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무제 때,
소무(蘇武)는 왕이 내린 사신의 징표를
가지고 적대관계이던 ‘오랑캐 흉노족’에게 갑니다.
그러나 흉노족의 왕 선우는 소무를 항복시키려고
되레 회유합니다. 물론 소무는 사신으로서의
자기 사명이나 뜻을 추호도 잃거나 굽히지 않습니다.
그러자 흉노족의 왕은 소무를 움막에 가두고
음식을 전혀 주지 않습니다. 소무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양탄자의 털을 뜯어먹으며 연명합니다.
일정기간이 지난 후,
소무가 죽었으리라고 생각했던 흉노의 왕은
그가 살아있자 그의 집요한 끈기에 놀라면서
그를 북방의 바다(호수) 근처에서
숫양을 키우며 살도록 귀양을 보냅니다.
그러면서 왕은 소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너를 한나라로 돌려보내주겠다.”
물론 ‘숫양이 새끼를 낳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소무는 자기의 사명과 뜻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고난과 고독의 긴 세월 속에서도 올곧게 인내합니다. 그런 인고의 세월이 흐르면서 한무제는 죽고 소제가 즉위합니다.
소제가 즉위한 후엔, 한나라와 흉노족이 화친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나라 진영의 집요한 요구로 소무는 억류생활 19년 만에 마침내 석방이 됩니다. 머리카락도 수염도 하얗게 새어버린 몸이었지만 그는 ‘국가 최고 어른’의 예우를 받으며 고국 한나라 땅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그를 맞이하는 조정과 백성들의 환영 슬로건인즉 이렇습니다.
“숫양이 새끼를 낳았도다!”
그러니까 19년 만에 “숫양이 새끼를 낳은”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말이 가능한 말로, 성취된 것입니다. 죽음조차 각오한 일편단심의 지조 및 끈질긴 인내의 정신이 ‘새끼’라는 생명의 기적을 낳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성적이나 상식적, 과학적이나 의학적으로 “숫양이 새끼를 낳았도다”라는 저 말은 불가능한 말이지만 그러나 문학적 내지 수사학적 ‘응분의 이해력’을 가지면 가능한 말이자 통하는 말이 됩니다. 그럴 것이 저 말을 이성이나 과학이나 의학의 유식한 지식으로 풀려고 접근하는 사람은 되레 응분의 이해력을 이미 놓치고만 사람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응분의 이해력’은 창조주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곧 인간의 언어 내지 문학적 표현을 통해 주신 성경의 계시적 언어의 이해에 더더욱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엿새 만에 ‘말씀으로’ 우주와 인간을 포함한 자연계를 창조하셨다는 ‘창조론’에 대한 이해부터가 그렇습니다만, 여기서는 세상에 오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구약의 계시이자 언약의 말씀을 좀 상고해봅시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the virgin)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Immanuel)이라 하리라.-(이사야7:14)
마침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순응해서 ‘참 인간’이자 ‘구세주’로 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입니다. 실상인즉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일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말씀 역시 그런 것처럼 예나 지금이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 말씀은 ‘흉노의 왕’이 ‘한나라 사신 소무’에게 준 그런 차원의 언질도 아닙니다. 따라서 그것과는 또한 구별된 ‘영적(靈的) 이해력’이 절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감동에 의해 써진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곳곳에서 친히 강조하신 말씀의 요지처럼 내재적이자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눈’과 ‘들을 귀’의 열림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 그럴 때 비로소 생명을 출산하는 심오한 ‘생명의 말씀’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그대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28:20)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는 저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징조를 주신다는 것. 햇빛이나 단비를 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참 구원의 길(道)이자 영원한 복(福)을 내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땅에 사는 인간들이 의롭고 선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타락한 ‘탕자(蕩子)’이지만 그래도 ‘내 자식’이기에 베푸는 어버이의 사랑처럼, 먼저 하늘이 열리면서 내리는 ‘전적 은혜’입니다.
