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거의 전국에 걸쳐 눈이 소복하게 내렸는데,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은 과연 때를 압니다.
땅도 하늘도 계절을 알고 겨울의 징조를 압니다.
그래서 자신을 비우고 벌거벗었던 산하.
그래서 자신을 낮추고 벌거벗었던 들판.
그런 산하나 들판의 정경은 지극히 작은 자들이나
소외된 아웃사이더의 행색처럼 을씨년스럽습니다.
그래서 더 가난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되레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하늘에서 내리는
오묘한 섭리의 은혜가 그의 것이 됩니다.
지나온 한 해의 이런 저런 죄와 허물조차도
죄다 깨끗하게 용서하고 덮어주는 ‘하얀 은총’,
하얀 ‘서설(瑞雪)’의 축복이 또한 그렇듯이 말입니다.
소복하게 눈 덮인 산하.
과연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고 진실하고 정직한
‘산하’나 ‘들판’은 결코 버려지지 않습니다.
명년인 내세(來歲)나 하늘나라인 내세(來世)로
가는 ‘생명의 길’을 아는 자들에게는 벌거벗은 겨울이
되레 봄보다 더 큰 축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욕심이나 높아짐이 진정한 축복은 아닙니다.
부자 됨이나 권력자 됨이나 지식인 됨이
인생의 진정한 성공도 능력도 목적도 아닙니다.
대형 목회나 부흥에 성공했다는 외형이나 수치
그 자체 역시 진정한 성공도 능력도 푯대도 아닙니다.
인생의 참 성공이자 참 능력이자 참 목적이자 푯대는
되레 ‘케노시스’ 곧 ‘비움과 낮아짐’에 있습니다.
참 성공도 참 사랑도 참 인격도 참 축복도 되레
‘너보다 나를 더 비우고 낮출 수 있는 마음자리’,
거기 있습니다.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삶에 있다는 것.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그런 겸손한 인격,
진실한 인격, 정직한 인격이 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그런 인격 그런 삶이 바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자 ‘닮아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됨의 삶’이라는 것.
영원한 생명도 가치도 보화도 오직 거기 있습니다.
그 영성의 비밀, 그 ‘속사람’의 비밀을 아는
‘산하’와 ‘들판’에 예나 지금이나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은총이자 풍성한 은혜가 소복하게 덮이면서
겨울이 시작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저 하얀 서설(瑞雪)이 진정한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동양화 같은 한 폭의 경치나 외형,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연의 풍광으로만 끝나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이자 ‘메시지’가
저 섭리 저 은혜 속에서 보이고
들려질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하얀 서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고 또한 들을 수 있을까요?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저는
하얀 평화, 순결하고 순수한 평화,
깨끗한 평화가 보이고 들려진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다시 찾아 조용히 묵상했습니다.
-주여,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불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인생 우리는 과연 ‘평화의 도구’일까요?
과연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요한복음14:27),
진정한 ‘그리스도의 평화’의 ‘도구’일까요?
자기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지식의 ‘도구’,
특정 인간이나 특정 정치집단 내지 이념집단,
특정 이익집단이나 종교집단의 ‘도구’는 아닐까요?
분쟁이나 다툼의 ‘도구’, 사심이나 탐심의 ‘도구’,
교만이나 시기나 허영이나 허세의 ‘도구’,
주색이나 도박 등 중독의 ‘도구’는 아닐까요?
우리가 특히 주목할 것은,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가 그의 유명한 저서〈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갈파한 그대로, 개인적으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는 ‘도덕적 인간’조차도 특정 단체 내지 집단 내지 사회에 소속되면 ‘비도덕적’이 되고 만다는 그것입니다.
소속된 특정 ‘우리의’ 집단이익이나 사회이익이나 국가이익이 ‘우선순위’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종 사악한 부정부패가 합리화되는 ‘비도덕적 사회’나 세상이 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다수라는 집단이나 제국의 패권이 집단이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 내지 ‘폭력’이 되고, 또한 그것에 저항하며 보복한다는 저 탈레반이나 저 IS조직의 잔혹한 테러 사건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비도덕적 사회’의 악순환과 그 만행을 목하 뼈저리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나나 너’나 ‘아군이나 적군’이나 ‘교회나 사회’를 막론하고 피차 ‘신(神)의 이름’까지 팔아서 갈수록 이기적이고 물질적이고 탐욕적이고 폭력적인 ‘도구들’이 되어가는 이 사회 이 세상의 실상을 목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 인위적인 재앙과 역설을 통해서도 우리는 역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곧 ‘로고스’이자 ‘메시지’를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코 남의 일, 남의 나라의 일만이 아닌, 우리 시대의 통증과 신음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럴수록 더욱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이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집약됩니다. 그럴수록 진정한 ‘평화의 기도’와 진실한 ‘평화의 도구’가 절대 필요하다는 하나님의 탄식과 요청으로 집약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나 자기 집단의 각종 채움과 높아짐과 세력을 위해 ‘짐승들’처럼 무한 경쟁하고 무한 살상을 일삼는 저 ‘밀림’에도,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인생 우리의 참 목적의 실상이자 모범이 그렇듯이, 오직 ‘참 인간’인 ‘그리스도를 본받아’ 날로 ‘온전한 그리스도 인격’으로 성숙 내지 성화되어야 할 우리 모두의 심령에도, ‘세상을 이기는’ 저 하얀 서설, 저 하얀 그리스도의 평화가 은총처럼 푸짐하게 내릴 수 있는 겨울이 될 수 있기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peace)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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