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선한 목자'와 '선한 양'의 진면목

이형선 2015. 2. 16. 11:42

 

 

새해가 시작되는 민속명절인

설날이 눈앞으로 다가왔군요.

‘까치의 설날’은 지레 신이 난 어린이들의 설렘이나

정서나 기대와 함께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을미년(乙未年) 새해는 이른바 '양띠해'입니다.

그래선지 양(羊)의 모습이 설과 함께 한결 다정다감하게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듯합니다.

 

지극히 평화롭게 사는 온순한 초식동물의 대명사인 양.

항상 무리를 지어 살면서 들레지도 않고

이웃이나 다른 이들을 지배하려고 하지도 않고,

조용히 자기 분수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화목과 공존의 삶을

추구하는 양의 모습은 한 마디로 ‘선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도 죄인인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제단의 대속(代贖)의 제물

곧 ‘희생제물’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물론 구약성경에 나타난 그런 ‘희생양’의 모습은

장차 오실 곧 신약시대에 친히 ‘육신을 입고(成肉身)’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의 모습

그 진면목을 계시 및 예표 및 상징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자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자’였던

세례 요한의 증언이 그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the Lamb of God)이로다.-(요한복음1:29)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자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희생양’입니다. 타고난 원죄와 자범죄 등을 포함해서 모두가 죄인인 인간 우리들이 인간 스스로의 선행이나 수행이나 공적으로는 의로워질 수도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창조주 하나님은 익히 알고 계셨기에 ‘단회적인 희생양’이자 ‘영원한 희생양’을 친히 준비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래도 내 자식’인, 이미 가출해버린 ‘탕자(蕩子)’를 위해서 회개하고 ‘집’ 내지 ‘천국’으로 돌아올 길을 친히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희생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랬기에 또한 양들을 온전한 구원과 생명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유일한 ‘선한 목자’가 되신 분입니다. 죽음의 세계를 안 이가 오직 부활의 세계를 알듯이, ‘희생양’의 진면목을 안 이가 오직 ‘선한 목자’의 진면목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을 직접 들어봅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요한복음10:11-12)

 

한편,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국의 대표적인 신앙위인 다윗 왕은

미천한 목동(牧童) 출신의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별볼일 없는 서민이었던 베들레헴 ‘이새’ 집안의 여덟 번째 아들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나서, 소년시절 산야 내지 광야에서 때론 사자나 곰들과도 물매나 막대기 등으로 맞서 싸우면서(*사무엘상17:40), 목숨을 걸고 양을 지키던 목동 생활을 다년간 직접 했던 분입니다. 그래서 그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체험 속에서 심오한 영성의 비밀을 발견하고 그 비밀을 그대로 그의 신앙의 삶으로 승화시킵니다. 목자이신 하나님 내지 그리스도와, 양인 자기의 관계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믿음의 비밀이자 하늘의 복을 받은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의 유명한 시편을 통해 그것을 확인해봅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편23:전문)

 

실로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신앙후배들에게 잔잔한

영혼의 평화와 위로와 안식과 소망을 준 명시편입니다.

저도 젊은 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며’ 살 때, 즐겨 애송하며 혼잣말로 읊조리던 시편이기도 합니다. 저 시편에서 다윗은 ‘여호와’ 곧 하나님을 한 마디로 ‘나의 목자’이자 ‘선한 목자’이자 ‘인자한 목자’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무리의 관계 이전에, 먼저 일대일의 관계인 ‘나의 목자’로 노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오직 양에게 필요합니다. 염소나 스스로 강하다는 사자나 곰들에게는 목자가 필요 없습니다. 따라서 목자가 목자가 되려면, 내가 먼저 목자를 구하고 찾고 의지하는 양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려면, 내가 먼저 양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양이 될 때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고 ‘선한 목자, 인자한 목자’가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창조 영성의 비밀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늘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아울러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곧 빗나갈 땐 그래서 타락할 땐 ‘내 영혼을 회개하게 하시고’, 늘 어리석고 부족해도 하나님 그 지존하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righteousness)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구원의 길이자 은혜의 길이지 바르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

따라서 그런 목자가 ‘나와 함께 하심을’ 믿은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을 지켜주시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그 능력과 그 섭리역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그런 믿음에 화답하며 확인이라도 하듯이 마침내 계시 및 예언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께선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들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10:7-10)

 

그렇습니다.

양에게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곧 영원히 사는 ‘하늘나라의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온 목적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고’,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풍성히 얻는 그것이 바로 진실한 하늘의 축복입니다.

‘내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풍성한 받은 ‘양’이 된다면, 그 선함과 그 인자함은 또한 이웃에게 나눠질 것입니다. 소처럼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양은 그 털도 그 고기도 그 가죽도 다 남에게 주고 가는 헌신적인 ‘선한 존재’의 표상이니까요.

 

내킨 김에,

잘 알려진 양의 성품 몇 가지를 다시금 묵상해 봅시다.

양은 어미의 젖을 먹을 때 늘 앞다리를 꿇고 젖을 빱니다. 어미의 은혜를 아는 그런 겸손한 자세는, ‘희생양’이 되신 우리의 ‘어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곧 ‘생명의 말씀’을 먹을 때 우리가 취해야할 응분의 자세이기도 할 것입니다.

