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역경(逆境)을 감사하는 소수'

이형선 2015. 11. 23. 10:56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102층인 미국 뉴욕

맨하탄에 있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었습니다.

까까머리 그때 달달 외우던 기억이 새로운데,

저 빌딩에 1620년 9월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 신대륙 아메리카에 도착했던 청교도 102명을

기념하기 위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은 훗날 알았습니다.

그것도 1930년대 그 어려운 경제공황기를 이기고자 지었더군요.

 

〈역사 연구〉라는 방대한 저서를 통해 해부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정의처럼 예나 지금이나 “인류 역사는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의 역사”입니다. 인류 역사나 문명은 가혹한 도전에 맞서 용감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응전하는 ‘창조적 소수’의 노력과 역할에 의해 발전되어간다는 지론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순례자들(Pilgrim Fathers)’이자 ‘개척자들’인 청교도 102명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저들은 거친 파도와 질병에 시달리면서 66일 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신대륙에 도착했지만 그때는 혹한기였기에 배안에서 월동(越冬)을 한 후인 1620년 12월에 비로소 상륙을 합니다. 상륙은 했지만 혹한의 추위가 계속되는 와중에서 일행 중 반 이상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해마다 흉년의 고통만 계속되자 저 ‘순례자들’이자 ‘개척자들’은 어려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자주 ‘금식기도기간’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고통과 역경에 빠질 때마다 금식기도를 하는 신앙이 ‘경건한 신앙’이라고 생각했던 저들은 다시 어려움이 시작되자 금식기도를 하고자 논의합니다. 함께 모인 그 자리에서 청교도 일행 중 한 사람이 의외로 이런 제의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을 달리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비록 농사가 흉년이 들고 형제자매들이 병으로 쓰러지는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이 와중에도 우리가 감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량이 여의치 않고 모든 여건이 유럽보다 불편하지만 그러나 우리에겐 신앙의 자유도 있고 정치적 자유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광대한 대지가 열려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금식 대신에 감사기간을 정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참석한 일행은 그 농부의 말에 큰 감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창조적 내지 긍정적인 방향으로 일대 발상의 전환을 합니다. ‘금식기간’ 대신에 ‘감사기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것이 미국의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다고 전해옵니다. 그리고 그 삼백여 년 후에, 그 후손들에 의해 저 청교도들 중 절반 이상이 죽어간 그 땅 곧 오늘의 뉴욕 땅에 당시 세계최고건물이라는 102층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우뚝 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이런 말씀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감사(感謝)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구약성경, 시편50:23)

 

따라서 저는 아놀드 토인비가 말한 저 ‘창조적 소수(The Creative Minority)’의 의미를 감히(?) 이렇게 바꿔보고 싶습니다. 인류 역사나 문명 내지 문화도, 개인의 운명이나 그 역사도, ’역경을 감사하는 소수(The Thankful Minority)’의 노력과 역할에 의해 발전되어간다고 말입니다.

그럴 것이 영국의 대문호 밀턴은 ‘맹인’ 곧 시각장애인이라는 가혹한 운명의 역경에 빠졌지만 거기서 절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그도 인간인지라 응분의 고뇌와 절망을 앓는 기간이야 있었지만 그는 마침내 이렇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육(肉)의 눈은 어두워 보지 못하지만

 대신 영(靈)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후 그는 명작 〈실낙원〉을 저술했습니다.

 

‘귀머거리’ 곧 청각장애인이었던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도 역시 그렇습니다.

상상력과 호기심이 남달리 풍부했기에 주입식 정규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늘 ‘문제아’로 취급당했던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맙니다. 그가 간간이 나갔던 초등학교에서 받은 교육과정이라곤 도합 ‘3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탕과 신문팔이 행상을 하던 그는 소년시절부터 기차 화물칸 한구석에 자기만의 실험실(?)을 마련해놓고 틈나는 대로 홀로 과학실험을 즐기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실험약품이 떨어지면서 화물칸에 불이 나고 맙니다. 그러자 달려온 역무원들이 격노해서 에디슨의 뺨 등을 거칠게 구타하면서 그를 기차 밖으로 내동댕이쳐버립니다. 에디슨은 그 후부터 청각장애인이 되었다고 술회했습니다만 여하간 그는 훗날 “청각장애로 인한 어려움은 없었느냐?”고 묻는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나는 귀머거리가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덕분에 딴소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으니까요.”

 

‘20세기의 기적’으로 불리는 헬렌 켈러의 경우도 역시 그렇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금언처럼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봅시다. ‘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삼중고(三重苦). 저런 깜깜한 불행은 글자 그대로 절망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저주’ 같은 불행일 수 있습니다.

