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진정한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이형선 2015. 6. 8. 10:49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집 안방에는 늘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 집에서 유일한 액자이자,

흰 베 바탕에 검은 실로 ‘希望(희망)’이라고

수놓은 한문 두 글자가 담긴 액자였습니다.

흑백의 액자인지라 그렇게 밝은 분위기를

띠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우리 가족이 희구하던 그 ‘희망’은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그러나

“내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에 힘입어,

누군가의 신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 신앙 도정에 관한 대략을 좀 서술해보겠습니다.

 

딱히 종교를 분류하자면

평범한 불교도일 수 있었던 제 부모님은,

제가 중학교 일학년 때 불의의 사고로 함께 일시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하늘이 무너지면서’ 우리 가족의 ‘희망’이나 나의 ‘희망’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나의 부모님이 나의 ‘진정한 희망’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부모님이 없는 저로서 저 스스로 ‘희망’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그 후 저는 제 어머니가 생전에 저에게 자주 하시던 말씀을 ‘희망’으로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유아시절의 저에게 대학생 신분으로 ㄱ ㄴ 등 한글을 가르쳐주었던, “네 외삼촌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너도 꼭 법관이 되어라”라는 사실상 유언이자 희망이었습니다. 자기 자식에 대한 일방적인 기대나 집념이 없는 어머니가 누구 있겠습니까만, 어떻든 어머니는 저에게 ‘법관’이라는 꿈과 희망을 가지도록 당부하곤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저의 희망도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저의 경우, 운명타(?)는 그 후에 보행 장애인의 몸이 되어버린 그것이었으니까요. 부모님도, 집도, 일신상의 건강도, 꿈도 희망도, ‘허무하게 너무나도 허무하게’ 한순간에 저에게서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전생의 죄가 많은’ 죄인인 저의 ‘운명’이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이해나 배려의 폭이 한결 좋아졌지만, 어떻든 ‘험한 세상’에서 몸이 불편한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고난이나 고통이나 설움의 삶을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물론 고행주의자도 수도자도 아니고 그럴 분수도 못됩니다만, 한편으론 장애인의 삶 자체가 절로 고행이 되고 수행이 되더라고 고백할 수는 있습니다. 장애의 몸으로 ‘아골 골짜기’ 내지 ‘사망의 골짜기’에 처한 제 환경이나 여건이 저를 진리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구도자(seeker)가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더라는 것입니다.

 

그 후 이런 저런 책을 즐겨 탐독하던 저는 ‘문학’에 눈을 뜨면서 그것에 희망을 걸고, 진정한 신앙인이기보다는 한 사람의 문학청년으로서 구도에 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때론 불가의 고승들처럼, 때론 구약성경에 나오는 ‘고난의 대부’인 ‘욥’처럼, 때론 사르트르나 까뮈 같은 실존주의 작가들처럼 인생의 참 진리를 찾고자 나름대로 노력했고, 허무하고 부조리한 인생에 관한 내 회의나 질문에 대한 응답은 없고 거친 비바람과 번개만 치는 하늘을 향해 차라리 나에게 벼락을 때려 달라고 기원 아닌 기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혼돈과 방황의 세월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진정한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진정한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그 해답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월 속에서 제가 얻은 해답은 차라리 불행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하는 헬레니즘의 철학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실존주의나 낭만주의 같은 문학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전생의 죄’라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 내지 운명적 멍에에 매여 살아야만 하는 불교 등의 종교들에서 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거기서 구원 내지 희망에의 해답을 찾아보고자 했던 저는 결국 절망에의 해답을 얻어야만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살이 저희 것이요)”, 그런 해답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소위 ‘음독자살’이란 걸 해봤지만 의외로 살아났고, 그 후 두어 차례 더 시도하고자 했지만 이상하게도(?) 번번이 좌절이 되곤 했습니다. 저는 자살하고 싶다고 해서 다 죽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대지진 같은 큰 재난 속에서도 극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있듯이,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말씀이 ‘진리’임을 생사의 갈림길에서 체험적으로 절감했던 것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태복음10:29-31)

