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인용문은 17세기 영국의 대문호인
존 밀턴의 대서사시〈실낙원(Paradise Lost)〉
제12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창세기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금기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창세기3:5)는
사탄의 미혹에 빠져 임의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이후,
결국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아담이 천사와
나누는 대화이자 회한어린 신앙의 고백입니다.
함께 묵상해봅시다.
-아담이 마지막으로 대답하였다.
“앞으로 나는 순종하는 것만이 최선이며,
유일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고,
그의 면전에 있는 것처럼 걷고,
언제나 그의 섭리를 지키며,
모든 피조물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항상 선으로 악을 정복하고,
작은 일로서 큰 일을 성취하고,
약하게 보이는 것으로서
세상의 강한 것을 물리치고,
소박한 유순(柔順)으로
세속적인 지혜를 무너뜨리고,
또한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견디는 일이
최고의 승리로 가는 용기이며,
신앙을 가진 자에게는 죽음이 생명으로
통하는 문임을 배우고자 합니다.
나는 이제 영원히 축복받은
나의 구속자로 인식하는 성자(聖子)의
모범을 통하여 이것을 배웠습니다.”
이 말에 대하여 천사도 역시 마지막으로 대답하였다.
“이것을 배운 그대는 이제
최고의 지혜를 터득하였다.
더 이상 높은 것을 바라지 마라.
그대가 비록 모든 별들의 이름을 다 알고,
모든 천사들과 온갖 영원한 비밀과 온갖 자연 현상,
다시 말하면 하늘과 공중과 땅과 바다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알고, 이 세상의 모든 부와 모든
지배권 즉 대제국을 수중에 넣는다하더라도 소용없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그대의 지혜에 부합하는 행위를 더하며,
신앙을 더하며, 미덕과 인내와 절제를 더하며,
그 위에 자비의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일의
영혼이 되는 사랑을 더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이 낙원에서
떠나기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낙원을,
훨씬 더 행복한 낙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저 천사는
지정학적 ‘낙원을 잃은(失樂園)’ 아담에게
‘훨씬 더 행복한 낙원’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그
‘너희 안에 있는’ 곧 너희 ‘마음속에 있는’
낙원이자 천국이자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17:20-21)
물론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Eden)’은
지정학적 ‘동방’에 위치한 ‘복락의 동산’을 의미합니다.
‘낙원(Paradise)’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세기2:7-8)
과연 사람은 ‘생령(a living being)’의 존재입니다.
’생기‘ 곧 ’하나님의 영(靈)’이 ‘살아 있는 존재’이자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가진 여느 짐승들과는 구별되는 ‘최고의 복락’ 그 근원이자 ‘최고의 지혜’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땅의 흙으로 지어진’ 육체적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을 간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호흡처럼 생기처럼 ‘마음속’에 늘 하나님의 영을 간직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은
그런 ‘하나님의 영’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것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임의대로 따먹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담은 주어진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은 했지만, ‘하나님의 영’ 내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은 일체입니다. 가정의 가족 관계에서도 ‘아버지의 말씀’이 곧 ‘아버지의 존재’와 일체인 것처럼 말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불복 내지 거역한 자식을 그래서 우리는 ‘내놓은 불효자식’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렇듯이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서 ‘하나님의 영’이자 아버지 하나님의 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참 행복의 세계인 ‘낙원’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실낙원 인생’이 되고 만 것. 그렇게 타락한 정체성은 ‘원죄’가 되어 후손이 우리 모두에게 유전자처럼 대물림되어 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 ‘영적 비밀’은
오늘을 사는 우리 개개인에도,
가정에도 교회에도 사회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의 참 삶과 참 행복에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서, 우리가 필연적으로 배워야 할 절대 비밀인 것입니다.
그럴 것이 우리 개개인의 마음에도, 가정에도, 교회에도, 사회공동체 및 국가에도 그 ‘중앙에’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생령의 존재로 임재하고 있을 때 비로소 그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 및 국가도 행복한 참 낙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聖經)의 비밀이자 수천 년 인류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최고의 지혜’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뒤에 버려두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우선은 배가 부릅니다. 세상의 돈이나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지식도, 떡이나 주색도 ‘먹으면’ 우선은 배가 부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그것들이 늘 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창세기3:6) 합니다. 늘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말씀보다 떡이 가깝습니다. 그것이 육신을 가진 인간 우리의 솔직한 성정이자 ‘타락한’ 우리의 타성입니다.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세상의 모든 탐욕이나 쾌락에는 득실(得失)의 양면성이 있어서 그에 대한 응분의 대가가 꼭 따른다는 것입니다. 화려한 연예계 스타들이 한편으론 병적 허무감와 허탈감을 앓으며 마약이나 수면제 등을 남용하거나 심지어 자살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가 맨 먼저 밝히 안 것은
사탄의 유혹처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리라”는,
그런 스스로 고상하고 거룩하고 신령한 모습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열망이나 노력에 의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과는 되레 그 반대였습니다.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아는’ 그것이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삼았더라.-(창세기3:7)
저 ‘벗은(naked)’ 곧 히브리어 ‘에롬’은
‘헐벗은, 주린, 벌거숭이’를 의미합니다.
