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부활, 진실인가? 거짓인가?'

이형선 2015. 4. 6. 09:57

 

 

인류 역사에서 최고의 기적은

단연 ‘부활(復活)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죽은 자가 부활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연 진실일까요?

다만 맹신자들이나 호사가들이 꾸며낸 거짓일까요?

‘부활, 진실인가? 거짓인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을 수밖에 없는, 아니 품어야만 하고,

풀어야만 할 지고의 숙제이자 명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의 우리도 부활의 세계를

직접 목격하고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 삶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절로

확 뒤집어질 것이라는 그것입니다.

내세 내지 ‘하나님의 나라(天國)’를 절로 믿게 되고,

그래서 금세가 내세를 준비하는 삶이라는 것을

또한 절로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솔직한 토로인즉, 이성적인 인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죽은 자의 부활을 믿기 어렵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병든 자가 이적을 통해 나을 수가

있다는 것 정도는 믿을 수 있다 쳐도, 아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조차도 다 그것을 믿지 못했으니까요. 창조주 하나님의 영(靈)의 계시의 산물이자 진실의 기록인 성경은 그런 사실조차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를 통해서 그런 인간적 회의(懷疑)의 진솔한 모습을 살펴봅시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찾아)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한복음20:25)

 

‘다른 제자들’이 그런 ‘도마’를 어찌할 수도 없었겠지요.

자기들부터가 우리가 ‘헛것을 봤나? 유령을 봤나?’ 싶어 긴가민가했을 테니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제자들의 말이나 심령 깊숙이까지도 통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십니다. 분명히 굳게 ‘문들이 닫혔는데도’ 마치 유령처럼 문을 지나쳐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금세 알아볼 수 있는 ‘온전한 부활’의 형상이지만, 그러나 ‘신령한 부활’의 형상인 것입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한복음20:26-29)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그랬지요?

그렇습니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본 것만 못합니다. 한 번 직접 본 자는 백 번의 들음이나 학문을 능히 이깁니다. 신령한 부활의 세계 내지 초월의 세계를 한 번 직접 목격 내지 체험한 자 앞에서는, ‘백문’의 지식도 논리도 이성도 대수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하찮은 소수가 될 뿐이지요. 인생의 가치관이 절로 확 뒤집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도 절로 외마디 탄성을 토로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헬라어 원문에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My Lord and My God!)’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문장이 아니고 절로 터진 외마디 감탄사이자 신앙고백이었다는 것입니다.

저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은 평소에도 했던 고백이니까 그렇다 쳐도, ‘호 데오스 모위!’ 곧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처음 터진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그 진면목에 활짝 열린 것. ‘호’라는 ‘정관사(the)’까지 붙어있습니다. 성경에서 대대로 말씀하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바로 ‘그 하나님’이자 ‘그 메시아’라는 고백이 됩니다.

대단한 랍비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도 아니고, 종교 천재나 종교 사기꾼도 아니고, 그 정체성이 바로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부활에 관한 증언들 중 가장 비중이 큰 증언이자 체계적인 기록은 이른바 ‘부활장’으로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주후 55년경에 사도 바울에 의해서 기록된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원전 4년경에 태어나셨고, 주후 29년경에 골고다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죽은 후 불과 26년 밖에 안 된 때의 서신인 ‘고린도전서’가 됩니다. 십자가 처형 사건 전후의 정황을 생생하게 알고 있는 증언자들이 아직도 살아있고, 모함과 핍박의 구실을 찾는 적대자들 역시 들끓고 있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에 관한 거짓된 전설이나 소설을 쓸 수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 양심과 진실과 구원의 길을 선포하다가 죄다 처참한 순교의 길을 간 사도들이나 사도 바울이 굳이 거짓증언으로 남들을 속일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겸손하고 진지한 구도자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에 관한 사도 바울의 증언을 경청해봅시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으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15:2-8)

 

저 말씀이 액면 그대로 믿어지십니까?

그렇다면 부활은 분명히 진실이 됩니다.