 

생명의 주인 내지 주관자, 운명의 주인 내지 주관자는 ‘참새’ 자신도, 인간 자신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허락하시는’ 곧 섭리하시고 간섭하시는 분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고난이나 고통에 무관심한 신(神)이 결코 아니고, 인간 우리의 고난이나 고통은 물론이고,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머리털까지 다 세시고’ 계신 분이고, 그렇게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희망’ 내지 ‘진정한 구원’의 해답이나 해법은 거기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문학청년이던 저는 그 후 ‘방향을 돌려(悔改)’,

서른 살의 나이에 신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목사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누구 말마따나 ‘돈이 되는 공부’도 아니었지만, 그냥 좋아서 그 후 수년 동안 ‘걸신들린 듯(?)’ 성경과 신학만을 들이팠습니다.

그렇게 나의 ‘신(神) 찾기’ 공부는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신은 살아계시는가?

정녕 ‘살아계신 하나님’인가?

아니면 이미 ‘죽은 하나님’인가?

이미 ‘죽은 하나님’의 세상이라면, 장애인의 몸으로 애써 아등바등 살기보다는 미련 없이 죽자는 각오로 임했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 좋든 나쁘든 당시엔 정말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로선 신의 존재 여부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데” 치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훗날 알았지만, 구약성경 잠언에도 이런 말씀이 있더라고요.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

 (You will find the knowledge of God.)-(잠언2:4-5)

 

그러니까 ‘은’이나 ‘보배’

곧 돈이나 재물을 구하기보다

그 열심과 그 열정으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은 맥락의 의미가 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아버지 하나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삶에 필요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태복음6:33-34)

 

내 인생의 발등에 불이 떨어져 오늘과 내일이 온통 ‘염려’와 ‘괴로움’으로 타고 있던 저에게 “구하고 찾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저 말씀이자 저 약속은 ‘신(神) 찾기’에 나선 저에게 확실한 응답이자 은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아가 진정한 구원의 해법이자 진정한 희망에의 해답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한 마디로, ‘십자가 현장’ 그곳에 있었습니다. 정녕 그것이었습니다. 젊은 날 제가 긴 세월 앓았던 신음이자 차라리 자살을 택하고 싶었던 그 주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그 현장에서 내 대신 이렇게 하늘을 향해 부르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27:46)

 

고금을 막론하고 극한 상황에 처한 모든 인간이 처절하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저 절규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절규이지만 또한 진실로 나의 절규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나와의 동질성과 일체화가 비로소 진심으로 느껴지고 또한 절로 믿어졌습니다. ‘믿어지는 믿음’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제 인생의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저 절규는 곧 나를 위한 대속(代贖)의 절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 되고, 또한 운명과 팔자 등의 세상과 죽음을 이기고 사는, 죽어도 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희망’과 ‘진정한 구원’이 바로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일체화에 대한 그런 공감과 믿음은 분명히 ‘하늘의 복’에 속합니다. 그것은 오직 ‘바람처럼 임하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聖靈)의 역사와 감동 및 도우심에서 비롯되는 전적 은혜이자 긍휼이자 응답이라고 성경은 곳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바람(*프뉴마)’ 곧 ‘성령’의 정체성과 실재(實在)는 한참 뒤에 주어진 삼각산(三角山)에서의 희한하고 기묘한 영적 체험을 통해 저도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만, 아무튼 저는 그렇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자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한편,

이 시대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희망의 신학’의 대부인 독일 위르겐 몰트만 박사.

그가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장신대 특강’에서

그의 ‘희망의 신학’에 관한 체험적 신앙고백을 했는데,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제 신앙고백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 싶어 큰 공감을 역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구도자로서의

동질성과 동일화를 그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체험의 세계나 차원이야 다르지만, 저의 체험적인 고백과 그 진정한 구원과 희망에의 해답의 동질성은 같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동질성은 응분의 고통과 신음을 체험한 모든 사람들에게 역시 같은 고백이 될 것입니다.

