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력 실세들에게 은밀하게 돈을 뿌린
메모와 육성 녹취록을 남기고 자살한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온 나라가 충격과 소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이후 독학하며 ‘2조원대의 경남기업’을 일군 기업가이자 정치인이 자살하면서 남긴 리스트를 통해서 오늘의 권력과 돈의 야합 그 거래나 비리나 부패 사슬의 흑막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데서 오는 충격과 소란일 것입니다.
물론 권력과 돈의 야합은 어느 시대 어느 정당에게나 있었던 ‘공공연한 비밀’이자 세상의 생리이자 그 공생의 타락한 방정식이지만, 이 시대 정치지도자들의 후진적 생태와 비리가 재확인되었다는 두 얼굴의 아이러니에서, 상호 불신(不信)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는 그 자체에 오늘 우리가 정작 우려해야할 심각한 사회적 질병이자 불행의 요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고, “믿을 놈 하나 없구나”의 사회는 피차 불행한 시대이자 ‘막가는 사회’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여야(與野)나 진보나 보수 등의 정치적 내지 이념적 성향을 떠나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장로 성완종’이란 사람이 살다간 ‘허망한 길’에 관해 좀 상고해보고 싶습니다.
TV뉴스를 통해 시청할 수 있었던 고인의 빈소 영정 앞에는 십자가와 함께 ‘장로 성완종’이라고 기재된 팻말이 서있었습니다. 물론 앞서고 뒤서는 순서가 조금 다를 뿐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 것이고, 최종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몫입니다. 따라서 고인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매스컴을 통해 세상에 조명된 저 ‘장로 성완종’이란 분의 삶이 진정한 성공의 삶이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었을까? 저에게 절로 떨어지는 그런 자문(自問)은, 제가 스스로 구별 내지 분별해야 할 이 세대의 가치관이자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세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 특히 ‘기독교지도자들’이라는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이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럴 것이 자살한 성완종 전 회장이나, ‘성완종 리스트’라는 요지경에 노출된 다수의 정치권력 실세들이 또한 교회 ‘장로’의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 중에 유독 ‘교회 장로’가 많은 것은 신앙 자체보다는, 다만 그곳과 그 자리가 유리한 인맥과 유권자들의 표밭이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들은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무리들”에 불과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 시대 이 사회의 망령됨이 우리 모두가 먼저 회개해야 할 불행의 뿌리일 것입니다.
굴지의 건설회사 ‘경남기업 회장’이라는 기업가로 성공해서 번 그 돈으로 그 기업의 기득권을 지키고 아울러 정치적 야망을 키우기 위해, 각 정권 때마다 권력실세들에게 ‘줄줄이 뇌물을 뿌리며’ 성공과 출세에의 길을 구했던 ‘마당발 성완종’. 전 정권 시절에도 두 차례나 구금되었다가 다 ‘특별사면’ 되었다고 하니 과연 ‘뇌물의 힘’이 대단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는 그래서 또한 지역구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도 한 번했습니다. 그러나 ‘선거법 위반’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고, 당시 권력실세들에게 ‘구명로비’를 했지만 통하지 않아 결국 허무하게 의원직을 잃게 되었고, 이어서 평생 걸쳐서 일군 기업마저도 잃게 되는 위기에 처하자 역시 권력실세들에게 ‘구명로비’를 했지만 뇌물 먹을 때와는 달리 ‘의리 없는 자들’에 의해 거절당했고, 다시 ‘부정부패사범’으로 감옥에 들어가야 할 막다른 곤경에 몰리자 극도의 배신감과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리스트’를 남긴 채 자살한 ‘장로 성완종’. 그는 죽었지만, 그가 뿌린 ‘뇌물’ 혹은 ‘검은 돈’으로 목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혼란과 불신의 늪에 빠져 어지럽습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이나 ‘성완종 장학회’의 장학금을 받고 자란 다수의 청소년들이 저렇게 정경(政經)유착의 먹이사슬 아래 서로 먹고 먹히는 ‘존경하는 어른들’의, 드러난 어둠의 세계에서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무엇이 진정한 성공의 삶이고, 무엇이 허무하고 허망한 실패의 삶일까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잠언17:23)
(A wicked man accepts a bribe in secret
to pervert the course of justice.)
그렇습니다.
‘비밀리에 뇌물을’ 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다 ‘악인’입니다.
‘정의를 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부르짖는 ‘정의’도 애국애족도 다 ‘참 정의’가 아닙니다. ‘당신들의 세상’의 정의일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정의’는 아닙니다. 인간 그들 세계의 ‘정의’는 결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이용가치가 있으면 취하고 이용가치가 없으면 버리는 것이 ‘성완종 리스트’의 세상이자 가치관이자, 살아있는 권력을 누리는 그들 세계의 ‘정의’이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스로 ‘선지자’라고, ‘애국자’라고 자처하면서,
‘정의를 굽게 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대 왕들 중에서 폭정을 일삼았던 악한 왕의 대명사인 아합 왕 시대에도 위세를 부리던 ‘선지자들’이 ‘사백 인’(열왕기상22:6)이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에게 ‘주의 말씀’이라며, 이스라엘과 아람 간의 3차 전쟁인 길르앗 라못 전장에 “싸우러 올라가라”고 사주 및 예언합니다.
