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사기(史記)〉에 의하면,
춘추시대 때 조나라 인물 조쇠(趙衰)는
문공왕 시절에 높은 벼슬을 했던 사람이고,
그 아들 조둔(趙遁)은 양공왕 시절에
높은 벼슬을 했던 사람입니다.
두 사람 다 대단한 당대 권력의 실세였지만,
그러나 저 두 사람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서로 다릅니다.
“그 아버지는 겨울날의 햇볕 같고,
그 아들은 여름날의 햇볕 같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는 ‘따뜻하고 온화한’ 성품이었지만, 그 아들은 ‘날카롭고 두려운’ 성품이었다는 것. 비약을 시키자면, 그 아버지는 ‘겨울날 햇볕 같이’ 온정(溫情)이나 선(善)을 심었고, 그 아들은 ‘여름날 햇볕 같이’ 비정(非情)이나 악(惡)을 심었다는 의미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와는 달리 조둔에게는 감정이나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물론 조둔이 높은 벼슬자리에 있을 때는 그에게 감히 대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참극은 그가 죽고난 후, 그의 아들 조삭(趙朔)을 위시한 가족들에게 떨어집니다.
조둔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도안고(屠眼賈)가 사구(司寇)에 오르자 그 사법관의 직책을 이용해서 조씨의 비리를 낱낱이 찾아내 죄목을 붙여, 조씨 일족을 죄다 죽여 버린 것입니다. ‘여름날의 햇볕 같은’ 권력으로 심고 거둔 허무한 종말이자 처참한 종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고 죽이는 복수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심은 그대로 거두는’ 역사이자 복수의 역사는 반복이 됩니다. 조삭의 아내는 평소에 배고픈 식객(食客)들에게 온정을 베풀며 선을 심을 줄 알았는데, 집안이 몰살당하던 당시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그녀는 그녀에게 은혜를 입은 식객(食客)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집니다.
그리고 훗날 그녀에게서 난 아들이 자라서 ‘여름날 햇볕 같이’ 유세를 부리며 비정과 악을 또한 일삼았던 ‘원수’ 도안고를 죽이고, 조씨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eternal life)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6:7-9)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두고,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둡니다. 자비나 사랑을 심으면 자비나 사랑을 거두고, 미움이나 증오를 심으면 미움이나 증오를 거둡니다. 복수를 심으면 복수를 거두고, 긍휼이나 용서를 심으면 긍휼이나 용서를 거두고, 교만을 심으면 교만을 거둡니다. 실인즉 우리는 남을 속이는 것보다,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남에게 속는 것보다 자기에게 속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스스로’ 곧 ‘자기(自己)를 부인해야’ 할 필연적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자기 세상이나 자기 육체를 위하여 자기 지혜나 자기 고집을 심는 자는 결국 ‘썩어질’ 허무한 삶이나 죽음을 거두고, ‘영원한’ 지혜이자 지식이자 생명 자체인 하나님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삶이나 영원한 생명을 거두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한계를 살다 갈뿐인 인간 자기 안에서가 아닌, ‘부활의 생명’인 그리스도 안에서 ‘포기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때나 응답은 분명히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나라와 민족과 사회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정당한 칼‘을 쓰는 자도 있어야 하고, 공권력을 행사하는 정치권력이나 검찰이나 경찰도 있어야 합니다. 경제를 살리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겨울날의 햇볕 같은’ 권력이나 재력(財力)과 ‘여름날의 햇볕 같은’ 권력이나 재력은 그 가치나 용도가 전혀 다릅니다.
치열한 경쟁 끝에 성취한 권력이나 성공의 자리가 자기나 가족을 죄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참극의 자리가 된다면, 그런 권력이나 성공의 자리에는 오르지 않는 것이 되레 ‘축복’일 것입니다. 선을 심지 못하고 되레 악이나 비리나 부정부패를 심는 자리라면 그런 자리에는 차라리 나아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일 것입니다. 그럴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든지 모르든지, 믿든지 안 믿든지의 여부를 떠나서,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진리이자 자연의 이치이니까요.
성경은, 여느 동물이나 짐승들처럼 한계를 살다 죽을 뿐인
그런 인간 유형의 삶이나 죽음을 ‘헛되고 헛된 삶’이자 ‘허무한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악과(善惡果)’라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따먹은 ‘불순종이란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 곧 성령의 관계가 단절되었기에 ‘에덴동산’ 내지 ‘참 행복’이라는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예’이자 그 아들 ‘카인의 후예’의 생명의 세계, 그것이 오늘 우리 인생들 모두의 타락한 성품의 한계이자 비본래적인 생명의 허무한 한계라는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숙명적 질병을 가진 인간이
짐승들과 다른 차원의 존재일 수 있는 것은, 허무한 그 생명의 한계를 깨닫고,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의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창세기1:27) 지음 받은 저 인류의 조상 아담이 불순종이란 죄악으로 인해 잃어버린 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곧 ‘영원한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의 회복이자 생명의 관계를 의미하니까요. 그것이 바로 영원한 구원의 비밀입니다.
그 ‘영생’의 비밀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복음의 요약이자 핵심적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永生)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3:16)
나아가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다.-(요한복음17:3)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 그 자체가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
하나님의 생명이자 그리스도의 생명 그 자체가 ‘영원한 생명’이자 ‘부활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우리의 삶이나 생명은 길어봐야 ‘백년’ 안팎입니다.
허무한 한계의 삶이자 생명입니다.
인간 우리의 성공은 길어봐야 ‘오십년’ 안팎입니다.
허무한 한계의 성공입니다.
그런 인간의 세상 삶이나 생명이나 성공이 자기나 자기 가족을 되레 훗날 ‘처참한 지옥’의 파멸이나 죽음으로 인도하는 그것이라면, 그런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는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다만 ‘배설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자기나 자기 가족은 물론이고 그 나라를 영원히 살리는 참 생명의 길이자 복된 길이자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을 고민해야할 필연적 이유 역시 거기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허무한 세상 내지 인간(육체)의 ‘말’이나 ‘떡’이나 그 가치 중심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가치 중심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요? ‘겉사람’ 중심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속사람’ 중심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그것입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eternal life)을 거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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