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밥’을 먹고 삽니다.
‘빵’을 먹고 삽니다. 사람에게 가장 기초적인 슬픔은
실인즉 ‘빵이 없는 슬픔’입니다.
그래서 문호 세르반테스도 이렇게 토로했던 것이겠지요.
“빵만 있으면 웬만한 슬픔은 견딜 수 있다.”
물론 ‘빵’을 살려면 응분의 ‘돈’이 있어야 합니다.
‘잘 먹고 잘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경제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보다 더 ‘부자’가 되려고 다투어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부자도 ‘돈’을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빵’을 먹고 살아야만 합니다.
부자라고 네 끼, 다섯 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과식하면 되레 병이 되는 것 아니던가요.
러시아 속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식량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부자들은 돈을 먹고 살아야할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나는 먹고 마신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실인즉 우리 일상사에서 먹고 마시는 일이나 돈에 관한 얘기를 빼고 나면 남는 게 없을 지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런 일차원적인 삶, 육신적 내지 동물적 삶이라면 되레 ‘불행한 인간’의 삶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 ‘인자(人子)’ 곧 ‘하늘의 복이 있는 인간’의 표상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시험을 통해 제기되는 인생 제일의 명제가 바로 그런 일차원적인 삶이었으니까요.
예수께서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받은 최초의 시험은 이것이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 돌들로 금덩어리가 되게 하라, 돈덩어리가 되게 하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bread)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word)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4:4)
구약성경 ‘시편’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그 계시의 말씀에 순종 내지 순응하는 삶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았던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40일 금식 후에도 ‘떡’ 문제로 죽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굶어죽지 않았습니다. 돈이 없어, 경제 문제로 죽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말씀’은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누구인가?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1:1)
그러니까 구약(성경)시대에는 하나님이 ‘계시’ 및 ‘예언’을 통해 인간들에게 내려주신 그 ‘말씀’이고, 신약(성경)시대에는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成肉身)’ 친히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 구약과 신약의 ‘말씀’의 영적 정체성과 통일성이 하나로 증언 및 선포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물질의 떡’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사람다운 사람의 아들’이 되려면 그것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말씀’ 곧 ‘생명의 떡’을 먹으며 살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bread)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6:35)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육신적 차원에서 더 나아가 정신적 내지 이성적 차원의
세계를 추구한 철학자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였습니다.
20세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
사르트르는 이렇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사고한다.’
실존(實存)을 사고나 종교의 본질보다 우위에 둔 것.
프랑스 작가 까뮈의 실존은 한 수 더 나아갑니다.
‘나는 저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모순이나 부조리 등에 저항한다는 것입니다.
독일 나치스에 저항하며 레지스탕스 운동을 했던
그의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도
그런 그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그래서 진화론이나 공산주의 등의 사조와 궤적을 같이하며 무신론으로 흐른 저들의 그것은 그러나 종국적인 구원의 세계를 열지 못하고, ‘실존주의’라는 한 시대의 ‘주의(ism)’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럴 것이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던 알베르 까뮈의 ‘부조리한 죽음’이자 ‘허무한 죽음’이 그것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싶으니까요.
까뮈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린아이 죽음보다 더 분노할 것이 없고,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부조리한 것도 없다”
그러나 그는 그가 ‘부조리’라고 생각한 자동차사고로 죽었습니다. 직접 운전하던 자동차도 아니었습니다. 조수석에 타고 가다가 사고 현장에서 죽었습니다. 운전하던 사람은 살았는데, 그는 죽은 것입니다. 정작 ‘부조리한 죽음’이자 ‘허무한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순과 부조리를 앓으며 고뇌한 그가 인생의 그 모순과 부조리에 의해 죽고만 것입니다. 46세였습니다.
