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마 톤즈〉라는 다큐 영화를 통해
저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삶의 가치관에 선한 도전을 주었던 고 이태석 신부.
그는 평소에 자기의 삶에 ‘향기를 준 사람’으로 두 분을
꼽았습니다. 슈바이쩌 박사와 자신의 어머니가 그분들입니다.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는 일찍 홀몸이 되신 분인데, 독실한 신앙인으로 시장 한쪽에서 바느질을 하며 무려 열 명의 자녀들을 어엿하게 키워내신 분이라고 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고유한 한국적 모성애의 대명사이자 헌신의 대명사 같은 분일 수 있습니다.
아홉째 자녀인 이태석을 의사로 키워냈으니, 고생하며 키운 그만큼 의사 아들에 대한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기대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가 된 이후,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고 신부의 길을 가고자하는 마음을 굳힌 이태석은 어머니께 이런 요지의 말씀을 드립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께 배운 향기와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향기가 저를 자꾸만
신부의 길로 이끄시는 것을 제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인간 이태석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이끈 것입니다. 그래서 이태석은 물론이고 어머니도 그 소명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그래서 신부가 된 이태석은 그 후 아프리카 수단 남부의 작은 마을 톤즈에서 신부이자 의사로써 감동적인 섬김과 헌신의 삶을 살다가, 일시 한국 방문 때 발견된 암질환으로 투병 중 애석하게도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보살펴야할 ‘지극히 작은 이웃들’이 너무 많았기에 자신의 몸을 돌아볼 시간이 없었던 순교자적인 희생의 삶. 49세였습니다.
그분이 건강한 몸으로 어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톤즈 마을 그 흑인 청소년들, 얼굴이나 손발 등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나병환자들이나 노약자들의 애도와 감사와 추모로 범벅된 눈물이 지금까지도 제 눈에 선합니다.
그렇게 그분은 우리 세대에서 보기 드문 ‘그리스도의 향기’를 남긴 채 우리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살아서 말씀한 것보다, 죽어서 말씀한 것이 더 많고 더 큰 분입니다. 과연 사심 없는 섬김이나 이타적 헌신의 삶은 말이나 글보다 그 울림이 훨씬 큽니다. 이타적 사랑은 지식이나 이론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과연 거기서 발산되고, 구교나 신교 같은 기독교 종파나 여타 종교나 신앙 유무조차 떠나서 절로 숙연하게 고개를 숙이게 합니다. 거기 진정한 ‘경건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상대적으로 우리 각자의 삶에
‘향기를 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누구의 삶에
‘향기를 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되레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 자만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며”(디모데후서3:)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향기는커녕 되레 지극히 이기적인 자기 야심의 냄새나 돈 냄새나 쾌락의 냄새 등의 ‘악취’를 더 풍기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 그것은 실인즉 우리를 죄다 불행으로 인도하는 ‘배설물’ 같은 냄새이자 ‘말세의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는 저 말씀의 의미가 뭡니까? 한 마디로, ‘거룩한 모양은 있으나 거룩한 삶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심지어 당대의 석학이자 ‘목회자들의 목회자’인 유진 피터슨 교수는 그의 저서〈메시지〉에서 저 말씀을 이렇게 의역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그들 속에는
짐승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대는 그러한 자들을 멀리 하십시오.-
유식한 신학이나 설교학은 있으나 겸손한 신앙은 없는, ‘값싼 은혜’나 ‘값싼 용서’는 잘 알되 역사적으로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은 모르는, 인본주의 신앙 풍토에서 나는 각종 탐욕의 냄새는 차라리 세상에서 나는 그런 냄새보다 더 고약합니다.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으로 공의와 사랑의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할 교회의 변질이나 타락은 그 시대 그 세상의 희망과 양심과 도덕의 최후의 보루가 무너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다 함께 불행한 ‘말세적 고통’이자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the aroma of Christ)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린도후서2:15-16)
물론 ‘생명에 이르는 냄새’인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삶 곧 “이 일을 감당하는’ 삶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 곧 성령(聖靈)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합니다. 성령은 인간들처럼 ‘자의(自意)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합니다. 인류의 새로운 조상 곧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인도 및 역사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오직 그런 삶에서 발산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조차도 인간적으로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라고 자문하며, 그것은 실로 ‘엄청난 책임’이라고 또한 고백했던 것이지요. 내킨 김에, 유진 피터슨 교수의〈메시지〉의역을 더 참고해봅시다.
