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0년 남미에서 있었던
역사적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영화〈미션(The Mission)〉.
남미 거대한 폭포수 위에서 사는 호전적인 과라니족은 외부인들에게 적대적입니다. 그러나 예수회수도원 소속의 두 신부 곧 ‘작은 예수’일 수 있는 가브리엘 신부와 용병 출신으로 원주민들을 사로잡아 노예로 팔던 악덕 노예상인이었지만 가브리엘 신부에게 감화를 받아 회개하고 이후 그의 권고에 따라 예수회 신부가 된 로드리고 신부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서, 과라니족은 마침내 개화된 복음의 마을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회수도원 사역을 후원하던 스페인이 포르투갈과 식민지영토를 교환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그 이권다툼에 낀 교황청도 추기경을 파견해서 예수회 신부들에게 원주민 과라니족의 지역에서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원주민인 과라니족 역시 그곳을 떠나든지 그곳에서 노예로 살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예수회 신부들은 목자의 양심에 따라 그런 철수 명령을 거부하고, 과라니족과 생사를 함께 하며 끝까지 원주민 마을을 지키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 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군대의 공격은 시작되고, 두 신부와 과라니족은 그들의 무력과 화력에 의해 다 학살을 당하고 원주민 마을은 폐허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되레 시작일 수 있습니다. 목자인 가브리엘 신부는 그렇게 순교했지만 그 신부의 헌신적인 삶과 ‘그리스도의 사랑’은 살아 남아서, 오늘도 후세의 역사와 심령들에게 생생한 교훈과 감동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저 두 신부는 물론 다 헌신적이었지만 그러나 저들이 믿고 추구한 ‘힘’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가브리엘 신부는 진정한 힘은 ‘사랑’이라고 믿고 끝까지 기도하며 무저항으로 임했고, 로드리고 신부는 현실적 ‘정의’를 위해서는 피를 흘리는 투쟁도 필요하다며 칼과 총을 다시 잡은 것입니다.
따라서 저 두 신부는 각각 다른 형태의 순교를 하게 되는데, 여하간 그렇게 ‘정의’를 위해 ‘무력’에 대응해서 ‘무력’으로 싸우고자 나서는 로드리고 신부가 가브리엘 신부에게 ‘축복의(to bless me)’ 기도를 부탁하자, 그때 가브리엘 신부는 이렇게 거절합니다.
“아니오. 그대가 옳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하실 것이오.
그대가 틀렸다면, 내가 축복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고….
무력이 옳다면, 사랑이 설 자리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If might is true, then love has no place in the world.)
정녕 그렇다면, 정녕 그렇다면, 난 그 같은 세상에서 살아갈 힘(strength)이 없습니다.
로드리고, 나는 당신을 축복해 줄 수는 없어요.”
예나 지금이나, 저도 늘 마음에 새겨두고 싶은
‘명화’ 속의 ‘명대사’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력이 옳다면, 사랑이 설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무력이 정의라면, 사랑이 설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웃을 살리지 못하고 되레 죽이는 무력이나 법적 지식이나
권력이나 재력이 ‘정의’라면,
사랑이 설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을
두 가지로 대별하자면,
‘공의(公義)’와 ‘사랑’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율법으로 대변되는 ‘공의’ 내지 ‘정의’.
