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이육사의 '청포도'와 '광복 70주년'

이형선 2015. 8. 17. 08:44

 

 

동네 근방을 운동 삼아 걷다가,

넓어진 잎사귀만큼 커진 청포도나무의

그늘 아래 잠시 선 채 몸을 쉽니다.

알알이 영글어가는 청포도 송이 송이들이

싱싱한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파란 하늘의

흰 구름도 멀리서 군침을 흘리고 있는 듯합니다.

까까머리 시절에 즐겨 외던 시인 이육사(李陸史)의

명시〈청포도〉가 절로 떠오릅니다.

그래서 추억을 더듬으며 다시 읊어보게 됩니다.

‘광복 70주년’인 오늘의 의미도 투영하면서 말입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서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주지하다사피,

이육사 선생은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의열단’ 단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 일제의 감옥을 드나들었고,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안타깝게도 그 한 해 전에 옥사(獄死)하신 분입니다. 40세였습니다. 그런 독립투사가 저렇게 의미심장하고 아름다운 서정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또한 조선의 석학 이퇴계 선생의 후손이었기 때문일까요.

투옥 당시 그의 수인번호가 ‘264’였기에 그의 이름을 ‘이육사’라고  개명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우리는 거기서도 시인의 치열한 민족의식 내지 시대의식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싶습니다.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실로 그것은 ‘희망의 세계’입니다.

‘하늘 밑 푸른 바다의 가슴이 열리는’ 때를 알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는’ 그 하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시인의 저 ‘희망’은 이기적인 희망도 사적인 희망도 아닙니다.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는 민족의 희망이자 대망(大望)입니다.

역사적 광복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광복에의 현실적 시대상황은 차라리 절망적이지만, 그러나 시인은 심령을 통해 ‘오고 있는’ 광복을, ‘오고 있는’ 미래적 조국의 독립을 선지자처럼 미리 보고 선포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대망(待望)사상일 수 있습니다.

바벨론제국에 의해 멸망당한 이후 수백 년 동안 열강 제국들의 치하에서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던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기다리던 ‘메시야 대망(待望)사상’과 같은 유형의 대망사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그렇게 ‘내가 바라는 손님’ 곧 ‘조국의 독립’은 온다는 것입니다. ‘흰 돛 단 배를 타고’, ‘손님’처럼 온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바다에 대한 시적(詩的) 감성 혹은 영성(靈性)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손님’처럼 찾아오는 ‘기적의 비밀’을 압니다. 그래서 그 어떤 절망적 상황 아래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절망할 때 하나님은 시작하신다.-

그런 파스칼의 명언처럼, 영원한 희망에의 패러독스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교적 차원을 높이기 위해, 여기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메시야 대망사상’을 좀 살펴봅시다. 구약성경에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장차 세상에 오실 메시아 곧 그리스도에 관한 다양한 표현의 예언 및 계시가 기록되어있는데, 선지자 이사야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9:2, 6)

 

저 ‘큰 빛’이자 ‘한 아기’이자 ‘한 아들’이자

‘평강의 왕’이신 메시아는 과연 저 예언 및 계시

그대로 700여년 후에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가 그 분입니다.

나아가 기원전 530년경의 선지자 다니엘은

이렇게 예언 및 계시했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a son of man)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권세요 그(*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다니엘7:13-14)

 

