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그리스도와 '함께 아는' 양심

이형선 2015. 7. 13. 08:59

 

 

금년은 ‘해방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종군위안부’나 과거사 사죄 문제, 독도 영유권

주장 등 미해결된 숙제들로 인해 외교적 긴장과

갈등이 여전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쟁과 학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공공연하게 사죄하는 독일 메르켈 정권의 양심과

차라리 뻔뻔한 얼굴로 전쟁을 미화시키며 다시금 우경화를

천명하는 일본 아베 정권의 양심은 확실히 다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일국(一國)의 최고지도자라고 해서

다 ‘올바른 양심’을 가진 것은 과연 아닙니다.

 

제나라 경공(景公) 때의 명재상 안자(安子).

어느 날, 그가 왕명을 띠고 형(荊)나라에 갑니다.

형나라 임금은 제나라 특사인 안자를 은근하게 골탕

먹이고자 신하들과 함께 계략을 사전에 모의합니다.

 

이윽고 당도한 안자가 형나라 임금과 같이 앉아있을 때,

한 죄인이 포승에 묶인 채 끌려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임금이 묻습니다.

“그 사람은 누구냐?”

“제나라 사람이옵니다.”

“무슨 죄를 지었느냐?”

“도둑질을 했습니다.”

순간 임금은 짐짓 놀란 양 오버액션을 취하며

안자와 죄인의 얼굴을 번갈아보다가,

안자에게 들으라는 듯 이렇게 말합니다.

“제나라 사람도 도둑질을 하는가?”

 

안자는 여유를 잃지 않습니다. 되레 빙그레 웃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응수합니다.

“강남에 귤나무가 있었지요.

제나라 임금이 그것을 강북에다 심게 했는데,

그 귤나무가 강북에선 탱자나무로 변해버렸답니다.”

 

저기서 우리는 인생이라는 존재 혹은 목적의 의미를 유추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디서 사느냐, 누구와 함께 사느냐, 누구와 함께 아느냐에 따라서 ‘귤’이 될 수도 있고, ‘탱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것은 또한 양심의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귤과 탱자는 겉모습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속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맺고 있는 양심의 열매는 ‘귤’일까요? ‘탱자’일까요?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예수 그리스도)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7:20-21)

 

우리가 잘 아는 영어 ‘양심(conscience)’은,

‘함께 알다’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컨선티아(conscientia)’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라틴어의 그런 의미는 헬라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사도행전23:1)

 

신약성경에 나오는 ‘양심’ 곧 헬라어 ‘쉬네이데시스’가

‘함께 알다’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저 ‘양심’도 모세의 율법과 ‘함께 알던’ 열성 유태교인이던 때의 그의 양심과 회심 및 개종한 이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아는’ 그의 양심은 다릅니다.

 

모세의 율법과 함께 알던 바울의 당시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희망’이라는 의미인데, 그는 이스라엘 초대 임금 사울 왕과 같은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따라서 사울 왕처럼 ‘큰 자’가 되고 싶은 ‘희망’을 가진 ‘사울’일 수 있습니다.

그럴 것이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진 유태인이었고, 당시 존경받는 예루살렘의 율법학자였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지식인이자 율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열성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교만힌 의인’의 모습으로, ‘전염병 같은 이단 무리인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서 죽이는 데 맹렬하게 앞장섰던 열혈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비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회심 및 회개합니다. 방향을 돌린 것입니다. 그렇게 거듭난 사울은 그 후 양심도 바뀝니다. 모세의 율법과 ‘함께 알던’ 양심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아는’ 양심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 자체부터 스스로 바꿔버립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에서 ‘바울’ 곧 ‘작은 자’라는 이름으로 바꿔버립니다. 사울 왕처럼 큰 자가 되고자 하는 ‘희망’을 품었던 ‘사울’의 희망이 스스로 ‘작은 자’ 곧 ‘섬기는 자’가 되고자 하는 그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자기의 사심이나 야심이나 욕심이 ‘큰 자’는,

진정으로 이웃을 ‘섬기는 양심’ 내지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가 ‘작은 자’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양심’의 푯대이기도 합니다. 그럴 것이 사도 바울의 그런 양심은 곧 십자가 저 죽음의 자리까지 ‘자기를 비우고 낮추신(*케노시스) 그리스도의 마음’이자 양심을 본받는 삶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하나님은 항상 나를 작은 자로 만드신다”고 고백했습니다만, 실인즉 ‘작은 자’라는 인간 자기의 분수 내지 정체성을 알면 알수록 그만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큰 자’이자 ‘겸손한 자’가 되어간다는 의미에 다름 아닙니다.

