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사랑의 힘

이형선 2015. 2. 9. 11:46

 

 

겨울이 왔다 싶더니,

벌써 봄이 기지개를 켜는군요.

지난주 수요일이 ‘입춘’이었지요.

물론 아직은 겨울이지만,

그래도 입춘(立春)이 지나면

산야의 겨울나무를 포함한 모든 초목들이

땅 속 깊은 곳에서 목하 부활을 준비하는

생명의 역동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래서 글자 그대로 ‘봄이 서는’ 입춘인가 봅니다.

 

인생으로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혹한의 겨울이나 동장군은 찾아오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겨울이 오면 과연 봄도 멀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선지 저도 청년 시절에 애송했던,

바이런, 키츠와 함께 ‘영문학 3대 낭만파 시인’으로

불리던 쉘리(P. B. Shelley)의 시구가 다시금 떠오릅니다.

 

-겨울이 오면, 봄은 어찌 멀건가?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그렇습니다.

‘겨울’이 와도, 그 뒤에 부활의 ‘봄’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내지 믿는 사람들은 결코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고난이나 고통도, 죽음조차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겨울’이라는 현실에서 ‘봄’이라는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는 ‘희망의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심미안(審美眼)일 수도 있고 영안(靈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그런 눈을 가지면 우리도 다 저 쉘리처럼 ‘인생의 겨울’에도 심령의 여유가 있는 ‘낭만파 시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영성파 시인’이 될 수 있으면 더더욱 좋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 ‘시인’이기도 했던 ‘신앙위인’ 다윗은 영욕(榮辱)과 희비(喜悲)가 극적으로 교차했던 그의 생애를 돌이키며 이렇게 노래했으니까요.

 

-(여호와 하나님)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weeping)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rejoicing)이 오리로다.-(시편30:5)

 

다윗은 좋든지 싫든지 거의 한평생을

전쟁터에서 누벼야만했던 무인(武人)이자 장군입니다.

이스라엘 왕국 그의 시대가 지정학적으로 그렇게 불안정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조국의 입지(立志)와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 한평생 전쟁 일선에서 선봉장이 되어 적들과 피를 흘리며 싸워야만했습니다. 실상인즉 그가 이스라엘 왕국의 ‘태조(太祖)’인 셈이니까요.

그러나 그런 그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면 또한 늘 영성 깊은 ‘신실한 시인’이 되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에서 전쟁하며 살아도’ 또한 신실한 시인들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럴 것이 “사랑을 하게 되면 누구나 시인이 되는 법”이니까요.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있고, 어떤 시구(詩句)로 어떻게 노래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이론도 지식도 관념도 철학도 사변도 아닙니다. ‘한 몸을 이루는’ 인격적이고 체험적이고 구체적인 만남이자 교제이자 관계입니다. 참고로, 사도 바울의 대단한 힘과 능력의 근원이었던 ‘사랑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8:35-37)

 

과연 그렇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nakedness)이나 위험이나 칼’이 없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닙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의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도 그런 환난이나 위험은 늘 찾아옵니다. ‘겨울’이 오는 것처럼 찾아옵니다. ‘저녁에 울음이 깃들이는’ 것처럼 찾아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진실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진면목입니다.

 

한편,

지난달 집에서 지상파방송 TV의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를 시청하면서 나름대로

감동을 받은 일화를 좀 술회해보고 싶습니다.

삼십 년 이상을 함께 살아온 아내가 희귀병이자 불치병인 뇌질환으로 전신이 마비된 이후, 수년 동안 몸집이 작지도 않은 아내를 어린 자녀처럼 자주 업고 다니면서 매일 먹이고 씻기고 소대변까지 받아내면서 살아가는 남편의 일상이 진솔하게 소개된 내용이었는데, 60대인 남편의 순박한 그러나 우수가 깔린 표정에서 ‘한 몸인 아내’에 대한 그 사랑의 진실함을 절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랑도 이혼도 유행가 가사처럼 흔한 오늘의 세상에서, 사랑했기에 서로 부부가 되어 한세상 같이 살면 저 정도는 되어야 사랑이나 그 책임이나 그 의무에 대해서 운위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젊을 때는 고운 얼굴이었겠다 싶은 50대 아내가 애써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면서 어눌한 말로 그러나 어린애처럼 밝은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녀가 지을 수 있는 한 편의 사랑의 시, 그 전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남…편…최…고…야!”

 

그래서 저도 공감하듯 응원하듯

박수를 몇 번 쳐주었습니다. 그럴 것이 그것은 분명히 돈이나 월급을 준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의 힘이자 배려입니다. 그런 사랑은 남녀 혹은 부부간의 성적인 사랑인 ‘에로스의 차원’을 넘어선 ‘아가페 차원’의 사랑이자 헌신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그들의 ‘겨울’ 내지 ‘울음’ 내지 ‘불행’을 ‘넉넉히 이기고’ 있었습니다.

