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날의 긴 무더위에 지친 때문일까요.
입추(立秋)에 이어 처서(處暑)까지 지나고 나니,
‘9월이 오는 소리’가 절로 들리는 것 같습니다.
비 개인 오후의 하늘처럼 성큼 다가온 가을.
가을은 한 해도 인생도 기울어간다는 의미이겠지만
그러나 아직 겨울은 아닙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가
바로 가을일 수도 있을 터이니까요.
따라서 지금은 오히려 땅의 순리를 아는 농부처럼
결실(結實)을 위해서 사명의 일손이 바빠져야 할 때이고,
스스로도 성숙해져야 할 때입니다.
그럴 것이 말로만 떠들 뿐 실인즉 열매 없는 자가
이웃 혹은 산야의 벼나 나무 등 남에게만 열매를
요구하는 것은 외식이자 가식이 아닐 수 없으니까요.
-우리는 말이 없으면 못사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앞에 마음과 뜻으로 달려나가기보다 말만 많이 하는 입술로 달려나가는 경우가 너무나 빈번하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경건한 묵상과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더 좋은가?-
영성학자 리처드 포스터(Richard J. Foster)의 말입니다.
나아가 그는 이렇게 체험적인 고백을 합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때때로 격려의 말이나 위로의 말 혹은 인도하심의 말을 받게 된다. 어떤 때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한다. 그래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 앞에 내가 분명히 서있기 때문에 늘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지 않는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화’를 할 줄 아는 영성(靈性)의 오묘한 맛, 비밀한 맛을 깊이 맛본 자의 신앙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화’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저 경지는, 굳이 구별을 하자면 묵상(meditation)의 경지를 넘어선 이른바 ‘관상(contemplation)’의 경지가 될 것입니다. 20세기 영성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관상(觀想)’의 경지를 이렇게 표현했더군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이 안에서, 어디서든지, 어느 때나 하나님의 모습을 찾는 것. 또한 모든 사건 속에서 그 분의 손길을 보는 것. 이것이 곧 세상 한가운데서의 관상이다.-
여하튼 우리도 그렇게 ‘경건한 묵상과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 한 해의 삶을 허락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서서 고개를 숙이면, 우리의 모습은 죄다 한 그루의 ‘과일나무’이자 ‘신앙나무’가 됩니다.
과일나무에게 푸르고 무성한 잎사귀는 건강한 청춘처럼 선하고 복된 것이지만, 그러나 그런 번영이나 성공 자체가 과일나무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목적이나 가치가 아닌 것 또한 분명합니다. 무성한 잎사귀는 낙엽이 되어 결국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다 버리고 빈손으로 가야하는 인생이 버려지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에 얽매여서 생애를 불태우는 것은 실로 허무하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주님, 이 가을에는 전도서를 읽겠습니다”라고 노래했더군요. ‘전도서’에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회전하다 갈뿐인 인생이나 해 아래 세속사(世俗史)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허무주의가 거기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는 않습니다. 거기서 끝나서도 안 됩니다. ‘전도서’는 그렇게 시작해서 또한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도서12:13-14)
그렇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인생의 허무, 세상 권세나 재물이나 그 영광의 허무를 아는 자는 그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이라는 결국의 열매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생이나 세상의 허무함을 남보다 더 빨리 깨닫는 자가 실인즉 ‘하늘의 복’이 있는 자이자 ‘하늘의 지혜’가 있는 자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저 ‘전도서’의 저자이자 ‘지혜의 대부’인 솔로몬도 “너는 청년의 때에(in the days of your youth)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도서12:1)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젊을 때에, ‘세상에서 잘 나가는 때’에, 되레 인생 범사의 ‘헛되고 헛된’ 허무함을 미리 깨닫고 ‘창조주 하나님’ 곧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구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보니 부귀영화도 색욕도 다 별 것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고, 그것이 진정한 하늘의 축복이자 영원한 생명이자 행복이더라는 솔로몬의 체험적 실토이자 고백입니다.