말씀이 말씀 그대로 ‘믿어지는 믿음’,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의심하는 저 도마를 친히 찾아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이자 성령(聖靈)께서 현재적으로 우리를 친히 찾아주셔서 영안(靈眼)을 열어주신 섭리에서 비롯되는. ‘보지 못하고도 믿어지는’ 은혜이니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정녕 그렇습니다.

‘보고 믿는 것’, ‘알고 믿는 것’이 이성이자 물질이자 과학이라면,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복된 영성(靈性)의 비밀이자 ‘천국의 비밀’입니다. ‘보기 위해 (먼저) 믿는 것’, ‘알기 위해 (먼저) 믿는 것’이 ‘믿음의 비밀’(히브리서11:1)이라는 것. 믿음이 믿음의 ‘실상’이나 ‘증거’를 창출하고, 그렇게 감사가 감사를 창출하고, 긍정이 긍정을 창출하는 법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 그렇게 ‘사십 일’ 동안,

세상에서 제자들에게 자주 ‘보이시면서’, 그들에게 부활의 세계에 대한 확인과 확신을 심어주고 키워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세상에 보낼 성령’을 약속하신 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昇天)하십니다.

 

한편, 신학자 노만 앤더슨 교수는 ‘부활’에 관한 단편적인

글에서 다른 그 무엇보다도 그 후 제자들의 변화된 삶에서

부활의 진실성의 증거를 찾으며, 이렇게 논술하고 있습니다.

 

-부활한 주님을 만났다는 목격자들은

 바로 그때로부터 자신들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부활의 증언이 참된 것임을 증명하였다.

 이전의 비겁과 의심 그리고 절망은 사라지고

 기쁘게 부활을 증언하게 되었다. 그런 제자들의

 전적으로 변화된 삶에 달리 어떤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렇습니다.

변화된 그 삶으로 그 사람을 압니다. ‘그 열매’로 그 나무도 그 사람도 압니다. 변화된 그 순교자적 삶으로 그들의 부활의 증언도, 그들의 오순절 성령 체험도 다 진실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달리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한 것일까요?

실인즉 참으로 ‘한심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파송한 무리에 의해 체포당하신 주님 앞에서,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던 ‘수제자 베드로’가 아니던가요. 죄다 도망치고 숨기에 바빴던 참으로 ‘한심한’ 제자들 일색이었습니다. 심지어 ‘벗은 알몸으로 도망한’(마가복음14:52) 제자도 있었으니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치적 메시아’ 곧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시면 그 ‘좌우편’ 그 높은 자리에 앉고자 서로 시기하며 서로 다투던 제자들이었는데, 그 세상적인 꿈과 기대와 야망이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처럼 끝나버렸으니 그만큼 허무와 좌절과 절망도 클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런 제자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은 후,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하는 저 유대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이제는 감히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사도행전4:19)

 

참으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천하나 천지가 개벽하는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은 사람의 심령(心靈)이 변화되는 기적입니다. 그럴 것이 주님의 말씀 그대로,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런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그 후 죄다 그들이 ‘보고 들은’ 부활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언 및 전파하다가 마침내 자원한 순교의 형틀에서 ‘불쌍하도록’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그것을 익히 알고 자원해서 의연하게 가는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삶, 그 이상의 어떤 반증이나 설명이 더 필요한 것일까요?

20세기 독일 나치 치하에서 반 나치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39세의 나이로 순교했던,

신학자 본회퍼도 이렇게 의연한 고백을 했었습니다.

-부활을 아는 자에게 절망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열리면 결코 ‘절망’이나 두려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 절망’인 ‘죽음’조차도 이기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 자빠져도 여덟 번째 일어나고, 금세에서 죽어도 내세에서 그리스도처럼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부활이나 내세에 열린 자들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나 우주관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상대적으로 이기적인 ‘몸보신’이나 세상에서의 ‘돈 타령, 장수 타령’에 열심인 우리들의 삶이라면 그것은 사도들이나 순교자들 앞에서 되레 부끄러운 집착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33년’을 살다 죽더라도, 정작 가치 있는 삶을 살다죽을 수 있어야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다시 사도 바울의 말씀이자 각오를 들어봅시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린도전서15:1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