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황금의 나라'와 '청교도 신앙'

이형선 2015. 3. 2. 11:32

 

 

19세기 미국의 저명한 문인 에드가 포는,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한창 일던

금광(金鑛) 붐을 풍자해서 ‘엘 도라도(El Dorado)’란

서사시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근사하고 꿈도 야심도 많은 기사가

노래를 하며 ‘황금의 나라’를 찾아 나서지만,

결국 그 나라를 찾지도 못하고

기진맥진 실망하고 만다는 내용입니다.

저 ‘엘 도라도’란 스페인어로,

스페인 사람들이 남미 아마존 강가에 있다고

믿었던 ‘황금의 나라’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욕망의 나라이자 허영의 나라입니다.

 

물론 사람은 꿈을 먹고 산다고, 콜럼버스 역시

‘황금의 나라’ 인도를 찾아가다가 우연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의 뒤를 따라 수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엘 도라도’를 찾아 남미로, 남미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은 하나 같이 저 야심 많은

기사의 경우처럼 허무한 실망과 좌절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열매’일 수 있는, ‘빈민후진국’이자 ‘마약의 무대’로

불리는 남미 여러 국가들의 역사와 오늘의 실정이

그것을 생생하게 증언해줍니다.

 

상대적으로, ‘황금의 나라’가 아닌,

오직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620년에 신대륙 아메리카로

향했던 102명이라는 ‘적은 무리’의 영국 청교도들은

북미에서 과연 ‘하나님의 나라’ 내지

‘성경 말씀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인간의 전적 무능과 한계를 체험적으로 깨닫고 고백하며, 오직 대속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성경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살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인간의 모든 범사를 선한 길로, 복된 길로 인도 및 섭리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었던 청교도(puritan)들. ‘하나님의 정의’에 의거해서 정당하게 열심히 땀을 흘려 일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 내지 사회에 실현하고자 늘 ‘깨끗한 그리스도의 양심’ 안에서 늘 절제하며 늘 검소하게 살고자 노력했던 청교도(淸敎徒) 신앙인들.

그렇게 ‘온전한 복음’을 추구하며 살았던 저들은 과연 후세의 역사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국이자 ‘황금의 나라’까지를 세웠습니다. 근세사에서 그런 미국의 위상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현대를 사는 오늘의 미국인들은

청교도이자 이민 1세대인 그들의 조상들과는 이미 다릅니다. 한 마디로, 순수한 청교도 신앙과는 거리가 이미 멉니다. 제국주의나 패권주의나 신자유주의적인 성향에서 비롯된 비판적 내지 부정적인 측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 조상, 그들이 뿌린 ‘거룩한 씨’나 그들이 심은 ‘거룩한 뿌리’가 아직도 살아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거룩한 씨’ 내지 ‘거룩한 뿌리’가 살아있는 한, 하나님은 인류의 구속사를 위해 미국의 세속사나 그 영향력이나 그 역할까지도 계속 사용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청교도의 모습이 다분했던 그래서 되레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 역할을 하며 사회적 존경도 받았던, 한국초대교회 우리의 어버이들이자 신앙선배들의 신앙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청교도 신앙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20세기 복음주의신학자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는 그의 저서〈청교도 사상〉에서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청교도는 천국에 마음을 둔 열심 안에서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고, 충만한 기도와 목적을 가지고 실천하는 질서의 남녀들이 되었다. 그들은 삶을 전체로 보았기 때문에 묵상을 행동과 일치시켰고, 예배를 일과 일치시켰고, 하나님 사랑과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일치시켰고, 개인의 정체성을 사회의 정체성과 일치시켰고, 넓은 범위의 관계적 책임들을 철저하게 양심적이고 주도면밀한 방법으로 관계적 책임들과 일치시켰다. 그들은 성경에 제시된 그리스도인의 의무들의 넓은 범위 전체를 한데 통합함에 있어 놀라운 조화를 이루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몸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일치 및 통합,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정체성 곧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일치 및 통합을 위한 ‘온전한 복음’의 신앙과 삶. 그것이 ‘청교도 신앙’입니다. 그 구현 내지 실현을 위해 늘 사심이나 탐심을 버리고, 영육(靈肉)간에 깨끗하게 사는 삶, 절제하며 사는 삶, 그것이 청교도 신앙이자 삶입니다.