‘한 몸인 부부’에 대한 서로의 사랑이나 섬김은 저 정도는 되어야 당연한 것일 터인데, 현실적 내지 시대적으로 그것이 희귀한 사건이 되고 특종이 되어 ‘세상에 이런 일이’ 될 정도가 된다면 그런 사회는 피차 불행할 것입니다.

한 몸인 자기 아내나 친부모나 친형제자매조차도 사랑하지 못한 사람이, 보다 작은 이웃이나 불행한 소외자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진실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웃 사랑을 과연 강조하며 가르칠 수 있을까요? 신앙(信仰)의 난제도, 이성(理性)의 난제도 다 거기서부터 주어집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네 원수조차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필연성이 그래서 심오한 진리입니다.  

 

여하간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저 아내를 사랑하는 저 남편의 사랑보다 훨씬 더 크고 숭고하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을 떠나서, ‘못난 그래서 늘 미안한’ 나를 사랑하는 ‘우리 남편’인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과 그 이타적 헌신은 저 남편의 사랑과 헌신보다 지극하도록 “크고 높고 깊고 넓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운위할 수도, 사랑을 가르칠 수도, 사랑을 강조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당신의 가르침 그 진리를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해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복음13:34-35)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거창한 교회당 건물을 세우는 ‘대형 목회자’가 되는 그 자체도 아니고, 신학박사 같은 지식인이 되는 그 자체도 아니고, 도인이나 수도승 같은 고고한 수행자가 되는 그 자체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그런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어떤 ‘다른 복음’이나 ‘다른 말씀’에게도 양보해서는 안 될, 절대 안 될, ‘새 계명’이자 정녕 올바른 신앙의 핵심적 가치인 것입니다.

‘참 사랑’ 그것이 바로 ‘너희가 서로’ 세상의 모든 풍파를 넉넉히 이기며 살 수 있는 힘 그 자체이자 능력이자 그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별이 뜨는 것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이자 ‘살아계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빛 그 은혜를 세상의 선인과 악인에게 함께, 골고루, 평등하게 비춰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이자 그 사랑을 본받은 저 사도 바울을 위시한 제자들의 ‘순교자의 사랑’이 정녕 우리 개개인 안에 있다면, 우리 개개인도 다 세상의 모든 우여곡절을 ‘넉넉히 이기며’ 살 수 있고 나아가 이웃도 다 그렇게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우리 남편 최고야!”, 아니 “우리 주님 최고야!”라고 ‘사랑의 시편’을 노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 진정한 그리고 영원한 ‘영적 사랑’ 역시 남편과 아내처럼 ‘한 몸이 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영적 비밀’을 이렇게 증언해주셨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제자들)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요한복음17:25)

 

저 말씀에서 나오는

‘알다(know)’의 헬라어는 모두 ‘기노스코’입니다.

‘기노스코’는 체험적으로 ‘동침하다, 동행하다, 깨닫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한 몸'이라는 일체감을  갖는다는 것. 지식적이나 이론적이나 교리적이나 교과서적으로 아는 그런 ‘알다’ 곧 ‘오히다’와는 구별되는 언어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분명히 이론도 지식도 관념도 철학도 사변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내가’, 그리스도와 ‘내가’ 한 몸을 이루는, 일대일의 인격적이고 체험적이고 구체적인 만남이자 교제이자 관계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안에 그런 ‘영적 사랑’이 있으면 그런 사랑이 어떤 식으로든 또한 밖으로 표현이 될 것입니다. ‘빛’ 혹은 ‘소금’ 혹은 ‘향기’로 이웃 내지 세상을 향해 표출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재물을 탐하고 권력을 저울질하면서 세속화된 기성교회의 타락도

‘그리스도의 제자’와는 거리가 먼 문제이지만,

근래에 스스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점쟁이처럼 한반도 중심의 ‘휴거설’이나 ‘전쟁설’ 등 각종 근사한 시한부종말론을 예언하는 거짓종이나 거짓선지자들도 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에서 벗어나면’ 다 ‘미혹의 영’ 내지 ‘사탄의 영’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무당이나 점쟁이처럼 이기적으로 설쳐대며 집단이나 사회를 미혹으로 인도하고, 언필칭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신앙풍토를 우습게 만들어버립니다. ‘개판’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도 아니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대적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세상에 각종 유식한 ‘다른 복음’이나 유사한 ‘거짓복음’이 난무할수록, 성령과 성경 말씀에 의해 밝히 분별할 수 있는 그 절대기준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기록된 성경 말씀’ 앞에서 더욱 겸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린도전서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