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온통 ‘메르스’로 인해 비상에 걸렸습니다.
‘중동호흡기증후군’이라는 메르스는 ‘고열, 흉통과 함께 기침, 호흡곤란, 폐렴 등의 심한 호흡기증상을 일으키고, 치사율이 30%로 높다’고 공시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종 바이러스 질환의 전염병인지라 마땅한 예방약도 치료약도 없어, 당국이나 의료진들도 난감한 것 같습니다.
수많은 학교들이 이미 휴교 중이고, 시골의 경우 한 사람의 확진자가 나타나면 온 마을이 ‘전면출입통제’를 당하고 있는 실정이니까 국가적인 비상시국임에 틀림없습니다.
현대의학의 첨단 의료진과 기기의 우수성을 내외에 자랑하던 대형 종합병원들조차도 일개(?) ‘메르스’한테 속수무책 당한 채 연일 곤욕을 치르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스스로 대단하다는 인간이나 현대의학 내지 과학의 차라리 우스갯거리 같은 한계를 다시금 절감 및 확인하게 됩니다.
뉴스 화면에 나오는, 메르스 의심 환자를 진료 및 치료하는 의료진의 모습은 우주인처럼 온몸을 가운과 장갑과 안경과 마스크로 무장하고 있더군요. 거리의 일반 행인들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흔하게 눈에 띕니다.
하나님이 ‘메르스’라는 전염병 사건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면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묵상해보던 저는 저 ‘마스크’에서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세월호 참사’ 사건으로 설왕설래하며 나라가 온통 비상에 걸려 어지러웠고, 이어서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나라가 온통 어지럽더니, 이제는 '메르스‘ 전염병으로 나라가 온통 비상에 걸려 어지럽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국민들 모두가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며, 서로 불신하고 경원하며, 관계를 단절시키는 ’마스크‘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마스크’는 이웃과의 관계를 조심하는 ‘보호막’일 수도 있지만, 타의적으로 착용해야하는 그것은 이웃에게 입조심 말조심 하라고 물려지는 ‘재갈’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남들에게 일방적으로 네 침이나 거품을 튀기지 말고 겸손하게 입조심 말조심 혀조심 하라고, 입보다는 ‘듣는 귀’를 더 살리라고, ‘메르스’라는 ‘사건’을 허락해서 우리의 입에 ‘마스크’를 씌우신 것은 아닐까요? ‘재갈’을 물리신 것은 아닐까요?
그럴 것이 죄다 스스로 유식해진 오늘의 시대는, 위정자들은 물론이고 SNS 누리꾼들이나 일부 목사들까지 포함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너무 제멋대로 ‘혀’를 놀리는 사회가 되었다 싶으니까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bit)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
혀(tongue)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야고보서3:)
정녕 그렇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입니다.
타고난 성정이 이미 타락한 상태에 있는 죄인인 인간 우리는, 그래서 이웃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인도하여 살리는 좋은 말, 고운 말, 선한 말보다는 대개가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기하고 비난하는 등 부정적인 말을 더 많이 합니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속설처럼, 자기주장이나 세력의 확장을 위해서는 침이나 거품을 튀기는 것까지도 불사하며 열변을 토합니다. 그래야만 더 강한 자가 되고, 더 유식한 자가 되는 세상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행태는 실인즉 자기의 “온 몸을 더럽히고, 자기 삶의 두 축인 수레바퀴를 불사르는”,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침 뱉으면 결국 자기 얼굴에 떨어지듯, 이웃이나 사회에 침을 뱉어도 결국 자기 얼굴에 떨어지기 때문이겠지요.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타고난 성정이 타락한 우리의 악한 말이나 혀나 입이 “지옥 불에서 난다”는 그 ‘뿌리’에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마스크’를 쓰고 있는, 매사에 부정적인 우리의 혀 내지 입이 실인즉 ‘메르스’보다 우리를 되레 더 무섭고 불행한 삶과 죽음으로 인도하는 ‘뿌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의 혀나 입을 늘 ‘부인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힘써야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인위적 내지 정치적 좌우 이념이나 특정 사조나 군중심리에 사로잡히거나 거기 부화뇌동해서 편을 짓고 당을 만들어, 상대방을 함부로 적대하며 비난하고 매도하는 말이나 막말이나 행동을 늘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히브리어의 알파벳을 가르칠 때에는,
그 하나하나의 알파벳에 의미를 지니게 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진실’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끝 글자의 꼭 중간의
글자를 사용하곤 한다. 그것은 유태인들에게 있어서
‘진실’이란 것은 왼쪽 것도 옳고, 오른쪽 것도 옳고,
한 중간의 것도 역시 옳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혜나 지식, 진리, 교훈 등 그 모든 ‘진실’은 전후(前後) 좌우(左右) 진영이나 그 중간지대 어디에나 나름대로 다 있지만, 그러나 그 ‘진실’을 탐구하고 규명할 포지션은 오직 ‘꼭 중간의 글자’이자 ‘꼭 중간의 자리’여야만 한다는 의미일 수 있을 것입니다. 전후 좌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위치이자 공정(公正)의 위치가 곧 ‘꼭 중간의 자리’이니까요.