그러니까 죄를 범한 그대로 응분의 벌을
집행하는 ‘공의’, 그것이 있어야만 사회정의와
질서가 유지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도
같은 맥락의 말씀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은
죄를 범한 대로 응분의 매를 때리는 인과응보적
내지 부성애(父性愛)적 ‘공의’의 성품에서만 머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지은 자식을 긍휼히 여기고
대신 헌신하고 대신 희생하는 모성애(母性愛)적
‘사랑’의 성품이 또한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법에 의하면 인간이 죄를 지면, 거룩 자체이자 정의 자체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하나님이 돌아앉으신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연유를, 인간이 저지른 ‘죄악(罪惡)’ 그 자체가 벽이 되어 절로 가로막아버리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는 죄악에 대한 응분의 대속(代贖)이 필요했습니다. 죄악을 저지른 인간을 죄다 처벌하거나 죽일 수는 없으니까, 양이나 소 등의 ‘대신 죽음’ 곧 희생을 통해 인간의 죄를 대속했던 것입니다. 그런 대속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고, 그래서 죄인인 인간과 하나님의 영적 관계 및 소통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죄인’이나 ‘죄악’이라는 종교적 언어에 거부반응을 느끼는 경우, “나는 율법이나 실정법에 근거한 형사적 어떤 죄악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항변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깨인 양심으로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을 살필 수 있는 내적 심령의 깊이를 갖게 되면 절로 이런 탄식을 토로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What a wretched man I am!)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7:)
그렇습니다. 실인즉 인간 우리 속엔 이타적인 선보다는
이기적 내지 정욕적인 악의 소욕이 더 강합니다. 긍정이나 칭찬이나 감사보다는 부정이나 시기나 불평의 근성이 더 먼저 나오고 더 강합니다. 과연 인간 우리는 모두 타락한 조상에게서 비롯된 ‘원죄’와 후천적인 ‘자범죄’를 함께 짊어지고 있는, 이미 타락한 상태에 있는 죄인들인 것입니다.
‘곤고한 죄인’ 곧 ‘비참한, 가련한 죄인’이면 응당 죽어야 합니다. ‘사망의 몸’이면 응당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자 공의이자 정의입니다. 내가 죽지 못하면, 내가 죽지 않으려면, ‘희생양’이라도 대신 죽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렇게 진실로 양심이 깨인 사람은 되레 복이 있습니다. 내 삶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거룩한 비탄’ 내지 ‘거룩한 절망’을 하고, 그래서 구원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절망의 산상’에 서본 사람들 곧 골고다 그 ‘해골의 산상’에 서본 사람들은, ‘사망의 몸’인 자기가 죽어야 할 운명적 심판의 장소인 그곳의 십자가에서 자기 대신 이미 죽어있는 분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희생양’이 되신 그분은 같은 죄인의 인생인 내 어머니도 내 아버지도 아닙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망의 몸’인 우리 인생들이 죽을 운명을 이기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는 구원의 오묘한 영적 비밀이 거기 있습니다. 체험적으로, 인생이 아닌, 인생 이상의 세계인,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대속(代贖)을 만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젠 더 이상 ‘나’는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장기이식’ 아니 ‘생명이식’을 받고 거듭났으면, 대신 죽으신 그 분의 뜻에 합당하게 열심히 사는 것이 되레 그 긍휼 그 희생 그 대속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자 ‘일만 달란트’라는 ‘생명 이식’의 은혜에 ‘빚진 자’의 당연한 책무입니다. 그렇게 구약 대대로 계시 및 예언된 영원한 구속(救贖) 내지 대속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정점을 통해 “다 이루어진 것”(요한복음19:30)”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a ransom)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10:45)
그러니까 ‘나’의 죗값을 대신해서 응분의 형벌을 받는 ‘대속물(代贖物)’이 되신 그 자체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다 이루시고”, 스스로 희생하신 그 자체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또한 “다 이루신 것”입니다. 다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이른바 ‘성육신(成肉身)의 이중 목적’이자 ‘십자가의 이중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라는 ‘이중 목적’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적 내지 사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해법은 죄인인 누군가의 죄와 허물을 법적으로 비판하며 응징하는 ‘정의’ 내지 ‘공의’의 실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은 법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위해 법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 내지 ‘사랑’이 빠진 채 ‘법적 정의’나 ‘사회정의’라는 이름으로 비판만 하면 그래서 늘 또 다른 비판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교만이 교만을 만나고, 아집은 타집을 만나고, 우익은 좌익을 만나게 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집행되는 법적 내지 지식적 ‘정의’만 강조되는 개인의 심령이나 사회는 피차 비정해집니다. 가뭄 때 갈라지는 논밭처럼 피차의 심령이 자꾸만 메마르고 거칠어집니다. 진정한 평화나 공존의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가족이든 이웃이든 타인이든, 그 어떤 사람 그 어떤 사건 앞에서든지, 한 손에는 ‘정의’와 한 손에는 ‘사랑’이라는 ‘십자가의 이중 목적’의 의미와 절대 필요성을 우리 역시 사명처럼 늘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의 경우를 봅시다.