한편,

‘광복 70주년’을 맞는 우리에겐 ‘바라는 손님’이 또 있습니다. 바로 ‘남북 통일’입니다. 저 시대적 숙제 역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에 ‘흰 돛 단 배를 타고’, ‘내가 바라는 손님’처럼 또한 찾아올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믿고 있고, 대망(待望)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국의 독립을 대망하던 저 시인은 빈손으로 그 ‘손님’을 맞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미리 그리고 항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 ‘청포도’라는 ‘열매’를 늘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 늘 그렇게 깨어 내일 내지 내세를 준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님’과 함께 기뻐하며 만찬(?)을 나눌 수 있는 ‘식탁’을 마련하고,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까지 마련해두라고 당대의 백성들이자 후대의 ‘아이’에게 당부했던 것입니다. 물론 저 ‘식탁’은 이기적인 ‘내 식탁’이 아닙니다. ‘우리 식탁’입니다. 공동선(共同善)이라는 ‘열매’를, 찾아온 ‘손님’은 물론이고 이웃 및 백성과 함께 나누는 ‘우리의 식탁’이라는 것입니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서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진실로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이 그렇듯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내가 바라는 손님’은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손님’ 그 ‘희망’이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내가 바라는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못한, ‘청포도’라는 열매와 ‘우리의 식탁’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먼 길을 찾아오신 ‘손님’을 결코 기쁘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이 있는’ 만남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손님’의 정체가 영원한 ‘하늘나라의 왕’이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면, 준비하지 못한 만남 그 자체가 되레 영원한 심판으로 떨어지는 결정적 불행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럴 것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는 “다시 오시리라”(사도행전1:11)고, 신약성경에 또한 계시되어 있으니까요. ‘좋은 열매, 선한 열매’를 준비하지 못한 채 주인을 기다리는 ‘나쁜 나무’를 기뻐할 ‘농부’는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나아가 “세월 이기는 장사는 없다”고 했습니다. 인생인 우리는 누구나 늙고 죽습니다. 그 후 하나님 앞에서 ‘심판’이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미리 말씀 및 계시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삶은 물론이고 아울러 내세의 삶을 위해서, ‘좋은 열매, 선한 열매’를 맺는 삶에 힘써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일개 동물과 같은 그런 허무한 일생이 아닌, 의식이 있고 가치가 있는 그래서 ‘유종(有終)의 열매’가 있는 일생을 살아야 할 절대 이유가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조국(祖國)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감옥에서 순국하기까지, 치열한 민족의식과 시대의식을 가지고 시종일관 퍼렇게 깨어 살았던 저 시인 이육사.

천국(天國)의 구현을 위해서 모진 박해를 감수하며 순교하기까지, 치열한 소명의식과 영원한 생명의식을 가지고 시종일관 퍼렇게 깨어 살았던 저 초대교회 사도들.

그리고 그런 ‘비움과 낮춤의 삶’ 곧 ‘케노시스의 삶’을 오로지 본받으며 살았던 저 한국초대교회 신앙선배들.

 

저런 뜻있는 인생 선배들 앞에서, ‘광복 칠십 주년’을 맞은 오늘 우리의 한국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 새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해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OECD 자살률 최고 국가’라는 고통스러운 자화상이 또한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빈부(貧富)간에 나눠먹을 수 있는 ‘우리의 식탁’이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는 반증일 수 있습니다.

 

그럼 정작 그 어디나 그 누구보다도 먼저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식탁’을 선포하고 준비할 수 있어야했던, 오늘의 한국교회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깨어있는 의식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요? 우리의 ‘열매’는 어떤 모습일까요? 과연 공동선을 구현하는 ‘세상의 빛’이자 ‘세상의 소금’일까요?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 및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일까요?

특정 사람이나 그 종교권력 중심으로 세속화되어 ‘빛’과 ‘짠맛’을 잃어버렸거나, 도덕성이나 청렴성이 한계 수준 이하로 이미 추락한 것은 아닐까요? 각종 이기적인 소유욕과 성취욕을 ‘예수 이름으로’ 추구하는, 다만 ‘종교인이라는 이름의 친목단체’ 정도가 되어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오늘의 사회가 교회를 그 정도로 인식하고 걸핏하면 되레 비판하고 있는 실정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조국’이라는 ‘세상나라’의 생명보다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생명이나 가치의 실재를 확신하는 교회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에서 죽어도 사는 부활의 생명을 확신하는 교회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저 사심 없는 사도들이나 신앙선배들의 헌신적 삶이 그랬던 것처럼 보다 치열한 시대의식이나 분별의식이나 소명의식으로 무장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시대의 강물에 떠내려가는 고기는 다 죽은 고기’라고 했지요?

 

‘배부른 번영’에 대한 비전만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온전한 목자도 선지자도 아닙니다. ‘배부른 번영’에서 필연적으로 맺혀지는 사욕이나 탐욕의 ‘나쁜 열매’나 그 불행한 종말까지 볼 수 있는 비전을 가진 자가 온전한 목자이자 선지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되레 ‘부자’를 꾸짖으며, “세상이 악하다”고 질타하신 것도 다 그 때문 아닙니까.

인생의 ‘열매론과 심판론’이 압축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7: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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