 

현대한국을 살다간 그런 청교도적 신앙어른의 실물이자 실례로, 저는 사회에 잘 알려진 두 분을 다시금 거명해보고 싶습니다. 대형교회 목자이셨던 한경직 목사님이나 복음병원의 장기려 박사님이 그분입니다. 저도 존경하고 있는 저 두 분은 얼마든지 ‘축복 타령’을 하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두 분 다 자기나 자기가족 중심의 사심이나 탐심을 전혀 부리지 아니하고, 생애 끝날까지 ‘온전한 복음’을 말씀하며,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을 온 몸으로 섬기며 살다가신 ‘아름다운 빈손’들이자 ‘사랑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죄나 허물이나 단점이 없는 사람이 누구 있겠습니까만, 저로썬 저 두 분 정도의 신앙과 삶을 본받는 목회자들이나 신앙후배들만 많이 나와도 세상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바르고(*하나님의 정의), 선한(*하나님의 사랑)’ 방향으로 바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럴 것이 오늘의 세상이 각박하고 황폐화되어가고 그래서 피차 비인간화되어가는 것은 권력이나 재물이나 학문이 부족해서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청교도적 삶과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가 부를수록 되레 ‘동물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 세태가 아닙니까?

 

‘황금의 나라’ 곧 ‘재물’을 먼저 구하는 인생은 돈이나 황금을 노다지로 얻고 차지해도 그래서 배부른 ‘부자’가 되어도, 결국엔 그 ‘부자’가 되레 자기나 자기자녀들을 서로 이기적으로 가두고, 싸우게 하고, 심판하게 하는 ‘지옥’으로 인도하기 십상입니다. ‘황금의 나라’는 비인간화된 ‘동물의 나라’와 통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타락한 그래서 ‘간사한 인간’의 정체성 내지 속성상 인간은 그 누구라도 ‘배가 부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는 하나님(God)과 재물(Money)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6:24)

 

물론 건실하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모으는 것’과 ‘섬기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섬기는 것은 신격화이고, 그것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돈의 노예’ 곧 ‘수전노(守錢奴)’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세상의 사람들은 다 부자 되기를 원하고,

부자를 선망하고, 부자 앞에서 작아지고 약해지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본받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도 아니고, 삶도 아니고, 가치관도 아니고, 가르침도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선 단호하게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태복음19:23)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씀은 물론 “전혀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여하간 ‘부자’가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의미가 뭡니까? 막말로, ‘동물의 나라’에서 다만 동물이나 짐승 차원의 삶을 살다가 죽는 허무한 인생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삶이 과연 가치 있는 삶일까요? ‘영원한 생명’이 있는 삶일까요? 분명한 것은 돈이나 재물에는 생명도 양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부자’가 생길 때 그것은 ‘500명의 가난한 양들’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것이 “머리는 냉정하게 그러나 가슴은 뜨겁게”라는 명언을 남긴 고전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스미스가 이렇게 갈파했으니까요.

 

-한 사람의 부자가 있기 위해서는

 오백 명의 가난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투기성 돈이 굴러서 돈을 버는 고도의 자본주의시대이자

글로벌시대인 현대에서는 그 폐해가 ‘오백 명’이 아닌 ‘수 천 수 만 명’에 이를 것입니다. 따라서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이라는 양극화(兩極化)는 결코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나 정의도 아닙니다. 인간의 탐심과 탐욕의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가 한세상 살다가 가는데 돈이나 재물은 물론 필요하지만, ‘부자의 재물’이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고 기도하는 자녀들에게, 당신의 섭리와 경륜을 통해 의식주를 포함한 ‘일용할 양식’ 차원의 ‘필요’를 ‘까마귀’를 시켜서라도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약속 및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자녀가 ‘부자’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필요’ 이상의 소유 그것은 이미 ‘다른 주인’이나 ‘이기적인 탐욕’에 빠져있거나 그것의 하수인으로 전락해있다는 반증이 되니까요. 아울러 참 주인이신 하나님과 오직 함께하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구현 내지 실현되도록 힘쓰며 살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자, 이웃과 함께하며 ‘우리’라는 공존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 되니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짧지만 그 안에 ‘우리(our, us)’라는 공존 내지 상생의 말씀이 무려 6번이나 나옵니다. ‘나’ 내지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고백하며 다시 그 의미를 묵상 및 숙고해봅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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