저런 불행 앞에서 평범한(?) 우리들의 ‘내 어떤 어려움, 어떤 아픔, 어떤 실패, 어떤 상처, 어떤 병, 어떤 장애’ 등으로 인해 우울증이나 불안 증세에 빠지거나 원망 불평하거나 비관하고 자학하며 절망에 빠진다면 그것은 외려 사치스러운 감정이자 배부른 타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차라리 교만하고 ‘악하고 게으른’ 정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것이 헬렌 켈러는 이렇게 고백했으니까요.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나의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다 가진 것과

 마찬가지랍니다.”

 

재산도 열 자식도 인재(人災)와 천재(天災)라는

재앙을 통해 다 잃은 비참한 상황 속에서,

‘고난의 대명사’ 욥은 그래도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했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이시오

 거둔 이도 여호와이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2:21)

 

현실적으로 ‘찬송’할 곧 감사할 건더기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감사할 수 있는 ‘속사람’ 곧 심령의 인격이자 여유는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욥의 저 감사, 저 찬송이 마침내는 그가 되레 하나님께 ‘배전(倍前)의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과연 현실적으로 달든 쓰든, 행복이든 불행이든, 역경이든 순경이든,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범사에 감사해야” 할 필연적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동양 고사의 의미도 그렇듯이, 오늘의 불행이 내일 혹은 내세의 행복이 될 수 있고, 오늘의 행복이 내일 혹은 내세의 불행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그 죽음의 자리,

그 극한의 고통의 자리, 그 끝장의 자리에서조차도

원망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채찍으로 때리고, 손과 발에 대못을 박아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 대신 ‘아버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 후, 이렇게 최종적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께서 큰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누가복음23:46)

 

그렇습니다.

최고의 감사, 최종의 감사는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는” 그것입니다. ‘전적 맡김(Total Commitment)’이라는 것. ‘전적 위탁’이자 ‘전적 헌신’이라는 것.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도 오직 거기서 나옵니다. 그런 자는 욥처럼 세상에서 살아도 살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에서 죽어도 삽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주목할 문제는,

우리가 건강할 때는 그 건강에 대한 감사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죽을병’에 걸려봐야 비로소 숨을 쉬는 것이나 먹고 마시고 거동하는 것 자체조차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잘 나가고 잘 풀릴 때에 역시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당연한 내 노력 내 능력의 결과 정도로 여깁니다.

그와 달리 잘 나갈 때는 감사를 잘 드린다고 해도, 정작 ‘궂은 일’이나 ‘쓴 것’ 등의 역경에는 진실로 감사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인간 우리의 ‘간사한 속성’이자 타성입니다. 따라서 범사에 진실로 감사할 줄 아는 자는 결코 다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외로 소수라는 것입니다.

 

-(*당시 불치병이던 나병환자 열 명)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온 자가 없느냐?-(누가복음17:15-18)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저 ‘나병환자 열 명’ 중 어느 쪽에 속한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고도 자기 길을 가버린 배은망덕한 ‘그 아홉’ 중의 한 사람? 돌아와 그 후 늘 ‘엎드려 감사하는’ 삶을 살았던 단 ‘한 사람’?

육신의 나병에서 깨끗함을 받은데 대한 감사보다, 욥처럼 그 ‘불치병’ 그 불행이나 그 고난을 통해 “귀로만 듣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는 눈으로 뵈옵는(욥기42:5)” 곧 체험적이자 인격적으로 뵌 그 만남 그 자체가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절대가치이자 절대은혜입니다. 의사에게 한 차례 병 고침을 받은 ‘손님 관계’보다는 그 의사를 ‘내 남편’으로 맞아들여 영원히 함께 사는 ‘부부 관계’가 정작 복이 있는 관계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한계를 좀 더 사는 ‘육신의 구원’보다 영원한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한 숙제이자 더 감사해야 할 가치입니다. 그럴 것이 ‘육신의 병’을 가진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만, 죄악이나 탐욕이나 원망 불평 의심 등 ‘영혼의 병’을 가진 자는 금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천국의 삶을 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역시 부부간의 관계로 그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부부는 어느 한 쪽의 ‘육신’이 크게 병들거나 불구가 되어도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끝까지 보살피며 남매처럼 ‘천국의 삶’을 잘 살더라고요. 그러나 건강하고 유식하고 대단한 능력이 있는 어떤 부부는 되레 심령(心靈)이 병들어 서로 의처증이나 의부증, 외도나 주색, 성격의 교만 등에 빠져 ‘백년 웬수’가 되어 ‘지옥의 삶’을 살다가 이혼하기도 하고, 심지어 죽고 죽이기까지 하더라고요.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한 몸’이 되는 믿음과 사랑의 관계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먼저 영혼 내지 심령의 구원을 받고 역경을 포함한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격이 되어야 할 필연적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런 믿음, 그런 가치관을 가진 ‘소수’가 또한 ‘창조적 소수’가 될 수 있고, 하늘의 복이 있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예수께서 한 사람)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축복)하시더라.-(누가복음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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