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성자’로 추앙받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어느 날 영국 기자들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인도에서 시급한 과제는 무엇입니까?”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는 일본 식민지였던 우리나라 해방 전후의 실정이 그랬듯이 국민들 대다수가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우선 먹고 사는 문제 곧 빵 문제, 경제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어 있는 형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간디가 조국 인도를 위해 시급하다고 주목한 가치나 과제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인도에 주어진 시급한 과제는
경제적 부강이나 사회복지의 건설이 아니라,
국민들의 올바른 인격 건설입니다.”
그렇습니다.
개인도 국민 모두도 먼저 구해야 할 지상 가치이자 과제는 ‘올바른 인격 건설’입니다. 경제 건설도 아니고, 대형 건물의 건설도 아니고, “잘 먹고 잘 살자”는 복지 건설도 아닙니다. 민주화 건설조차도 아닙니다.
그럴 것이 경제 산업화 건설과 민주화 건설에 성공해서 “국민들 모두가 옛날보다 훨씬 더 잘 먹고 잘 산다”는 우리 한국 국민들의 삶의 질이나 고백이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유엔(UN)의 통계수치가 그것을 반증하고 있으니까요.
유엔(UN)의 최근 발표에 의하면, 한국의 객관적 국가행복도는 남북 분단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의 발전과 높아진 기대수명이나 교육수준 등으로 인해 조사 대상국 130개국 가운데 15위를 차지했더군요. 그러나 국민들이 느끼는 실질적인 삶을 조사한 주관적 개인행복도는 하위권인 94위에 불과했습니다. 저 긍정적 랭킹인 ‘15위’와 부정적 랭킹인 ‘94위’의 괴리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저는 그 요인을 저 간디의 주장처럼 국민들의 ‘올바른 인격 건설’이 되어있지 않은 데서 비롯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OECD(경제개발협력기구)회원국 비교조사에 의하면, 회원국인 34개국 중 가장 부끄러운 1위를 차지한 분야를 살펴보자면, 8년간 연속 1위인 자살률을 비롯해서, 산업재해 사망률, 가계부채, 남녀 임금격차, 청소년과 성인 흡연률, 교통사고 사망률, 환경평가 최악 순위, 이혼 증가율, 공공 사회복지지출 최저 순위 등 다수이더군요. 성범죄 발생 순위, 소득 불평등 순위 등은 2위를 차지하고 되더군요.
과연 경제가 부흥 내지 발전된다고 해서 그 경제 효과가 국민들 내지 이웃들에게 골고루 분배되는 것은 아닙니다. 되레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 현상에 의해 양극화의 골이 깊어지고 맙니다. 먼저 ‘올바른 인격 건설’이 되지 못하면 나라의 경제도, 교회의 부흥이나 발전조차도 양극화의 골에 빠져서 되레 불행한 사회가 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올바른 인격 건설’이 되지 못하면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우리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 내지 집단이기적인 복(福)이나 번영이나 출세 지향적 가치관에 사로잡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주지하다시피 간디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의 조국 인도의 전래종교인 힌두교인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나 선교사가 된 이후 인도의 복음화를 위해 남은 생애를 바쳤던 스탠리 존스 선교사의 평가가 그랬던 것처럼, 간디는 ‘역사상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자(聖者)’였습니다.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남긴 기록 중에,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의 진면목 앞에서 ‘거대한’ 도전 내지 감명을 받은 간디의 이런 소회가 인용되어있더군요. 간디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된 결정적 동기이자 요인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일 수 있다 싶습니다.
-나는 창세기를 읽었다. 그러나 연이은 장들은 변함없이 나를 졸리게 만들었다. 민수기를 읽는 것은 싫었다. 그러나 신약은 다른 감명을 자아내었다. 특별히 ‘산상수훈’은 내 마음에 와서 닿았다. 그 포기는 종교의 가장 높고 거대한 경지가 되어 나에게 호소했다.
톨스토이의〈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책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내 안에 늘 함께하는 감명을 남겼다. 독자적인 사상, 심원한 도덕과 이 책의 진실함 앞에 코아테스 씨로부터 받은 모든 다른 책은 미미하게 여겨졌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나 힌두교라는 여타 종교의 수많은 이름이나 영역이나 도그마조차 뛰어넘어, “모든 종교의 가장 높고 거대한 경지”는 바로 ‘그리스도의 삶’으로 집약됩니다. ‘올바른 인격 건설’의 근원이자 진수는 바로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침 인간의 행복 내지 축복도, 영원한 천국(天國)도 다 그 말씀 그 복음에서 비롯됩니다. 간디는 그것을 확신했기에 몸소 ‘그리스도의 삶’을 살고자 그렇게 노력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진면목인 ‘산상수훈’이자 ‘산상팔복(山上八福)’의 말씀을 다시 묵상해봅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태복음5:)
그럼 우리들의 삶에서는 저 ‘산상수훈’의 말씀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인격 건설화’ 되어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천국의 진리’이자 ‘최고의 축복(Supreme Happiness)’인 바, 먼저 무한 경쟁이라도 해서 다투어 차지해야할 행복이자 축복인데 실상인즉 그렇지 못하잖아요? 우리의 본능이나 욕망은 ‘천국’ 곧 ‘하나님나라’의 가치가 아닌, 보이는 ‘세상나라’의 가치나 물질을 먼저 구하며 사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도 사실이잖아요?
