던 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당시의 구체적인 정황은 기억이 나지 않고

다만 이런 말만 유독 기억이 납니다.

“내가 거기 갔을 때 사람 두 개 있었어요.”

 

물론 외국에서 방문한 그 외국인 선교사가

한국말에 서툰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 ‘사람 두 개(個)’라는 말이 결코 웃어넘길 표현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럴 것이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인격화되지 못하고,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상품화 되거나 물건화 내지 도구화가 되면

‘한 개의 사람’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동물화 내지 짐승화가 되면

‘한 마리의 사람’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최근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한항공(KAL)’의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도

재벌 내지 사주(社主)의 가족이나 자녀라는 갑(甲)이

’갑질‘하는 그 지배적이고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행태에 의해

‘한 개의 사람’이나 ‘한 마리의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을(乙)들의 분노 내지 서민들의 설움이 폭발된

대표적인 사례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자신 역시 ‘한 개의 사람’ 혹은

‘한 마리의 사람’인 것은 아닐까요?

지금 우리 역시 이웃을 ‘한 개의 사람’ 혹은

‘한 마리의 사람’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분명한 것은, 내가 ‘한 개의 사람’이면 이웃도

‘한 개의 사람’으로만 보일 뿐이고,

내가 ‘한 마리의 사람’이면 이웃도

‘한 마리의 사람’으로만 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면

이웃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럴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자기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온 땅의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1:26-27)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자 ‘하나님의 모양’입니다. 물론 육신이야 ‘흙’으로 지어진 자연적 존재이자 그 일부이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진실로 인간의 지고한 존엄성 이해입니다. 그렇게 지고한 가치로 본래적 인간의 품격을 갈파한 그 자체나 뿌리부터가, 성경은 과연 위대한 영성의 책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따라서 지고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이웃 역시 다 지고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가 그런 것처럼, “온 천하보다 더 소중한 생명”(누가복음9:25)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에 했던 명언도 같은 맥락일 수 있습니다.

“부처의 눈에는 다 부처로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다 돼지로 보이는 법이지요.”

따라서 높은 권력의 자리에 있다고 해서, 돈 많은 사주(社主)나 고용주라고 해서, 아랫사람들을 함부로 물건이나 짐승이나 하인이나 노예 취급을 하는 그런 갑(甲)의 갑질은 먼저 인간 자기의 인격 됨됨이가 ‘한 개의 사람’이나 ‘한 마리의 사람’이나 ‘돼지’라는 자기 표출이자 반증일 수 있습니다. 그 정체성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되지 못하고 다만 ‘동물의 형상’을 가지고 ‘동물의 왕국’에서 사는 인간이라는, 어리석은 자기시위이자 위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처럼,

‘한 개(個)의 사람’ 저 ‘개’는 짐승인 ‘개(犬)’가 아닙니다. ‘사람인(人)’과 ‘굳을 고(固)’의 합성어입니다. 사람이 굳어버리면 ‘개’ 곧 ‘물건’이 된다는 것. 따라서 ‘개인주의(個人主義)’도 스스로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물건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저 ‘개(個)’라는 문자와 대치되는 동양의 문자가 바로 공자 내지 유교사상의 화두로 대변되는 ‘인(仁)’이라고 합니다. ‘사람인(人)’과 ‘두이(二)’의 합성어인 ‘인자할 인(仁)’은 물론 ‘하늘과 땅을 아는 인간’ 곧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敬天愛人) 인간’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럼 동양의 현인 공자께서 춘추 오십에 알았다는 ‘지천명(知天命)’ 그 하늘 그 천도 그 천명은 무엇일까요? 맹자가 대신 간결하게 답변해줍니다.

“스스로 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하늘의 의미이다.”

그러니까 자연의 순리 및 섭리 그 필연성을 ‘하늘’ 내지 ‘하느님’이라고 이해한 것. 공자는 더 이상 형이상학 내지 초월성의 세계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세상의 일도 잘 모르는데 하늘의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제자들에게 진솔하게 털어놓기까지 했으니까요.

