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입니다.
과문한 때문인지, 저로선
고난주간엔 여러 잡다한 책이나
유식한 글 속에서 헤매기(?) 보다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으며
조용히 묵상하는 것이 보다 은혜가 되고,
보다 깊이 있는 성찰이 되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속에서 몇 구절이나마
발췌해서 함께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천국을 탐하는 자는 많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려는 자는 거의 없다.
예수님의 위로를 소망하는 자는 많으나
그분과 함께 고난을 당하려는 자는 거의 없다.
그분과 함께 만찬 식탁에 나아가려는 자는 많으나,
그분과 함께 금식하려는 자는 거의 없다.
누구나 그분과 함께 기쁨을 누리려고 하나,
그분을 위하여 또는 그분과 함께
고통을 참으려는 자는 거의 없다.
떡을 나누어 주는 그분을 따르는 자는 많으나,
그분의 고난의 잔을 마시려는 자는 거의 없다.
그분의 기적을 숭배하는 자는 많지만,
그분이 당한 십자가의 치욕을 따르려는 자는 거의 없다.
-예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어떤 이기심이나 자애심과도 섞이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야 말로 얼마나 막강(莫强)하랴!
언제나 위로만을 추구하는 자는 돈에 팔려
고용된 노동자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언제나 사리사욕만을 도모하는 자는,
그리스도보다도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자가 아니겠는가?
-보라! 모든 것이 십자가에 있고, 모든 것이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는 데에 있는 것을!
신성한 십자가의 길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극기의 길 이외에는, 생명에 이르는 길이 없고
참다운 내적 평화의 길은 없다.
그대의 뜻대로 가보고,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해보라.
그러나 거룩한 십자가의 길보다 더 높고
더 안전한 길을 찾아내지는 못하리라.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져라.
그리하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너를 져줄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데에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닌,
더 좋고 더 유익한 것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
그것을 보여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누가복음9:23)라고 말씀하셨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희생양이 되어
너희 대신 십자가를 졌으니, 너희는 이제 내 십자가만 믿고 구원과 축복을 받기만 하면 된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달콤한 복음이나 은혜’만 강조된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자 ‘반쪽 복음’이자 ‘거짓 복음’일 수 있습니다. ‘기복신앙’이자 ‘무속적 신앙’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기록되었으되’의 ‘말씀’에 임의적으로 가감(加減)을 하지는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맘 먹고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도 아닙니다. “날마다(daily) 제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도, 섬김도, 사랑도, 용서도, ‘날마다’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고집하고 자기를 주장하며 ‘날마다’,
자기 감정이나 정욕대로 사는 삶이 정녕 복된 삶일까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절제 내지 극기의 삶이 정녕 복된 삶일까요?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전자의 삶이 훨씬 자유롭고 평안하고 행복한 삶일 것 같습니다. 실제로 세상의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긴 안목을 가지고 그 ‘열매’를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파하신 것처럼, 전자의 열매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마태복음15:19) 등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일색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탐심이나 부정부패나 사리사욕이나 주색잡기도 다 거기서 비롯되는 ‘악한 열매’들이자 ‘악령(惡靈)의 열매’들입니다. 그것이 태생적으로 이기적이고 타락한 성정을 가진 인간의 비본래성이자 그 허무한 결국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은 물론이고,
모든 인간관계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정의와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삶을 본받아 따르는 후자의 삶이, 길게 보면 되레 자기에게 더 복이 있고, 자유롭고, 평안하고, 행복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들을 귀’를 가진 자들에게 들려지는 ‘영성(靈性)의 비밀’이자 ‘역설(逆說)의 지혜’입니다.
인생으로 세상을 살아볼수록 과연 진리의 말씀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나름대로 ‘공든 탑을 쌓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자기를 부인하지 못해’, 이른바 성추행 등의 성적 사건이나 뇌물수수 같은 부정부패나 마약이나 도박 등의 사건으로 한순간에 ‘개망신’을 당하며 추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오늘의 세태가 그 역설의 진리됨을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생명보험, 상해보험, 암보험’ 등 각종 보험이 만다라처럼 발광(發光)하는 시대입니다만, 가장 안전한 보험이자 영원한 보험은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입니다!
그럴 것이 인간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생명과 평안과 기쁨 등 ‘하늘의 복’으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이자,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는 ‘부활의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나 ‘소우주’인 인간 자기 속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을수록’(창세기1:2) 우리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으며,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물론이고 우리 몫의 십자가도
그 의미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공의(정의)와 사랑과 그분의 살아 역사하심을 굳게 믿고, 그분이 허락하신 크고 작은 모든 뜻이나 현실 앞에서 ‘자기를 낮추며 죽기까지 복종(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해 침을 뱉거나, 돌이나 가시를 던지거나, 손에 대못질을 하거나, 옆구리를 창으로 퍽퍽 찌르는 ‘원수’인 그 누군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추며, 죽기까지 순종해본 적이 있을까요?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죽기까지 ‘아가페’의 용서와 사랑을 해본 적이 있을까요?
지금까지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면 앞으로라도 있어야할 텐데 싶어, 저부터도 정말 걱정입니다. 그럴 것이 ‘제 십자가’ 한 번 변변히 져본 적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못자국 하나 없는 뻔질뻔질한 손으로, 대속의 피가 엉긴 주님의 손을 반갑게 잡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가시자국, 채찍자국, 창자국 하나 없는 뻔질뻔질한 몸으로 대속의 피가 엉긴 주님의 몸을 반갑게 껴안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죽으면 금세 역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질 그래서 흙이 되고 티끌이 될 우리들의 손이자 육신입니다. 그런 이 손 이 육신으로 아직 살아있을 때, 더 늦기 전에, 아직 건강할 때, 누군가 이웃의 더러운 발, 더러운 몸, 더러운 마음 한 번 진심으로 그리고 정갈하게 씻겨주지 못한 인생으로 끝난다면?
오호라, 스스로 허무하고 스스로 헛된 인생이 될 터!
그래서일까요.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선구자일 수 있는,
대철학자 키엘케고르도 이런 고백을 했었지요.
“인생은 사십부터가 아니다.
이십부터도 아니다. 인생은 십자가로부터이다.”
과연 그렇습니다.
참 인생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이자
‘자기 십자가’로부터입니다.
참 종교도 참 신앙도 참 사랑도 다 십자가로부터입니다!
참 사귐이나 참 용서 등 모든 인간관계도,
참 성공의 가치도 다 자기 비움과 낮춤과
희생적 삶으로 대변되는, 십자가로부터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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