-(*아합 왕)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열왕기상22:6)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도,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정의이자 거짓 예언이었을 뿐입니다. 참 선지자 ‘미가야’ 한 사람은 되레 묵시적으로 그 전투에 나가면 왕이 죽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흉한 예언’을 합니다. 그러자 ‘선지자 사백 인’의 실세이자 대표인 시드기야가 나서서 미가야의 뺨을 후려치기기까지 합니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
미가야가 이르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날 보리라.-(열왕기상22:24-25)
아합 왕에겐 ‘흉한 예언’을 일삼는 자보다는
‘길한 예언’을 일삼는 자들이 ‘내 편’이자 충신이자 애국자들처럼 보이기 마련이겠지요. 아합 왕은 다수인, 시드기야가 주도하는 ‘선지자 사백 인’의 예언과 사주를 그대로 믿고 전투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결국 그 전투에서 적군의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죽음을 당합니다. 미가야가 참 ‘하나님의 선지자’였고 그의 예언이 참 예언이자 참 정의였던 것입니다.
물론 길르앗 라못은 경제적 군사적 요지입니다.
따라서 아람군을 무찌르고 그 성읍을 정복하면 큰 실속을 챙길 수 있습니다. 그런 현실적 욕심 내지 탐욕에 눈이 어두워진 아합 왕은, 당시 분단되어 있던 남북 왕국의 연합군 세력과 ‘선지자 사백 명’이라는 그 다수의 세력을 믿고, 인간 자기의 위세와 영광을 구하고자 전투에 나섰지만 결국 불귀의 객이 되고만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 겸손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나 숙명이 거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에베소서4:17-20)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그같이 배워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워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그렇게 가르쳐서도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의 저 말씀은 ‘사회가 되레 교회를 걱정하는’ 오늘의 시대를 사는 저나
수많은 ‘성완종 장로’들이나 그런 유형의 목사들에게 강조하는 말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분상승해서 부정부패나 적당주의 같은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그런
‘이방인적 세상’의 가치를 성공이나 출세라고 가르쳐서도, 배워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국의 왕도 정치권력도 기업인도 그 끝은 다 허무하고 허망한 죽음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범사는 ‘주 안에서’ 증언하고 행해야만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성완종 리스트’ 안의 세상이 ‘성완종’이나 이웃이나 국가를 살리는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세상이 정작 ‘성완종’이나 이웃이나 사회나 국가를 진정으로 살릴 수 있는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입니다. 이용가치가 전혀 없어 보이는 ’지극히 작은 자‘조차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소중한 인격으로 대접하며 ’올바르게 살리는‘ 삶이 그리스도의 구원이자 하나님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죽이는 상잔(相殘)의 비극을 이기고, 금세에서도 살리고 내세에서도 살리는 ‘하나님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 오직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권력이나 돈이나 재물이나 명예 등을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한 사람들’은 저 아합 왕 처럼,
저 ‘성완종 장로’처럼 되레 불행했습니다. 죄다 그 끝이 허무하고 허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태복음10:37-38)
부모님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아들딸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물론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사랑을 하되,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 ‘아버지나 어머니’가 부정부패와 타협이나 야합을 하면 ‘주 안에서’ 바른 말이나 고언(苦言)을 할 수 있고, ‘아들이나 딸’이 부정부패와 타협이나 야합을 하면 꾸짖으며 회초리로 때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니 딸이 추구하는 가치 내지 정의와 그리스도의 가치 내지 정의가 서로 충돌할 때, 그리스도의 가치 내지 정의를 선택할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세상법과 그리스도의 양심법이 서로 충돌할 때, 그리스도의 양심법을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긴 안목 내지 영원한 안목으로 보면 그것이 부모님이나 아들딸이나 이웃을 되레 바르고 복되게 살리는 ‘참 사랑’이자 ‘참 구원’의 길이고, 그것이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 등도 가치 있게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자 그 기준인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날 때, 그런 편협한 사랑이나 이기적인 욕심이나 집착은 결국 모든 사람들을 죄다 ‘더러운’ 죄와 불행과 파멸과 죽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인생의 참 뿌리’인,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미 신격화(神格化)된 ‘우상’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딸? 주색? 정치권력? 종교권력? 재물? 명예? 도박?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는’ 그것이 우리를 결국엔 불행과 비극과 혼돈의 수렁으로, 허무한 죽음과 심판의 수렁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그것입니다.
아무쪼록 기왕 터진 ‘성완종 리스트’인 바, 요지경 속의 이런 사건조차도 특정인 몇 사람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정치권력을 위시한 기업이나 사회 풍토나 종교 풍토의 뿌리가 보다 의롭고 깨끗하게 정화되어, 보다 성숙한 선진사회로 가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용비어천가’에도 이런 말이 있더군요.
-뿌리가 튼튼해야 열매가 많다.-
정녕 그렇습니다. 정의와 진리와 양심의 뿌리가 튼튼해야 추수할 수 있는
좋은 열매도 많고,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열매도 많습니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로비한?)
우상들에게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 바람에 날려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 (*살아계신 하나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이사야5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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