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가시, 그 '순수한 모순'의 영성(靈性)

이형선 2015. 5. 11. 08:44

 

 

크고 작은 모든 꽃들이

은혜로 하늘에서 받은 각자의 색깔로

만발하는 오월은,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각자의 색깔이 이웃으로 만나

더불어 살면,

하나님이 지으신 이 땅은 실로

아름다운 무지갯빛 자연이 됩니다.

 

어린이나 어버이나 스승 등

잘나고 못남과는 전혀 상관없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꽃’으로

만발하는 오월은.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각자의 꽃이 이웃으로 만나

공존 공생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은 실로

아름다운 무지갯빛 사회가 됩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이자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여전하게 강조하고 있는 자연은,

그래서 진실로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저들도 역시 오늘 살아 있습니다.

그것이 하늘을 향한 저들의 기도이자

찬양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들의 백합화’의 향기의 의미가 그렇고,

‘공중 나는 새’의 노래의 의미가

역시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꽃 중의 꽃’이자 ‘오월의 여왕’이라는

장미에게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습니다.

고통의 대명사일 수 있는 ‘가시’가 결코 사랑이나 아름다움의 표현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장미에게 ‘가시’를 허락하셨는가? 왜 ‘나’에게 ‘가시’를 허락하셨는가? 왜? 왜? 자연 내지 세상 속에는 우리네 인생 여정의 그것처럼 과연 모순으로 보이고, 때론 잔인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도 장미를 각별히 좋아했고, 장미 가꾸는 일 역시 즐겨했던 독일의 저명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사후 그의 묘비명이 되었던 그의 시〈묘비명〉에서,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라고 노래했습니다. 부연하자면, 장미의 가시 그것을 “순수한 모순”이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길게 보고 크게 생각하면, 오늘 ‘장미’를 괴롭히는 ‘가시’나 인간 우리를 괴롭히는 ‘가시’ 그 모든 것이 외려 우리를 ‘순수하게’ 살리는 은혜가 되고 선이 되고 순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영성에의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위적으로 잘 가꿔진 공원이나 정원, 하천 등이 ‘대단한 작품’이자 ‘성공한 작품’일 것 같아도 그것이 자연은 아닙니다. 자연의 순수함이 거기 있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순수한 생명 내지 순수한 영성이 거기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장미에게서 가시를 제거해버린 ‘인위적인 공사’가 장미를 ‘순수하게’ 살리고, ‘순수하게’ 사랑하는 길이 결코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가시의 영성(靈性)’ 내지 ‘고난의 영성’

그 ‘순수한 모순’에의 비밀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차원 높은 간증이자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내가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려 약한 것들과

 능욕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린도후서12:7-10)

 

사도 바울이 병명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고통스러운 육체의 질병 그 ‘가시’로부터 치유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구’한 끝에 들은 음성은, ‘가시’가 외려 “내 은혜, 내 은총”이라는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신체의 질병이나 약함을 건강하게 치유해주는 것이 은혜이자 은총 아닌가요? 그러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사역도 더 열심히 잘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왜 가시를 그대로 두신 것일까요? 우리의 상식과는  분명히 거리가 먼 응답이자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가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깨닫고 그 가시조차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되레 ‘가시’ 그 고통이나 그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깨진 질그릇’ 같은 ‘내 약함’이 외려 ‘내 그릇’을 ‘그리스도의 강함’으로 채우는 능력의 비밀이기에, 그 하나님의 은혜이자 비밀을 되레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심오한 영성의 비밀이자 ‘인생의 가시’에 대한 성숙한 차원의 이해 및 수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대형의 권력과 재물과 성공을 자랑하고,

‘엘리트 카르텔’의 인맥과 ‘당신들의 천국’을 자랑합니다. 남다른 자기의 머리와 주먹과 능력과 조직 등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약한 것을 자랑하면” 그대로 ‘바보’가 되고 ‘병신’이 되고 ‘등신’이 됩니다. 그래서 허세라도 부려야하는 세상 아니던가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보다 크고 보다 가치 있는 것은,

바벨탑 같은 세상의 가시적 대형의 성공이 아니고 내적 심령의 인격 곧 속사람의 인격입니다. 인간의 심령 깊숙이까지도 통찰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은 겸손한 내적 순수함이나 신실함이나 진실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순수하고 '가난한 심령'을 더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한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됩니다.

실인즉 모진 ‘능욕이나 박해나 곤고’나 순교조차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믿음의 길을 의연하게 간, 진정으로 강한 사람들이자 진정으로 이웃을 살린 ‘세상의 빛’ 내지 ‘세상의 소금’이 된 사람들은 되레 자기의 약한 것을 알고,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약한 것을 잘 알기에 늘 겸손하게 기도하면서, 오직 도우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살았던 ‘신앙위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의 약함을 잘 아는 ‘양’들이 오직 ‘선한 목자 ’를 의지하고 그래서 ‘선한 목자 ’의 보호와 능력 안에서  되레 평화롭게 살고, 가치 있게 삽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이자 영성의 비밀입니다.  ‘양’의 지혜나 능력보다는  ‘선한 목자’의 지혜와 능력이 늘 더 크고, 심오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자랑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시 그 ‘순수한 모순’조차도 사랑하고,

그 고통스러운 것이 외려 순수한 구원을 이루고 순수한 선을 이루고

순수한 성숙을 이룬다는 하나님의 비밀을 되레 ‘자랑할 수 있는’ 장미가 될 수 있기를!

저 '시인 중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시 그 ‘순수한 은혜’조차도 사랑하고,

그 ‘약한 것’이 외려 순수한 구원을 이루고 순수한 선을 이루고

순수한 겸손을 이룬다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되레 자랑할 수 있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저 '사도 중의 사도' 바울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영성 편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광을 얻을 때'의 자세   (0) 2015.05.25
작은 촛불의 연가   (0) 2015.05.18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0) 2015.05.04
'좋은 밭' 앞에서   (0) 2015.04.27
'성완종 리스트'의 세상을 살면서   (0) 2015.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