양은 또한 어리석게 보여도 자기 ‘목자의 음성’과 ‘다른 자의 음성’을 분명하게 알고 구별합니다. 목자가 아니면 절대 그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스스로 지혜로운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는 과연 ‘선한 목자’의 말씀과 ‘삯꾼 목자’ 내지 ‘거짓 목자’의 말씀을 알고 구별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만 그리고 우리 가족만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이미 기록되어 있는 성경 말씀을 넘어선, 각종 인위적이고 미신적인 ‘종말설’이나 그런 유형의 ‘전쟁설’ 등의 거짓 복음과 거짓 예언자들의 영이 난무하며 미혹과 혼란을 일삼고 있는 오늘의 신앙 내지 사회풍토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양들보다 되레 분별력이 더 없는 자들인지도 모른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듭니다.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10:14-15)

 

양은 또한 수양을 위시해서 암양에게도

염소들처럼 뿔이 있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죄다 둥그렇게 휘어져 있습니다. 염소처럼 공격용 뿔이 아니고 다만 방어용 뿔이라는 것. 따라서 양도 때론 누군가와 상대적으로 싸우며 분노할 수도 있고 치고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염소의 뿔처럼 남을 거칠게 해치는 공격적인 차원의 행위는 아닙니다. 심판이나 복수는 ‘나의 목자’이자 ‘선한 목자’에게 맡기고, 다만 방어적인 차원의 행위에 머무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강한 목자’의 보호와 힘을 되레 얻을 수 있는 양의 지혜입니다.

실인즉 염소는 그 눈빛이나 인상부터가 도전적이고 공격적이지만, 양은 그 눈빛이나 인상부터가 선하고 인자합니다. 그의 속에 ‘선하고 인자하신 목자’가 거하면 그 눈빛이나 인상도 변화되기 마련인 것이겠지요.

 

양은 또한 상대가 자기 목자일 경우에는

자기 목자가 온몸의 양털을 죄다 깎아버려도, 헐벗은 알몸이 되고 심지어 털을 깎다가 큰 상처가 나서 피가 줄줄 흘러도 마치 죽은 듯이 가만히 있습니다. 전적인 맡김입니다. 그런 모습이 안타까워서 우는 쪽은 되레 보는 사람들 쪽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도 바울이 이렇게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 싶기도 합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사도행전21:13)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선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선한 목자’의 진면목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목자의 길과 삶을 오직 믿고 의지하고 따르고 본받는, ‘선한 양’의 진면목 역시 그와 같은 길이자 삶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 사도 바울의 고백이 또한 ‘선한 양’의 진면목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확연히 분별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구약시대’를 살았던 저 다윗이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 나의 목자’의 도우심을 받아, 사망의 골짜기나 원수를 이기고 마침내 승리하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노래했는데, 그것은 구약시대를 산 이스라엘 민족을 대변하는 ‘선한 양’ 다윗의 노래이자 진면목일 수 있습니다. 그럴 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구원사역의 완성을 향해서 ‘점진적 계시’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일테면 아버지가 유년시대의 어린이에게 너무 어려운 말씀을 주면 그 말씀이나 계시를 이해할 수도 따를 수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희생이나 헌신의 깊은 의미를 알아야 할 성인시대가 되어서도, 차라리 이기적인 내지 집단이기적인 내지 민족이기적인 유년시대의 말씀만 노래하고 있으면 그것은 유치한 행태이자 ‘값싼 은혜’에 안주하고 있는 행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은 스스로 육신을 입은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메시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의 현장, 그 현장에서 구원의 길을 “다 이루었다”(요한복음19:30)고 분명하게 선언하신 ‘신약시대’이자 계시가 다 이루어진 ‘성인시대’입니다. 따라서 ‘성인시대’를 사는 ‘선한 양’의 진면목은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보다 성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자기 복이나 자기민족의 기복신앙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저 사도 바울처럼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고, 이웃이나 이웃 민족의 구원과 선교를 위해서 “내 잔을 비우고 낮추었나이다”라는 ‘케노시스의 삶’을 고백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약시대를 사는 ‘선한 양’과 양무리를 이끄는 ‘선한 목자’들의 진면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왕 다윗’과는 다른,

이방 내지 인류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한 ‘왕중왕’이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성이자 완전성(integrity)’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개개인을 위해 ‘대속의 제물’ 곧 ‘희생양’이 되신 우리의 참 구주는 구약시대의 인물들인 다윗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아니고, 어떤 성자나 성녀나 성현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건에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해석,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세상 해석 내지 신문 해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참 가치나 참 구원이나 참 생명이나 참 복의 의미나 그 진정성이나 영원성이 구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때 내지 한 시대와 함께 멸망하거나 사라져버릴 허무한 것들이나 그 가치에 목을 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신앙풍토가

되레 사회적 우려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한 마디로, 이른바 ‘기독교지도자’라는 일부 배부른 ‘대형목회자’들이나 일부 ‘대형교회’가 “내 잔(내 교회의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개교회성장주의나 개교회이기주의적인 말씀이나 삶은 잘 알고 부르짖어도, “내 잔(내 교회의 잔)을 비우고 낮추었나이다”라는 신약 ‘케노시스(*비움과 낮춤)’의 말씀이나 삶은 보여주지 못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라는 순교적이고 헌신적인 초대교회의 말씀이나 삶 그 진면목을 보여주지는 못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나아가 오늘 우리 개개인의 모습이나 진면목은 과연 진실하게 서로 섬기며 이웃이나 이웃무리와 화평과 공존의 삶을 살고 있는 ‘선한 양’의 모습일까요? 이웃이나 이웃무리나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돈이나 권력이나 ‘갑의 자리나 위치’라는 ‘뿔’로 직접 간접으로 자꾸만 들이받으며, 차라리 교활하도록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탐욕적인 삶을 구가하는 ‘못된 염소’나 ‘악한 염소’의 모습은 아닐까요? 보다 성숙한 인격과 삶을 위해, 저 자신부터 가슴에 손을 얹고 점검해볼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그 왼편에 두리라.-(마태복음25:3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