나치 치하에서 순교한 신학자 본회퍼와 역시 나치 치하에서 고통을 당했던 몰트만이 발견한 진정한 희망과 구원의 길에 대한 해답, 곧 “오직 고난당하신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는 그 체험적이자 역설적(逆說的)인 신앙과 그 고백의 아팩스(絶頂)가 역시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몰트만 박사는 먼저 이런 내용의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했을 때 신학자 칼 라너는 ‘하나님께서 고난당하실 수 없다’고 변호했습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정말로 곤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서 떠나셨다고 느꼈을 때, 나를 도와주신 분은 나와 함께 고난당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는 그의 피와 눈물이 엉겨 있습니다. 이른바 성공하는 꿈이나 비전을 위한 적극적 사고나 긍정적 사고, 어떤 이즘(主義)적 개념이나 학문 유형의 차원이나 지평에 머물지 않고, ‘진정한 희망’은 오직 ‘성자(聖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당하시고 치르신 ‘십자가 고난’ 속에서만이 발견될 수 있다는 체험적인 고백이자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몰트만은 이런 요지의 고백을 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죽어가시면서 하나님께 드렸던 탄원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씀이 제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 그리고 도무지 구원이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되레 견딜 수 있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내가 1945년 세계2차대전 이후, (나치 치하의) 포로수용소에서 ‘하나님의 떠남’을 겪었을 때, 예수께서 나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신 것은 바로 저 탄원을 통해서였습니다. 그의 ‘함께 고난당하심’이 나로 하여금 희망을 가지고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철학이나 여타 종교의 일반적 신론(新論) 내지 신성(神性) 이해와는

다른, 그래서 구별된, 매우 중요한 이런 내용의 증언을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그 본성상 그 어떤 고난도 당하지 않으신다는 이해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무감각적이고, 기쁨도 고난도 사랑도 분노도 알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절대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열정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또한 아버지 하나님의 수난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니까 ‘진정한 희망’은 인본주의적인 헬레니즘의 이성적 내지 철학적 신(神) 이해나 인간의 고난과 고통과는 동떨어진 ‘하늘’에 계시면서 “인간 네 팔자나 운명대로 살라”는 식으로 오불관언하며 무관심한 그런 유형의 신 이해를 하는 종교들에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인간의 고난과 고통의 현장 곧 ‘십자가 현장’에서 인격적으로 함께 울고 함께 신음하시고 함께 울부짖는, 신본주의인 헤브라이즘의 ‘살아계신 하나님’에 의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막말로 인간에게 ‘진정한 희망’이 필요한 때는,

‘진정한 신(神)’의 도움이 필요한 때는,

건강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잘 나갈 때가 아닙니다.

되레 어려울 때, 고통 속에서 신음할 때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醫員)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하긴 이 말씀의 보다 중요한 뉘앙스는 ‘스스로 건강한 자라고 생각하는 병든 자’와 ‘스스로 병든 자라고 생각하는 건강한 자’라는 두 유형의 인간이 있다는 거기 있겠지요. 파스칼의 명언을 빌리자면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있다”는 의미와 같은 맥락에서 말입니다.

 

인간 우리의 영적 정체성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들’이자 ‘병든 자들’입니다.

희망과 구원이 필요하고, 구주 내지 의원이 절대 필요한 피조물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도 우리 모두도 각자가 겪는 다양한 인생 체험이나 경험을 통해서, 저 몰트만이나 저 본회퍼처럼 ‘진정한 희망’과 ‘진정한 구원’에 관한 해답을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는, ‘가치 있는 마침표 인생’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직 고난당하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는 인생은, 오늘 죽어도 “가치 있다”고 저 역시 확신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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