-이것은 엄청난 책임입니다. 이 말씀을 떠맡을 역량이 되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다가 거기에 물을 타서 거리에 나가 값싸게 파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보시는 앞에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얼굴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할 말을 직접 받아서, 할 수 있는 한 정직하게 전합니다.-(고린도후서2:16-17)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물을 타서 거리에 나가 값싸게 파는 일”은 순전한 복음도 전도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더더구나 아닙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핏값’입니다.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값싼 용서’도 아닙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죄악에서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에는 응분의 ‘엄청난 책임’이 또한 따릅니다. ‘회개에 합당한 삶’으로 은혜의 ‘빚’을 갚아야할 ‘엄청난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은 금수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그랬지요?
나아가, 저 ‘향기’ 곧 헬라어 ‘유오디아’는 ‘유(*well)’라는 부사와 ‘오조(*냄새가 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합성어입니다. 저 ‘유’라는 부사가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잘하였도다”라는 동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잘하였도다(Well!), 착하고 충성된 종아!-
따라서 한 마디로,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 및 그리스도께서 친히 “잘하였도다”라고 칭찬하는 그런 냄새가 진정한 향기이자 우리의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이 다 함께 잘사는 공존 공생의 향기이자 영원한 향기라는 것입니다.
한편,
버려진 벌판에 홀로 피어있는 들국화나 백합화도,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목하 제몫을 하고 있습니다.
고독의 깊은 맛, 비밀한 은혜의 맛을 아는 수도승처럼 순결한 향기가 있어 또한 좋습니다. 꽃들은 자기를 다른 꽃들과 비교하지도 않고, 잘난 다른 꽃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시샘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기 분수의 자리에서 자기 몫의 최선을 다할 뿐, 다른 누군가와 경쟁하지 않습니다. ‘탐욕의 종’인 인간들처럼 ‘무한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기 모습 그대로, 크고 작은 자기 몫의 꽃을 피우며 삽니다. ‘고유의(natural) 향기’는 되레 거기서 풍기어 나옵니다.
버려진 산야도 세상입니다. 소외된 땅도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게 다 함께 아름다워야 할 자연이자 세상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향기는 남는 법. 들국화라는, 혹은 백합화라는 일개 들풀의 삶이지만 버려진 벌판을 품고자 하는 향기가 있어 좋습니다.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저 들국화처럼 또는 백합화처럼, 저도 ‘세상의 작은 향기’라도 되어야할 터인데 싶은 ‘거룩한 책임감’이 늘 숙제로 남습니다. 그럴 것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작은 향기’조차 없거나 되레 악취를 풍기는 삶이라면 실로 ‘헛되고 헛된 일생’을 살다가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싶기 때문입니다.
제가 은혜로 받은 ‘달란트’가 단 ‘한 달란트’다 쳐도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두 달란트 받은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도 시기하지도 않고, 허락하신 ‘내 모습 이대로’에 감사하며, ‘악하고 게으른 종’이 아닌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고자 늘 기도 및 노력하며 살고자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태복음6:28-29)
'영성 편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생초 (0) | 2015.09.21 |
---|---|
'숫양이 새끼를 낳았도다!' (0) | 2015.09.14 |
황금 들녘에서 (0) | 2015.08.31 |
가을의 성숙한 영혼을 위하여 (0) | 2015.08.24 |
이육사의 '청포도'와 '광복 70주년' (0) | 2015.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