그 여인을 끌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요한복음8;4-5)
‘예수를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그렇게 ‘시험’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저 주장은 법적으로 옳습니다.
간음한 ‘더러운 여인’을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 당시의 ‘(율)법적 정의’이자 ‘사회정의’였으니까요. 그러나 율법은 분명히 “간음한 남자도 함께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잡혀온 자는 상대적 약자이자 사회적 약자인 여인 한 사람뿐입니다. 남자는, 뇌물을 먹었는지 아니면 ‘남성들의 카르텔’ 때문인지 여하간 봐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은 끼리끼리 이미 불법을 저지르고, 만만한 약자인 여인 앞에서만 ‘하나님의 정의’, ‘사회정의’를 부르짖고 있는 형국입니다. 꼴불견의 형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당신들의 정의’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정의’는 이미 아닌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율법이나 ‘하나님의 정의’는 죄인에게 형벌을 가해서 죽이는 데 그 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죄를 범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구원하는 데 그 참 목적이 있습니다. ‘사랑’에 그 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빠진 ‘정의’는 진정한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고 ‘사회정의’도 아닌 것입니다.
저 가브리엘 신부의 명언처럼,
“무력이 옳다면, 사랑이 설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의 자리에서,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시는’ 침묵을 통해 무리의 흥분을 일단 가라앉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선, 마침내 여인을 정죄하는 무리들에게 이렇게 응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자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서있는 여인만 남게’ 됩니다. 이미 무서운 ‘군중의 정의의 심판’ 내지 ‘여론의 심판’을 받은 그 여인에게 그리스도는 다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한복음8;11)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모성애’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법정’의 심판대에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정의’와 용서하고 새 삶의 기회를 주는 ‘사랑’, 그 ‘이중 목적’이 함께 성취된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도 저 ‘남성들의 카르텔’처럼 권력화 내지 세력화되어 정치권력이나 재력 앞에서는 약하고, 일부 ‘간음한 여인’들을 향해서는 지나치게 독선적인 모습으로 돌을 던지는 행태를 자행하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성찰해볼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오늘의 ‘간음한 여인’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훈계 및 질타하며,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많은 말로 정죄하는 자칭 의인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역시 ‘죄 있는 자들이 먼저 돌로 치며’, 사랑이나 긍휼이 없는 ‘정의’만을 부르짖는 ‘무례한 기독교’나 ‘중세기 십자군 같은 기독교’나 저 ‘과라니족’을 학살한 국가 내지 군대들처럼 집단이기주의적인 탐욕이 포장된 만행의 전철을 밟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와 구원으로 인도하기는커녕 되레 “너나 잘 하세요”, “너희들이나 잘 하세요” 식의 거부반응만 더 크게 불러일으키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쥐도 ‘사회정의’ 내지 ‘법적 정의’만을 부르짖는 고양이에게 몰리면 막판엔 되레 고양이에게 대들지 않던가요?
따라서 우리 역시 세상을 살면서 직면하게 되는 인간관계의 모든 사건 앞에서, ‘정의’와 ‘사랑’ 그 ‘성육신의 이중목적’이자 ‘십자가의 이중 목적’의 의미를 늘 숙고하며, 그리스도의 사랑 중심의 언행(言行)을 더욱 본받을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럴 것이 사랑은 정의를 포용할 수 있지만, 정의는 사랑을 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위한 정의가 소중한 것이지, 정의를 위한 정의는 그 끝이 늘 공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의’도 소중한 것이지만, ‘정의’는 차라리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늘 조용한 것입니다. “오른손이 한 일조차 왼손이 모르도록” 조용한 것입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감동 감화시키는 것은 그런 ‘사랑’이 아니던가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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