심지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조차도, 세상에서 남보다 부자가 되고 남보다 높은 사회적 주류 내지 일류급으로 성공하기 위한 자기나 자기 자녀들의 소원과 목적의 성취를 위해, 그 기복의 수단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회지도층으로의 성공이나 그것을 위한 노력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먼저 ‘올바른 인격 건설’이 되지 못한 자의 성공은 그 재물도 그 권력도 결국엔 사회적 해독과 불행과 재앙이 되기 마련이라는, 세속의 허무한 인과성을 구별할 수 있는 인격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이 세대의 허무한 인과성을 분별하지 못한 사람들일수록 ‘값싼 은혜’나 ‘값싼 축복’에 열광하지만, 그런 유형의 말씀으로는 ‘올바른 인격 건설’ 내지 성숙한 인격 건설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십년 광야의 훈련’이 없으면 ‘가나안 복지(福地)’ 입성도 없고, ‘십자가의 삶’이 없으면 ‘부활의 삶’도 ‘천국의 삶’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세상나라’ 중심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지배하는 사회나 국가가 맺은 결국의 열매인즉 바로 하위권인 ‘개인행복도 94위’이자 ‘자살률’, ‘이혼 증가율’, ‘소득 불평등 순위’ 등이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는 오늘의 저 우울하고 불행한 수치가 그것을 이미 증명하고 있으니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나와 내 가족’은 있으나 ‘이웃’은 없거나 외면하는, 물질적 내지 상품적 내지 기계적 인간의 사회가 되어간다는 의미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올바른 공존의식이나 시대의식이나 역사의식이 없거나 외면하는 ‘나와 내 가족’이 되어간다는 의미이기에 결국은 피차 불행한 현실이 됩니다. 이웃이 ‘강도’나 ‘짐승’이나 ‘로봇인간’이 되면 그 피해는 ‘나와 내 가족’이 당하기 마련이니까요. 이웃집에 불나면 우리집도 피해를 입기 마련이니까요.
그것이 간디가 당대의 기독교인들에게 당부했던 아래의 말씀이 또한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당부하는 시대적 필요의 말씀으로 들려진다 싶은 이유이자 당위성이기도 합니다.
-신은 이천 년 전에만 십자가를 졌던 것이 아니다.
오늘도 지고 있고 또 날마다 죽으면서 부활하고 있다.
이천 년 전에 죽은 역사적 신에게만 의지해야 한다면
그것은 덧없는 위로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역사적 신을 의지하기보다는 오늘날 살아있는
한 인간을 통해 신(*예수)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실인즉 그렇습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성령(聖靈) 하나님의 올바른 구속사 그 비밀과 그 섭리와 그 능력에 열릴 때 비로소 오늘의 인간 우리의 ‘올바른 인격 건설’도 가능할 터이니까요.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이자 저 참 복(福)의 비밀을 믿는 사람들 그래서 ‘올바른 인격 건설’이 된 사람들은 초막집에서 채소를 먹고 살아도 감사하며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꽁보리밥에 시래기국을 먹고 살아도 자족하며 ‘그들의 것이 된 천국’을 살 수 있었습니다. 영원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 곧 ‘작은 예수의 모습’의 삶을 살 수 있었고, 순교자의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의 ‘인격 건설’이 잘못된 사람들은 수백 수천억을 먹고 살아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탐욕에 잡히면 이웃은 물론이고, 혈육인 형제조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살리기는커녕 되레 ‘갑질’이나 유세를 부리며 작은 이웃들을 구렁텅이나 사지로 몰아내기를 일상사처럼 자행합니다.
그래서 저 ‘인도의 성자’이자 ‘이방인’인 간디는, 그런 우리 한국 사회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되레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당부 및 역설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린도전서10:33-)
실로 그런 역설이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강도 만나서 다 빼앗기고 폭행당한 후 ‘거의 죽게 된 채 버려진 어떤 사람’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던 ‘사마리아인’(누가복음10:)인 그 ‘이방인’을 들어서, 되레 저 작은 이웃의 신음과 고통을 외면하고 모른 척 지나쳐 가버렸던 ‘직업종교인’인 ‘제사장’과 ‘레위인’을 우회적으로 꾸짖으셨기 때문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올바른 인격 건설이 되어?)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10:)
그렇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 아니 저에게 주시는 절대 숙제이자 과제입니다. ‘성자’ 간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했던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위해 ‘거룩한 고민’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되레 ‘참 복’이 있는 ‘올바른 인격 건설’이자 성숙한 인격 건설을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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