얽히고 설킨 인생이나 세상 모든 범사의 뿌리나 그 해법은 실인즉 땅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늘에 있습니다. 주님의 비밀이자 영성(靈性)의 비밀에 있습니다. 저 ‘징조’ 곧 히브리어 ‘오트’는 ‘증거, 이적, 표적’ 등을 함께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상식이나 과학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이적, 표적’을 ‘징조’로 주시겠다는, 초월적인 언약인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 영성의 말씀을 믿느냐, 못 믿느냐에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이적의 구현도 가능하다는 것.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메시아의 ‘동정녀 탄생’도 가능하고, 각색 병자와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이적도 가능하고, 바다 위를 걷는 것도 가능하고, 죽은 자의 신령한 부활이나 승천조차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 우리도 그렇게 각양각색의 고난이나 고통, 불행이나 죽음 등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해법은 결코 ‘1+1=2’라는 수학적 해답에 있지 않습니다. 어려운 삶을 사는 청년들일수록 그런 해답에 미리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나라(天國)의 비밀’을 알고 믿는 자에게는 거기 ‘+알파(α)’라는 ‘전적 은혜’이자 영적이자 초월적 은혜가 또한 있습니다. 그래서 ‘1+1=7’, ‘1+1=12’ 등의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는 삶’이라는 해답이 창출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흙으로 만들어진 물질적 내지 수학적(?) 육신을 가진 인간은 또한 ‘영(靈)이신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 창조된’(창세기1:27) 영적 피조물이자 초월적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진면목에 대한 그 본래성의 뿌리이자 중심인 영성(靈性) 및 초월성을 놓쳐버리면, 이성적 해박한 지식인이라 해도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은 구약도 신약도 제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의 역사책이나 성현들의 윤리 도덕책 정도의 이해에서 끝나버리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성(理性) 이상의 세계인, 영성에 대한 ‘보는 눈’과 ‘들을 귀’를 이렇게 강조하셨던 것이지요.
-예수께서 (*니고데모)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3:10-13)
그렇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늘의 일’을 말할 수 있는 ‘인자’의 가치관이자 세계관이자 우주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와 그 역사이자 동정녀 탄생을 통해 ‘하늘에서 내려온 자’이자 십자가에서 대속(代贖)과 구원의 길을 다 이루고 부활해서 승천 곧 ‘하늘로 올라간 자’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숫양이 새끼를 낳도록 한 저 한나라 사신(使臣) 소무의 ‘19년의 인내’도 소중한 삶이자 가치 있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세계인 ‘영(靈)이신 하나님의 나라’까지를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되레 세상의 이런 저런 고난이나 우환이나 우여곡절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내세까지를 내다보는 영원한 소망과 여유를 가지고 저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우리 모두는 지구촌에 보내진 ‘나그네’이자 ‘사신(使臣)’들입니다. 크고 작은 나름대로의 사명이 없는 사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신’이자 ‘그리스도의 사신’들입니다. 보냄을 받은 각 가정이나 단체나 사회 등지에서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이 되어 사는 그곳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현재적 낙원’ 내지 ‘현재적 천국’으로 만들라는, ‘복락원(復樂園)의 사명’을 부여받고 파송된 ‘사신’이자 ‘선교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숫양이 새끼를 낳도록 한” 저 한나라 사신 소무의 삶에서도 배워야겠지만,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비밀’ 곧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았고 확신했기에 세상의 모진 고난과 박해의 세월 속에서도 시종일관 ‘그리스도의 사신(使臣)’으로 인내할 수 있었고, 죽음 앞에서조차도 곧 순교 현장의 자리에서도 부활에의 영원한 세계와 소망을 간직했기에 끝까지 의연할 수 있었던 사도 바울에게서 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후학들의 평가처럼 그는 과연 “기독교를 낳은” 위대한 종이자 사도였으니까요. 그의 한 마디로 집약된, ‘위대한 신앙고백’을 다시 들어봅시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립보서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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