산은 ‘흙’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풀’을 먹고 ‘숲’을 먹고 살아야만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산이 흙만 먹고 살면 ‘벌거숭이’가 됩니다. 그렇듯 사람도 ‘떡’만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으로 살아야만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도 떡만으로 살면 ‘벌거숭이’가 됩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위시한 인간 우리들이 스스로 “벌거벗은 줄을” 알고 깨달은 그것은 부끄러운 모습 곧 자기 수치의 발견입니다만, 아울러 불안과 두려움과 허무를 앓는 존재로 전락했다는 실존적 자기 발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자 되레 죽음에 이르는 불안과 두려움과 허무에 사로잡힌 존재가 되고만 것입니다.
오늘의 모든 자력 종교의 가르침 역시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신이 될 수 있다고,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분명히 배치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태생적으로 그 정체성이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결코 신이 될 수 없다고 증언 및 갈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력 종교의 치열한 모든 구도도 수행도 역시 그 끝은 인간으로서의 실존적 자기 한계 그 발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허무 등을 극복하고자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습니다. 현대인들이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학문이나 자기 공적이나 자기 수행이라는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의 자기 위장입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도 구원도 회복도 아닙니다. 위장일 뿐입니다.
아담은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시쳇말로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형국이 되겠지요. 하나님은 그런 아담을 그래도 찾으십니다. 불러주십니다. ‘탕자’를 부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자 사랑이자 은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3:9)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담이 숨어 있는
‘위치’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내지 그 ‘상태’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에게 그래도 소망이 있었던 것은, 타락한 탕자에게 그래도 소망이 있었던 것은, 부끄럽고 그래서 두려운 자기 모습 그대를 고백하며,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그 자체에 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세기3:10)
하나님은 그런 아담 부부에게 친히 ‘가죽옷’ 지어 입히십니다. 인위적인 ‘무화과나무 잎의 옷’이 아닌, ‘희생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타난 구속사(救贖史)적 계시이자 예언의 시작입니다. 세상 내지 사람 중심의 모든 허위의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죽옷’을 입는 그것이 참 구원이자 신의 성품의 회복이자 영원한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garments of skin)을 지어 입히시니라.-(창세기3:21)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부르십니다.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여전히 위치를 묻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성공이나 실패나 대형이나 소형 여부를 묻고 계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 영적 상태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했지요? 탕자여도 좋고, 탕녀여도 좋습니다. 오늘이, 지금이, 부끄러운 자기 모습 그대로 나아가기에 가장 빠른 때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림받은 자니라.-(고린도후서13:5)
그렇습니다.
그것이 또한 ‘성자(聖者) 중의 성자’였던 사도 바울의 ‘마지막 대답’이자 ‘마지막 고백’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마지막 대답’이자 ‘마지막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것이 우리의 심령 ‘중앙에’ 곧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우리는 버림받은 ‘무정란(無精卵)’일뿐이기 때문입니다.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옷’을 입지 못하면 우리는 다만 벌거벗은 무정란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은 ‘유정란’과 똑같지만, ‘무정란’은 아무리 열심히 품고 씻고 닦아도 생명체로 부화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거듭난’ 부활의 세계 내지 천국을 결코 볼 수 없기에 스스로가 불행합니다.
오늘 우리의 정체성은 과연 ‘유정란’일까요? ‘무정란’일까요?
아무쪼록 하늘의 복이 있는 ‘유정란’이기를!
'영성 편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사랑의 힘 (0) | 2015.02.09 |
---|---|
인생 카페,〈골고다〉에서 (0) | 2015.02.02 |
'한 개의 사람'과 갑(甲)과 을(乙)의 관계 (0) | 2015.01.19 |
붕어빵 (0) | 2015.01.12 |
'하늘의 복(福)'과 '심령이 가난한 자' (0) | 2015.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