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영광을 얻을 때'의 자세

이형선 2015. 5. 25. 10:29

 

 

세상에서 사는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 및 영광의 때는 일국의 왕이나

대통령으로 등극하는 바로 그 때일 것입니다.

실인즉 일국의 대통령으로 선택을 받아 취임하는 자리는

온 국민들은 물론이고, 외국의 많은 축하사절들까지

참석한 가운데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영광의 때’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그렇게 지켜본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의 그런 ‘영광’의 생명이나

그 때 그 시간이 의외로 짧더라는 것입니다.

삼 년 정도만 지나면 레임덕에 걸려 무력해지는

권력의 노화현상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친인척 등이

각종 뇌물 등의 비리와 부패사슬에 연루되면서,

함께 침몰해버리는 ‘허무한 권력’의 역사적인

뒷모습들이 그것을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딱히 왕이나 대통령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개가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성공해서 크고 작은 권력이나 재물이나 행세하는 자리 등을 얻고 그것에 취하고 사로잡히면, 그 영광이나 영화나 재미에 눈이 가려져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베드로전서1:24)는 그 정체성이나 그 허무한 한계를 당시엔 깨닫지 못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이나 시간 앞에서 ‘5년 단임’이라는 최고 권력의 그것은 물론이고, ‘평균 수명 칠팔십 년’이라는 인생 자체조차도 그 생명이나 기한은 지극히 짧은 것일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크고 작은 ‘영광을 얻을 때’나 영광의 자리에 나아가는 사람들 내지 지도자들일수록, 더욱 겸손하게 기도하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런 자리를 자기에게 허락하신 뜻을 먼저 구하고 그것을 늘 명심하며 깨어있어야 할 ‘섬기는 자’로서의 자세가 절대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권력 주변의 사람들’도 어용적인 ‘용비어천가’만 부를 것이 아니라, 때론 역대 참 선지자들이 그런 것처럼 정치권력이나 종교권력 등을 향해 감히 “아니오”라고 직언 내지 고언할 수도 있어야만 되레 그 왕국이나 사회나 민족의 생명을 바르게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얻을 때’의 자세를 살펴봅시다.

초자연적인 이적을 통해, 각색 병자들을 고치고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에게 배부르도록 먹을 것을 주고, 심지어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까지 풍기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

그런 ‘메시야’가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실 때, 소문을 통해 수많은 ‘표적 행하심을 들었던’ 이스라엘의 ‘큰 무리’는 승리 및 영광을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열렬하게 환호하며 환영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한복음12:13)

 

대통령 취임식이나 왕으로서의 등극의 자리 같은 형국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낸 것처럼 그렇게 멸망당한 지 오백 여년이나 된 이스라엘 왕국을 로마의 치하에서 살려낼 것이라고 기대했던 백성들의 뜨거운 환호입니다. 가난한 백성들을 위한 ‘빵’ 문제 곧 경제 문제를 살려낼 것이라고 기대했던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입니다.

정치적인 메시야, 정치적인 왕으로 추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존의 인기나 영광이나 영예는 백성들 곧 서민들 사이에서 그토록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런 ‘등극의 자리’에 나아갈 때 자기 영광을 시위하며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말’을 타고 가지 않습니다. 당시 귀족들이 타던 ‘노새’를 타고 가지도 않습니다. 차라리 초라한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십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a young donkey)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요한복음12:14-15)

 

그렇습니다.

‘영광을 얻을 때’일수록,

영광의 자리에 나아갈 때일수록,

‘말’이나 ‘노새’를 타고 나가서는 안 됩니다.

‘겸손의 대명사’이자 ‘섬김의 대명사’인 ‘나귀’보다 더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지혜이자 참 복이 있는 영성의 비밀입니다.

진정한 영광의 자리이자 공인(公人)의 자리는 사람들 앞에 나아가는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곧 대중이라는 세상의 인기나 득표나 수치 등에 의해 눈이 가려지고, 그래서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친히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나는 지배하고 군림하기 위해 온 세상의 정치적 왕이 아니다. 되레 너희를 섬기고, 너희의 죄악을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 제단에서 희생양이 되어 너희 대신 죽으러 온 평화의 왕이자 하나님나라의 왕이다.’ 그런 ‘행위 계시’ 그 자체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 혹은 외국의 사절단(?)을 대표하는 ‘예수를 뵈옵고자 하는’ 구도자들인 ‘헬라인 몇 사람’도 있었습니다. 헬레니즘의 인본주의(人本主義) 지혜가 그 한계를 깨닫고, 참 진리를 찾고자 헤브라이즘의 신본주의(神本主義)를 찾아온 것입니다.

