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재벌가 '왕자의 난'

이형선 2015. 8. 3. 09:19

 

 

재벌가 ‘왕자의 난’이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번엔 롯데재벌가(家)이군요.

그룹 후계자 및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한 형제간의

분쟁이 전면전 대결구도로 치닫는 양상입니다.

 

장남 신동주 측에서는 창업주 “신격호의 후계자는 신동주”라고 주장하며 차남인 한국롯데그룹의 신동빈 현 회장에 대한 신격호 총괄회장의 ‘해임지시서’와 그 육성녹음까지 공표했습니다. ‘포스트 신격호’를 자처하는 형과 아우 간의 경영권 분쟁이 서로의 약점에 대한 폭로전까지 불사하며 ‘전쟁’ 양상으로까지 비화되고 있습니다. 그럴 것이 차남은 “94세의 고령인 아버지의 건강과 판단력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인데 그런 ‘아버지를 이용하는’ 장남 측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정면 반박하고 나섰으니까요.

 

어차피 가족 내지 왕자들 간의 ‘전쟁’이니까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싸움이지만, 권력이나 재력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과연 부자지간이나 형제지간의 정감이나 사랑이나 의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탐욕의 세계’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럴 것이 저들의 싸움은 지금 배가 고파서 먹고살자는 서민들의 싸움이 아닙니다. 산야에서 먹고살기 위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쫓고 쫓기는 육식성 동물들의 싸움도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탐욕의 싸움’은 다른 ‘동물의 세계’보다 더 비열하고 저열한 싸움일 수 있습니다. ‘밀림의 왕’이라는 사자조차도 ‘일용할 양식’으로 배를 채울 뿐 더 이상의 탐욕을 부리거나 살상을 자행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롯데왕국 ‘신격호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저 장남과 반격을 선포한 차남은 이복형제가 아닙니다. 동복형제입니다. 친형제지간에도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과연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럴 것이 국민을 상대로 해서 돈을 번 부자들은 ‘이웃’이라는 국민을 위해 또한 돈을 쓸 수 있는 응분의 ‘공익적 책임’도 있는 법이니까요.

 

평범한 서민이자 신앙인인 저의 가치관으로썬, 먼저 아버지를 위시한 가족들의 재물이나 경영권력이나 자리 중심의 그런 가치관이나 정서가 되레 걱정이 됩니다. ‘가난한 자들의 시기’가 결코 아닙니다. 인간성이나 인간 본연의 존엄성이 재물로 인해 중심까지 누렇게(?) 변색된 것 같은 저들의 심령이나 가치관이 정말이지 걱정이 됩니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진정한 인간의 진선미(眞善美)는 ‘육체의 라인’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고, ‘돈 냄새’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심령의 냄새’ 곧 ‘심령의 향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저는 믿는 사람이니까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God)과 재물(Money)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6:24)

 

지금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과 ‘재물’ 중, 누구를 더 ‘사랑하고’ 누구를 더 ‘미워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 냄새’보다는 ‘돈 냄새’를 더 풍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 사랑’보다는 늘 ‘돈 사랑’ 쪽으로 더 기울어있는 삶은 아닐까요?

 

헬라어에 의하면, 사랑은 네 가지로 분류가 됩니다.

혈육간의 사랑인 ‘스톨게’, 친구간의 사랑인 ‘필리오’, 남녀간의 사랑인 ‘에로스’, 하나님의 사랑 내지 거룩한 사랑인 ‘아가페’가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천국(天國)’은 한 마디로 ‘아가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가 있을 때, 하나님을 유일한 ‘주인’으로 모시고 사랑하는 ‘아가페’가 있을 때, 가족 내지 혈육간의 사랑도, 친구간의 사랑도, 남녀간의 사랑도, 외려 ‘진실로 복이 있는’ 참 사랑의 관계로 승화 및 완성될 수 있다는 절대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재물이나 권력이나 육체 그 자체가 신(神) 내지 우상이 되고 주인이 되면, 부자간의 사랑도, 친형제간의 사랑도, 친구간의 사랑도, 남녀간의 사랑도 다 허무한 무위가 되고 심지어 ‘증오의 대상’인 적이나 원수가 되기까지도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만고불변의 ‘진리’ 아닙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태복음19:23-24)

 

한편,

〈사기(史記)〉의 ‘화식전(貨殖傳)’에 보면,

‘도주지부(陶朱之富)’라는 고사가 나옵니다.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상인(商人)인

‘도주공(陶朱公)의 부’이자 ‘큰 부’를

일컫는 말인데 그 유래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월(越)나라 왕 구천은 지혜 있는 신하인 범려의 말을 듣지 않고 오(吳)나라와 싸워 크게 패합니다. 구천은 범려의 충언을 듣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오나라와 굴욕적인 화해를 하게 됩니다.

이후 범려의 지혜에 힘입어 구천은 부국강병에 힘써 20년 뒤에 드디어 오를 멸망시키고 승자가 됩니다. 범려는 상장군이 됩니다. 그러나 명신 범려는 누릴 수 있는 응분의 공신 내지 권력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거기 안주하지도 않습니다. 정치 권력의 생리나 생태를 지레 통찰했던 그는 되레 이런 명언을 남기고 저 기득권의 자리에서 떠나버리고 맙니다.

 

“나는 새가 없어지면 활이 더 이상 필요치 않으며,

 민첩한 토끼가 죽으면 좋은 개도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어 잡아먹히게 된다.”

 

그리고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 제(齊)나라로 건너갑니다.

제나라에서 범려는 이름마저 바꾼 채 장사를 시작합니다. 장사 수완도 뛰어났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큰 부자가 됩니다. 제나라 왕이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재상으로 삼고자 초빙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도 안주하지 않습니다. 되레 “오래도록 높은 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말을 함께,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다시 도(陶)나라로 옮겨갑니다.

 

도나라에서 그는 다시 장사를 시작해 큰 부를 얻게 되어 ‘도주공(陶朱公)’이라 불리게 되는데, 그런 재물 역시 아낌없이 ‘이웃’ 곧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그는 그렇게 17년 동안에 걸쳐 세 차례나 큰 부를 얻었지만 그때마다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던 것입니다.

 

돈을 잘 버는 수완이나 재능은 죄도 허물도 아닙니다. 연예인이나 예술가의 그것처럼 남다른 재능이자 재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돈벌이’ 그 자체가 목적이 된 사람들은 그래서 인간성이나 인간 본연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부자든 연예인이든 예술가든 그 끝이 ‘돈의 노예’ 곧 ‘수전노(守錢奴)의 일생’이거나 ‘허무한 무덤’이거나 ‘동물의 왕국’ 같은 살벌한 전쟁판이었다는 사실만은 동일하고 분명합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자기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진정한 축복의 길은 어떤 길일까요?

진정한 행복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전무후무한 지혜의 사람’이자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었던 솔로몬은 그의

체험적인 삶의 고백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싸우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1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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