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메멘토 모리'와 그 해답

이형선 2015. 11. 16. 10:31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선구자인

덴마크의 사상가 키엘 케고르.

그는 인간의 한계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고, 따라서 내세(來世)에 열려지지

못한 인간은 ‘한 마리의 짐승’처럼 끝이 허무한 존재일

뿐이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는 또한 한 종교 포럼에서

이런 내용의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훌륭한 책의 저술가인 아무개라는 분을 저는 압니다. 그는 매우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한 고난과 시련을 몸소 체험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깊은 회의 속에서 헤매던 끝에 어떤 목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딱한 고뇌의 하소연을 다 들은 후, 그 방문객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그 목사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아무개가 지은〈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책을 읽어보시오. 그 책을 읽고도 만일 구원 얻을 수 없다면, 당신은 구원될 길이 없을 것 같소.”-

 

한 마디로 유식하다는 지식 내지 지성의 한계, 이성의 한계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질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죽어간 따님의 병고와 죽음 앞에서 아버지로서의 무력함과 무능의 한계를 뼈저리도록 절감하고 따님의 권유대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이 시대의 지성’ 이어령 교수. 그때 그 분은 친히 겪은 인간의 저 절망적인 한계와 고뇌를 “메멘토 모리” 곧 “죽음을 생각하라”라는 라틴어 풀이로 대신했었는데, 그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시대의 지식도 지성도 “죽음을 생각하면” 죄다 무익하고 하찮은 것입니다. 내가 직접 극한의 불행이나 고통이나 고난의 늪에 빠지면, 철학이나 문학이나 과학이나 도학이나 종교학을 망라한 모든 인간 중심의 지식은 대중가요 가사처럼 ‘님’에다가 점하나 찍으면 ‘남’이 되는 허무한 것들입니다. 자기 머리나 도취의 한계 안에서 춤추는 언어유희 내지 지적유희 정도의 장단이자 나래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유한 재산도 열 자식도 다 잃어버리고 자신의 몸마저 악질에 걸린 극한의 불행과 고통 속에 빠진 ‘욥’을 찾아와, 위로 및 권고한답시고 욥을 율법적으로 일방적으로 가르치려고만 들었던 ‘세 친구들’의 유식한 지식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 중심의 지식은 대개가 그렇듯 일방적으로 머리나 입으로만 남을 가르치려고 듭니다. 그것이 삶은 아닙니다. 사랑의 삶도 아니고, 동참의 삶도 아닙니다. 그런 지식은 다만 ‘교만’일 뿐입니다. 세상 지식이나 현행법 내지 율법적 지식만 알면 그 유식한 지식들이 되레 교만한 인간, 비정한 인간, 이기적인 인간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린도전서8:1-2)

 

그렇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지식만이 아닙니다. 남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소유했다는 세상의 재물도, 권력도, 명예도, 미색도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종교적 내지 율법적 열심이나 선행이나 수행조차도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되레 더 차갑고 배타적이고 무자비한 인간이 되기 쉽습니다.

그럴 것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신바, ‘하나님의 은혜’ 그 사랑 그 긍휼의 은혜를 받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니까, 하나님과 이웃과의 모든 관계에서 덕을 세우기는커녕 되레 차별이나 냉혈(冷血)의 벽을 높여서 그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고 말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가 남보다 더 잘났다고 생각하는 그것 때문에 되레 아집(我執)에 갇힌 인간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실인즉 남보다 자기에게 더 속고 사는 삶이 인생살이 아니던가요?

 

따라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만 비로소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한 사람이자 진실한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을 본받아 닮아가는 삶이 될 때, 비로소 겸손한 그리스도인이자 진실한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의 전문가인 ‘박사’가 되기도 물론 어렵지만, ‘박사’가 되었다고 해서 그 지식의 양만큼 겸손한 인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타적 내지 헌신적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되레 이기적 인격, 교만한 인격이 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은 물론이고 창조주 하나님까지도 자기의 그 유식하다는 머리로 함부로 재단하며 ‘무신론’ 등을 운위하기도 합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태복음11:25-26)

 

주님의 종,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 (fool)가 되라. 그래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futile) 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린도전서3:18-20)

 

자타가 유식하다고 하나 실상인즉 ‘무익하고 하찮은(futile) 자기 꾀’나 자기 지혜나 지식에 외려 자기가 빠지는 인생은 정말 ‘바보인 바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바보는 ‘지혜로운 바보’를 의미합니다. 그럼 ‘지혜로운 바보’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어떤 지식일까요?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역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존재라는 인간의 타락한 정체성과 거기서 비롯된 각종 불행과 절망 등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 지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메멘토 모리” 곧 “죽음을 생각하라”가 필요하다는 것. 실인즉 젊은이도 늙은이도 언젠가는 분명히 빈손으로 죽습니다. 나도 죽고 너도 죽습니다. 초상집에 가면, 대단하다는 인물의 지식도 능력도 교만도 탐욕도 정욕도 다 ‘허무하고 하찮은’ 것이 됩니다.

그럴수록 또한 분명해지는 숙제는, 인간의 생명이 ‘죽음’ 그 자리에서 끝나서는 결코 안 된다는 그것입니다. “메멘토 모리”라는 명제 자체에서 끝나면 숙연한 철학이나 도덕이 될 수는 있어도 구원의 생명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살리는’ 구원의 해답은 무엇인가? 그 숙제에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해답을 직접 들어봅시다.

 

-살리는 것은 영(靈)이니 육(肉)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한복음6:63)

 

그렇습니다.

참으로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육의 끝은 무익합니다. 허무합니다. 따라서 ‘겉사람(肉)’이 후패해도 ‘속사람(靈)’이 날로 새로워져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속사람’도 ‘겉사람’처럼 후패해져버리면 살아도 ‘한 마리의 짐승’이요 죽어도 ‘한 마리의 짐승’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영성(靈性)에 대한 지식조차도,

머리로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성적 지식이나 학문적 지식으로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 그렇게 아는 지성인들이 되레 얼마나 많은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신앙과 그 영혼과 믿음을 무시하고 죽여 버렸고 또한 죽이고 있는 것이던가요.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에는 그런 지식적인 ‘알다’를 의미하는 ‘오히다’와 체험적인 ‘알다’를 의미하는 ‘기노스코’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예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제자들)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요한복음10:25)

 

저 말씀에 나오는 ‘알다’가 모두 ‘기노스코’입니다.

성령을 통해 체험적으로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영적 동침의 관계’를 현재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지식이 참 지식이자 참 기쁨이자 산 생명이라는 것. ‘부활(復活)의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 따라서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인 내 안에서 내 ‘영적 남편이자 주인’으로 늘 현존(現存)하고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한 마디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 그러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세상도 죽음도 넉넉히 이기고,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영원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복된 삶을 사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메멘토 모리’의 해법이자 그 유일한 해답입니다.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내지 비판적 지식일수록 더 지성적으로 보이고 더 고상하게 보이고 더 대중적 상품화의 인기도 높아지는 것이 세상의 풍조입니다만, 그런 유형의 세상 각종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휩쓸려 미혹되거나 표류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끝이 허무한 사람의 지식이나 권세나 교훈이나 화려한 문화 등의 세상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그것이 우리를 진정으로 복되게 살리는 길도 아니고 답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온전한 사람’의 길

곧 ‘참 사람’의 길, ‘온전한 인격 완성’의 길,

저 완덕(完德)의 길이자 푯대로 인도하는

영원한 해답을 다시금 확인해봅시다.

우리를 하늘의 복으로 인도하는

초월적 해답을 거듭 확인해봅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고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에베소서4: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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