그럼 솔로몬이 말씀한 저 ‘모든 사람의 본분(duty of man)’ 곧 ‘인자(the sun of man)’의 형상이자 삶의 표상은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때에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런 하나님의 형상이자 삶의 표상이 ‘예수의 본분’, 한 사람으로 끝나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사람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여, 주여”하고 입 내지 말로만 노래를 부를 뿐 ‘회개에 합당한 삶’이나 ‘그리스도의 사람다운 삶’이 없는, 표리부동한 신앙인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버드대학 교수이기도 했던 영성학자 헨리 나우웬(H. J. Nouwen)도 진정한 신앙의 경지이자 푯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던 것이겠지요. 나아가 그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커다란 도전은,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 같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는 살아있는 예수”라고
말할 수 있어야한다는 데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성숙한 영혼 그 성화(聖化)의 경지가 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 역시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인격적 ‘커다란 도전’의 진정한 ‘푯대’이자 목적은 바로 저런 영혼의 경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늘 아버지 하나님께 ‘붙어있었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세상을 이기고’, ‘죽음조차도 능히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오늘의 우리도 그런 삶을 살 수 있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 등 세상적 내지 물질적 ‘번영의 열매’가 결코 ‘참 축복의 열매’는 아니고, ‘참 포도나무의 열매’도 아니라는 것을 구별 및 분별할 수 있어야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청년의 때’에 전자의 허무를 미리 통찰 내지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진실로 영원한 생명의 가치와 열매를 추구 및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후자의 열매는 대단하다는 인간 곧 영웅이나 호걸이나 지식인 그 누구도, 성자나 현자나 도사 그 누구도 스스로 맺을 수 있는 열매는 결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붙어있을 때’만 가능한 열매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첫째되는 계명’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말씀을 달리 풀자면, “하나님께 자나 깨나 24시간 다 붙어있어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한 몸’이라는 ‘사랑의 관계’로 늘 붙어있으라는 것.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자 ‘모든 사람의 본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15:4-5)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대통령도 될 수도 있고, 부자나 재벌이나 유명인사로 성공하는 ‘열매’를 맺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왜?
그러나 그런 성공 자체가 진실로 자기 자신이나 이웃을 더불어 행복하게 그리고 영원히 살리는 참 성공이나 참 열매 곧 ‘천국의 열매’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성공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고, 별것도 아니라는, ‘거룩한(*하기오스)’ 곧 ‘구별된’ 가치관의 확연한 분별의식이 또한 거기 있습니다.
솔로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성공은 그 끝이 죄다 ‘바람을 잡은 것처럼 헛되고 헛된’ 것이니까, 그런 성공의 늪에 빠지거나 자만 내지 교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 성공을 할수록 그런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사드리며, 그리스도의 헌신적 인격이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섬김과 거룩한 사랑의 열매를 보다 많이 맺을 수 있는 의무와 책임을 느낄 수 있어야한다는 것. 그것이 진실로 복이 있는 ‘모든 사람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늘 ‘붙어있어야’ 합니다. ‘뿌리’가 다른 나무에 붙어있으면 그 ‘열매’ 역시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백인 아내가 ‘검둥이’를 낳고 백인 남편을 향해 “사랑하는 당신의 열매”라고 ‘입으로 고백하며 찬양한다면’ 그것은 개들도 웃어버릴 개그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뿌리부터가 ‘다른 열매’이자 ‘다른 이의 열매’입니다. 다른 열매는 세상에서 아무리 대단하다고 평가하는 권력이나 재벌이나 대형종교왕국이라고 해도, 실인즉 그리스도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니고’ 별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천하의 영웅도 호걸도 재벌도 지식인도 깨달음이 큰 도사도 별것 아닙니다. 나그네처럼 한 시절 왔다가는 허무한 인생일 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선망하거나, 그런 ‘죽음에 이르는 병(病)’에 걸린 인생들의 세상을 대단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자들 역시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암(癌)질환에 걸려서 시한부 인생을 산다고 합시다. 그런 저에게 진실로 소중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금세에서도 내세에서도 간직할 수 있는 영원한 열매는 무엇일까요?
가을을 재촉하는 태고의 바람은
오늘도 여전하게 불며 나무들을 흔듭니다.
그것은 일개 ‘가지’라는 인간 자기의 정체성 내지 자기의 한계를 아는 ‘들을 귀들’을 향해서, 항상 겸손하게 “내게 붙어있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곧 ‘참포도나무’의 다정한 속삭임이자 성령의 세미한 속삭임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포도나무의 열매’ 곧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라디아서5:)라고 세분했습니다.
따라서 저 ‘속사람의 열매’이자 ‘천국의 열매’는 세상에서 내로라하며 스스로 교만한 권력자나 부자나 강한 자들보다는, 되레 ‘포도나무’에 가지처럼 겸손하게 꼭 ‘붙어있는’ 가난한 자나 약한 자나 어린아이들이 더 풍성하게 맺을 수 있는 열매이자 풍성하게 먹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그것이 ‘천국의 열매’의 역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천국은 (어린아이들) 이런 자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말씀을 보다 깊이 묵상 및 관상하며 결코 ‘헛되고 헛되지’ 않은, 보다 가치 있고 보다 뜻있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는, ‘오고 있는’ 한 해의 가을이자 우리 인생의 가을이 될 수 있기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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