실인즉 진실이나 진리는 ‘꼭 중간의 글자’에 있습니다.
나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너에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당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야당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좌익이나 진보진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우익이나 보수진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상류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하류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름대로의 진리나 진실은 새의 좌우 양쪽 날개에 각각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정한 중심은 머리와 심장이 있는 ‘꼭 중간의 자리’에 있습니다. 따라서 새를 살리기 위해서는 아니 우리의 사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전후나 좌우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여호수아1;7)
하나님이 민족의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친히 주신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꼭 중심의 글자’이자 ‘꼭 중심의 자리’는 바로 ‘하나님 말씀의 자리’입니다. 심령의 중심에 오직 하나님과 그 말씀을 모시고, 인위적 내지 정치적인 우로나 좌로 치우치지 않는 삶. 그것이 우리 개개인이나 우리 사회가 ‘형통’할 수 있는 절대 비밀이자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형통’의 반대가 뭡니까. ‘불통’이자 ‘불화’ 아닙니까.
걸핏하면 사적 감정이나 정치적 이념이나 군중심리 등에 치우쳐 함부로 ‘혀’를 놀리는 우리 모두가 고민하며, 겸손하게 회개하고 기도해야할 필연적인 이유가 정녕 거기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메르스’보다 더 악질인 ‘돌림병’이나 ‘전쟁’이나 ‘세균전쟁’까지도 허락하셔서 동족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처참한 살육의 비극을 자행하게 하시고, 우리의 입에 지금보다 더 큰 고통의 ‘마스크’나 ‘재갈’을 물리실 수도 있을 터이니까요.
-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plague)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니라.
네가 여전히 내 백성 앞에 교만하여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출애굽기9:15-17)
선지자 모세를 통해 위정자인
애굽 왕 바로에게 선포된 저 하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돌림병’이나 ‘메르스’ 자체가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첨단 의학이나 과학을 자랑하는 현대에도 여전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제가 ‘메르스 환자’가 되어 설령 내일 죽는다 해도 그것은 ‘메르스’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죽음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죽는 것일 뿐입니다. 크고 작은 모든 사건의 내면의 핵심은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다는 것. 인간 우리의 생사화복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이나 경외(敬畏)나 순종의 사상도 다 거기서부터 비롯됩니다.
따라서 자기나 자녀 등의 가족이 억울한 피해를 입었거나 안타까운 죽음을 당했다 해도, 당시엔 물론 괴롭겠지만 그러나 한사코 남들이나 위정자들이나 사회만을 원망하며 비난해서는 안 될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그렇게 정치적이고 적대적인 혀나 말이 지속되면 그것이 ‘심령의 부메랑’이 되어 결국엔 세상에서 살아야할 자기나 남은 가족들의 온 몸과 온 삶조차도 부정적으로 불태워버리는 ‘불행의 악순환’으로 비화되기 십상이니까요.
불행을 이기는 참 행복은 되레 “원수 갚는 것조차도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앙적이고 포용적인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저 말씀이 바로 영적(靈的) 세계인 ‘하늘나라의 비밀’을 가장 잘 아는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 말씀이 또한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당해 ‘하늘나라’로 가있는 모든 고인들의 영혼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진정으로 원하고 부탁하는 ‘말씀의 비밀’이자 ‘영성(靈性)의 비밀’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응분의 사회정의는 보다 바르고 성숙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규명되고 실현되어야 할 고급가치이지만, 그러나 “내 원한을 풀어달라”는 식의 고인의 요청은 진정한 고인의 요청이 아니고, 고인의 탈을 쓰고 남은 가족들마저 불행으로 인도하려는 ‘귀신’ 내지 ‘악령(惡靈)들’의 미혹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먼저 ‘마스크’라는 가면을 벗고,
서로 먼저 포용과 진실의 말을 건네며,
함께 활짝 웃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과 우리 속에,
어서 속히 이루어질 수 있게 되기를!
'영성 편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비 내리는 소리 (0) | 2015.06.29 |
---|---|
'정의'냐? '사랑'이냐? (0) | 2015.06.22 |
'진정한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0) | 2015.06.08 |
'물로 된 포도주'를 위하여 (0) | 2015.06.01 |
'영광을 얻을 때'의 자세 (0) | 2015.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