 

각설하고,

여하간 그렇듯 하늘과 땅을 아는 것이 참 삶이고, 거기서 인간에 대한 ‘어진 사랑(仁)’이 나온다는 것은 과연 동서양을 막론한 인간의 절대 진리입니다. 사람이 구도자로 수행을 하고, 학문을 열심히 닦으면 세상의 이치 곧 ‘땅의 이치’에는 나름대로 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늘의 이치’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것입니다. 전적 타의에 의해서 태어나고 타의에 의해 죽어야하는, 제한된 운명의 사람이 운명의 주관자인 ‘하늘’을 임의로 열 수는 없으니까 늘 문제이자 숙제입니다. 따라서 하늘이 스스로 그 초월성의 세계 그 비밀을 친히 열어주어야만 비로소 땅의 인간들이 알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20세기 유명한 신학자 칼바르트가 강조한 ‘계시(啓示)의 비밀’이자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 그 비밀에 열린 자는 그 자체부터가 ‘진실로 복이 있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동양적 ‘하늘’의 이해처럼 추상적인 존재도 자연적인 존재도 아니고, 인격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자 피조물인 인간 우리를 또한 인격적으로 구원하고 살릴 수 있는 권능의 하나님이자 지식과 감정과 구속사를 위한 확고한 의지를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되지 못하면 동서양을 포함한 인간 우리의 모든 종교도 신앙도 금세도 내세도 부활도 다 헛것이자 무위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에 의해 부활하시고,

금세와 내세의 실재를 몸소 증언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 중심의 사랑(仁)’이 아닌, ‘하나님의 중심의 사랑(아가페)’을 이렇게 역설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느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22:37-40)

 

그렇습니다.

먼저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인격적 내지 실존적 내지 실체적으로 열린 사람이 또한 ‘이웃에 대한 사랑’에 그렇게 열릴 수 있고 행할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을 사랑(*아가페)할 줄 아는 자가 또한 이웃을 사랑(*아가페)할 수 있습니다. ‘작은 이웃’이 하나님으로 보이고, 그리스도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이 하나로 보이는 ‘아가페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고인이 되신 ‘마더 테레사’도 이런 말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

 심판 기준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의하여 판단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과 동일시하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여준 그 사랑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25:40)-

 

‘하나님의 사람’인 마더 테레사는

과연 그 사랑을 확실하게 보고 그 사랑을 확실하게 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지극히 작은 이웃’이 하나로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의 ‘동일시’를 확실하게 보았던 ‘성녀’입니다.

그렇듯 ‘아가페’는 사주나 고용주나 상전이나 가진 자 등 갑(甲)의 신분이 되어도 아랫사람들이나 상대적으로 작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갑질’을 행하며 위세나 횡포를 부리지도 않고, 그들을 멸시 천대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원해서 그런 사람들을 섬기고 살리는 ‘거룩한 종’이 됩니다.

‘아가페’는 을(乙)의 신분이 되어도 윗사람들이나 상대적으로 크고 강하고 부유한 사람들에게 ‘을질’하며 그들을 시기하거나 원망하거나 증오하거나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갑도 을도 다 ‘동일시’ 되어야 할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들’이자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의 갑’들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품은 마더 테레사가 진정으로 강하고 크고 부자였던 것처럼, 만유의 주인이자 ‘만유의 권력’이자 ‘만유의 재벌’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모신 자들은 세상의 권력이나 재벌이나 그 자녀들에게 꿀릴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자 진정으로 큰마음인 것입니다.

 

입장이나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할 수 있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여유와 미덕을 가지고,

서로 배려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리는,

하나님의 마음이자

그리스도의 마음이

보다 큰 인간들의 사회가

어서 속히 이루어질 수 있기를!

무한 경쟁하는 ‘경제 동물의 나라’가 아닌,

더불어 공존 공생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서 속히 이 땅 위에 이루어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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