제자 안드레와 빌립을 통해 저 헬라인들의 면담 요청을 받은 자리에서 주님께선 전혀 엉뚱한(?) 대답으로 참 영광 및 참 진리에의 해법을 이렇게 갈파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한복음12:23-25)

 

과연 그렇습니다.

‘자기 생명’이나 자기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나 그 영광을 하나님과 그 진리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되레 그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세상의 그것들은 물론이고 ‘자기 생명’조차 ‘미워하는 자’는 되레 ‘영생하도록 보전’이 됩니다.

이기적인 ‘자기 생명을 미워하며’ 곧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그렇게 섬기고 그렇게 죽을 때, 되레 ‘많은 열매’를 맺고 그 영광 그 생명 역시 ‘영생하도록 보전’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창조주 하나님의 영성의 비밀이자 자연의 비밀이자 참 축복의 비밀입니다.

 

한 마디로 진정한 영광이나 생명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 오직 거기서 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는 희생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되레 영원히 사는 진정한 영광이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미래적 그 삶 그 각오가 현재적 ‘영광을 얻은’ 지금 이 자리에서 되레 공공연하게 선언 및 선포된 것입니다. 역설의 진리입니다. 나름대로 ‘성공한’ 모든 인생이 지향해야 할 ‘푯대’입니다.

 

저 ‘영광을 얻을 때’의 ‘때’ 곧 헬라어 ‘호라’는 ‘아름다운, 시기적절한(*호라이오스)’ 그런 ‘때’를 의미합니다. 천하 범사에는 때가 있습니다. 선이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기회도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같은 선이나 사랑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멸시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인’이 주님께서 친히 크게 인정 및 평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여행길에서 목격한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채 버려진 사람’의 고난 및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의 ‘이웃’이 되어, 그를 보살피고 섬기며 그를 치유 및 구원의 길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아름다운, 시기적절한’ 때를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이웃’이나 남이 지극히 어렵고 괴로울 때 도와주는 그런 ‘아름다운, 시기적절한’ 선이나 사랑의 손길이 과연 하나님의 기억에도, 사람의 기억에도 오래 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인정 및 평가해주시는, ‘하늘의 (참)복이 있는’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나름대로 성공해서 ‘영광’을 얻은 사람들은 그것이 보다 어렵고 보다 많은 이웃들에게 ‘아름답고, 시기적절한’ 봉사를 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성공이자 자리이자 때이자 기회라는 것을 알고,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향한’ 섬김과 헌신의 삶에 임하고자 하는 자세를 감히 선언 및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공적 약속이자 언약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되레 하나님 앞에서도 ‘참 복이 있는 인생’이 되어 자기가 ‘영원히 사는’ 영성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실인즉 한 알의 ‘밀’도 그렇지만, 한 알의 ‘영광’도 한 알의 ‘복’도 죽지 않으면 다만 ‘한 알’인 그것으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한 알’인 자기 영광이나 복이 낮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자기를 포함해서 되레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우리의 영광’이 되고 ‘우리의 복’이 됩니다. ‘말씀’을 ‘삶’으로 실현하신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의 생애가 다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은 지배하는 권좌로 가는 길이 아니고, 하나님과 이웃을 죽기까지 섬기며 십자가 저 대속의 자리로 가는 희생에의 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권력이나 재물, 지식, 명예 등 세상의 모든 성공이나 그 영광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결국 열매 없는 허무한 것으로 그 생명이 죄다 끝나버리고 맙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성실하게 일하며 돈 벌어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바르게 성공해서 자기 가족만이 아니라 작은 이웃이나 사회까지 살리는 사람은 진실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이자 영광입니다.

실인즉 짐승들도 자기나 자기가족끼리 “잘 먹고 잘 살자”는, ‘이기적인 사랑’ 정도는 다 할 줄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이나 축복이나 영광은 그런 동물적 내지 이기적인 차원이나 한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궁극의 차원이자 지향의 푯대가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기까지 순종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영광을 얻을 때’,

그런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은, 진실로 하늘의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또한 그리스도처럼 그 영광도 그 생명도 ‘영생하도록 보전되는’ 하늘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종교는 물론이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사회 각 분야에 그런 ‘하늘의 복이 있는’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길 기원하는 마음입니다.

그럴 것이 ‘자기의 영광’이 아닌,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늘 먼저 구하며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에게,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역시 참 ‘영광’을 주제로 해서 이렇게 화답을 하셨고 그것을 역사적으로도 분명하게 성취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너를 부활시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한복음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