나아가, 사도 바울은 감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린도전서11:1)

 

교만한 말입니까? 물론 전혀 아닙니다.

세상의 권력자나 부자를 본받으라는 말씀도 분명 아닙니다. ‘천국(天國)’을 맛본 자, 천국의 비밀을 아는 자의 진실한 고백입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다가 순교하기까지 했던 사도의 진실한 ‘이웃 사랑’입니다. 그것이 ‘너희’가 살 수 있는 참 구원의 길이자 생명의 길이자 축복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확신이자 신령한 확신인 것입니다. 그는 지금 율법적 지식이나 신학적 학문이나 대형 목회학으로 ‘너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심도 욕심도 없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헌신과 희생과 섬기는 삶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풍토가 암울한 지경에 빠진 요인은 한 마디로,

기복이나 번영이나 지식을 가르치는 ‘목자들’은 많지만 사도 바울처럼 저렇게 ‘삶’을 가르칠 수 있는 ‘선한 목자’는 없거나 귀하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세상과 함께 아는 ‘탱자’는 많아도, 그리스도와 함께 아는 ‘참 귤’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인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를 본받고, 목자를 본받는’ 중심의 비전과 ‘지금 여기에서’ 구현되는 실존적 삶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사랑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족’이자 ‘믿음의 아들’에게 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하나 더 들어봅시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1:18-19)

 

그렇습니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

그것이 진정으로 가르치고 배워야할, 최고의 ‘교훈’이자 가훈이자 학문이자 지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 유학’해서 로마 시민권과 박사학위를 얻고 세상에서 주류 신분이 되어 행세하는 그 자체가 인생의 진정한 성공이나 목적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많은 이웃을 섬기며 살리는 그런 이타적 성공이 진정한 성공이자 능력이고,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진 이들’이 구현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믿음의 아들’이든 ‘친아들’이든, 자기 가족은 물론이고 이웃에게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가르치지 못한 어버이나 선생은 물론이고, 그런 목자나 그런 국가최고지도자는 천하를 다 얻었다 쳐도 종말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인생이자 ‘허무한 열매’의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럴 것이 ‘믿음과 선한 양심’은 삼중고의 장애를 앓았던 헬렌 켈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속에 언제나 떠있는 태양’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이런 고백을 했었지요.

 

“나는 캄캄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럴 것이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태양이 떠있기 때문입니다.“

 

‘캄캄한 세상’을 능히 이기는 ‘마음속의 태양’.

실로 복된 소유이자 영원한 자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저런 자산이나 유산을 물려받은 자녀나 후학은 진실로 ‘복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양심’은 누구와 ‘함께 알고’ 있는 양심일까요? ‘내 주먹, 내 머리, 내 돈, 내 권력’과 ‘함께 아는’ 양심? 자본주의와 ‘함께 아는’ 양심? 사회주의와 ‘함께 아는’ 양심? 특정 종교나 다원주의와 ‘함께 아는’ 양심? 같은 ‘창조주 유일신’을 믿는다지만 이슬람교의 무함마드와 ‘함께 아는’ 양심과 기독교의 그리스도와 ‘함께 아는’ 양심은 또 다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거룩한 구별의 능력이 또한 필요합니다.

 

실인즉 진실로 ‘선한 양심’은 인간 ‘나’나 ‘너’의 노력이나 학문이나 수행에서 나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태양의 빛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사랑’이자 ‘절대선’이시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인 인간 우리는 역시 피조물인 달과 별이 그런 것처럼 ‘태양’의 그 ‘빛’이나 그 ‘양심’을 받아서 반사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것이 먼저 ‘믿음’이 필요한 절대이유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심령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선한 나무가 절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세상의 빛’과 ‘세상의 선한 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예수의 피)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브리서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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