저도 청년시절 한때 우상(?)처럼 고상하게 보인 사상이었고 그래서 심취했던 ‘실존주의’이지만, 특정 인간 중심의 이성(理性) 내지 지성이나 학문이나 사상은 많이 알수록 그 자체가 되레 모순 내지 부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마르크시즘’이나 ‘주체사상’ 등도 같은 범주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자체가 스스로 교만해져서 되레 자기가 갇히거나 잡히는 함정이나 덫이나 사막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럴 것이 ‘전무후무한 지혜자’ 솔로몬도 이렇게 말했으니까요.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도서1:18)
따라서 정신 내지 이성이나 상식의 차원 그 이상의 세계이자 그것을 초월하는 ‘영혼’ 내지 ‘신앙’의 세계에 열려야만, 인간이 되레 동심(童心) 내지 무지개의 꿈을 영원히 간직한 채 ‘하늘의 행복’ 내지 ‘초월적 행복’의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막’에서의 삶은 아무리 실존적으로 치열하게 산 인생이라고 해도 결국 한계상황에서 끝나기 마련이니까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유형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스스로 깨어있는 인간이고자 했던 치열한 단독자의 죽음이든, 전쟁과 폐허 앞에서의 집단의 죽음이든, 그 좌절이나 절망이나 허무한 종말을 인간이나 세상 중심인 '무신론적 실존'으로는 극복하거나 이길 수 없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선배 솔로몬은 참 지혜와 지식의 ’근본‘을 또한 이렇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beginning)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언9:10)
그러니까 ‘여호와’ 곧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그 자체가 영원한 ‘하늘의 복’이 있는, 참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자 ‘근원’이라는 것. 나아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확인한 그래서 인생의 죽음이라는 ‘한계’까지도 이기는 부활을 확신했던 사도 바울은 또한 이렇게 역설했습니다.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린도후서4:13-16)
그렇습니다.
‘겉사람’이 후패해도,
‘겉사람’이 늙고 병들고 죽어가도,
되레 ‘새로워지는 속사람’의 생명,
그것이 되레 저 모든 것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이자 부활의 생명입니다.
영원한 해법이자 부활의 해법입니다.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영성 중심의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은 그래서 또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good)을 이루느니라.-(로마서8:28)
정녕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모든 환난이나 고통, 불운이나 불행이나 죽음 등 그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이 되게 하시고’, 영원한 구원이 되게 하신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원망 내지 불평하며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오직 믿고 의지하며 삽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된 일’도 감사하고, ‘내 뜻대로 안 된 일’도 감사할 수 있는 넉넉한 여유 및 자유를 가지고 삽니다. 억울한 피해나 손해를 입은 일이나 심지어 ‘원수 갚는 일’조차도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삽니다.
‘내 원수인 개똥이’가 정말 ‘나쁜 놈’이라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때가 되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대신 때려주실 것입니다. 땅에서든 하늘에서든 심판하실 것입니다. 유태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독일을 더 강한 연합군을 들어 심판하시고, 조선을 노략질한 일본을 더 강한 미국을 들어서 심판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속사람’이 큰 사람일수록 ‘살아계신 하나님’의 그런 섭리 역사, 그런 구원의 역사를 굳게 믿고 삽니다. 십자가의 희생 그 대속(代贖) 곧 대신의 구속을 굳게 믿는 것처럼 대신의 갚음 내지 심판도 또한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감정’보다 ‘내 감정’이 먼저 나가는 것을 경계 및 조심하고, ‘하나님의 주먹’보다 ‘내 주먹’이 먼저 나가는 것을 늘 겸손하게 경계 및 조심하며 삽니다.
그것이 실인즉 ‘속사람’이 크고 강한 자의 참 능력이자 지혜 아니겠습니까? 오래 참으며 자기의 언행(言行)이나 각종 욕구를 다스릴 줄 아는 자제 내지 절제의 능력도, 쓴 것이나 곤욕을 감사할 줄 아는 능력도, 자족할 줄 아는 능력도, 다 ‘속사람’의 그 신앙인격 그 성숙도와 비례하는 것이니까요.
‘나는 믿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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