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성자' 이현필의 '헌신짝'의 삶

이형선 2015. 10. 26. 10:50

 

 

저는 한국교회와 저를 포함한 기독교인

개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관이 세속 일반인들의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이 없다, 이렇다 하게 구별되는

그 무엇이 없다는 등의 비판이나 구설에 직접 내지

간접으로 직면할 때마다 먼저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엄두섭 목사의 저서 제목 그대로

〈맨발의 성자〉이현필 선생이 바로 그분입니다.

근년에는 호남신학대학교 총장인 차종순 교수가

〈성자 이현필의 삶을 찾아서〉라는 저서를 내기도 했더군요.

 

고(故) 이현필 선생은 초교파 내지 개신교 계통의 국내 최초 남녀수도원일 수 있는 남원에 소재한 오늘의 ‘기독교동광원수도회’나 소외된 장애인들을 위한 사회복지법인시설인 광주에 소재한 ‘귀일원’ 등을 창시하신 분입니다.

그곳은 20대 초반의 문학청년이던 제가 그 후 14년 동안이나 살면서 많은 영향과 선한 도전을 받으며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도록 하나님이 인도 및 섭리, 역사하신 ‘광야 훈련’의 도장이자 공부하던 도장이기도 합니다.

 

그 후 보행 장애인인 저는 수도원 사역은 건강하신 분들이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고 또한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召命)을 깨달은 바 있어 상경하여 문서선교 일선에서 ‘기독교 작가’로서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만, 여하간 젊을 때부터 이현필 선생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기도 했던 엄두섭 목사나 당대의 여러 뜻있는 어른들은 그분이 만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후 한마디로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 같은 분이었다고 평가 및 공감했습니다. 사후의 평가가 가장 진실한 평가 아니던가요.

 

제가 그곳에 갔을 때는 이현필 선생이 돌아가신 십여 년 후인지라 저는 그 분을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원장으로 계시던 평양신학교 출신의 고(故) 정인세 선생께 그분에 대한 이런 저런 일화들을 개인적으로 자주 들었고, 역시 직계 제자들이자 수도자인 고(故) 오북환 선생이나 김준호 선생 등이 예배시간을 통해 말씀하시는 일화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당시 제도권 교회는 이현필 선생의 금욕 고행의 삶이나 청빈과 순결의 삶을 텍스트가 아닌 콘텍스트의 문제로 교리적 신학적 운운하며 ‘금욕주의자’라고 지탄 및 비판하기도 했고, 저 엄두섭 목사도 젊은 목사 시절엔 그런 신앙을 비판하기도 했던 것으로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현필 선생의 그런 삶조차도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고자하는 일념에서 나온 치열한 구도 열정이었다는 그 충심을 깨닫고 사후에 ‘맨발의 성자’라고 추앙하며 그의 전기를 집필했던 것이지요.

 

한때 교회 전도사로도 사역했으니까, 목사가 되어 어떤 교단이나 교파에 소속되어 사역을 했다면 보다 유명해지고 보다 대접받으며 큰일도 할 수 있을 만큼 그분은 남다른 ‘카리스마’ 곧 ‘성령의 은사’를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심지어 천주교 쪽에서도 ‘기인(奇人)’이자 ‘바보’이자 때론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 같은 이현필 선생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그분은 주님께 부르심 받은 그 모습 그대로 사역했습니다. 특정 제도권의 교파나 교단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본받아’, 치열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는”(마태복음16:24) 영성의 삶, 사심 없는 헌신의 삶을 살다 가신 ‘그리스도의 참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현필 선생도 인간인지라, 시행착오(?)의 삶도 있었습니다. 그분이 ‘금욕 고행주의자’라고 외부로부터 비판받은 면모 같은 불필요한 오해가 그것인데,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진정한 면모를 알기 위해 역시 엄두섭 목사가 ‘이현필 소전, 문집, 필담, 일기’를 엮은 책인〈순결의 길 • 초월의 길〉에 나오는 이런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접촉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직접 접촉하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 설명을 들어도 시원치가 않습니다. 물속에 잠기듯 사랑에 잠겨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일입니다.

금식하고 절제하는 것도 사랑에 감격되어 해야지요. 고생도 그 사랑에 못 이겨서이고, 고기를 안 먹는 것도 그 사랑이 더 좋아서 안 먹고요, 사치를 안 하는 것도 그렇고요, 정욕을 떠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 은혜에 감격해서 되어지는 일이고, 그 사랑에 끌리지 않으면 모두가 억지짓입니다.-

 

그렇습니다.

봉사도 선행도 절제도 금욕이나 고행조차도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에 진실로 열리고 그 은혜에 젖으면 자연스럽게 살게 되어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저 모든 것이 다 ‘억지짓’이고 그래서 그렇게 고역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래 지속할 수도 없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금욕 고행의 삶 그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제자들이 스승의 금욕 고행의 그런 면모만을 보고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는 삶을 살지 않도록 제자들을 위해 사역 중년기의 병석(病席)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나는 위선자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을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 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아닙니다.”

 

저 '위선자'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이 말년에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 썼던,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여하간 그분은 여러 제자들 및 후학들에게 저 ‘복음의 핵심’이 확실하게 전해지도록 동역자이자 제자인 정인세 선생께 저 말씀을 "종이에 받아 적으라"고까지 당부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전혀 입에 대지 않았던 '고깃국'을 고의적으로 입에 댑니다. 이른바 '파계(破戒)'입니다.

그분 자신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잠겨 금욕 고행의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은혜 받지 못한 제자들이 ‘억지짓’을 하며 율법주의 내지 금욕고행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제자들을 위해, 후학들을 위해 일부러 파계를 한 것입니다. 그만큼 받은 바 은혜가 ‘큰 그릇’이었다는 반증이자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각설하고,

저는 이현필 선생의 삶을 한 마디로 ‘헌신짝의 삶’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과 6․25 전쟁 전후(前後)의 시대에 버려진 가난하고 고통 받는 고아나 과부나 병자 등 지극히 작은 이웃들, 소외된 이웃들을 온 몸과 온 삶으로 섬기며 살다 가신 ‘헌신짝’.

남들이 뭐라고 하든 저도 그런 ‘헌신짝’의 삶을 본받고자 나름대로 조용히 노력하는 사람입니다만 늘 미치지 못하고 늘 부족해서 탈이지요. 여하간 이현필 선생은 실제로 따르던 많은 제자들 곧 수녀들과 수사들에게 “나보고 선생이라고 하지 말고 헌신짝이라고 하시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순결의 길 • 초월의 길〉에 수록된, 그에 관한 일화를 읽어봅시다.

 

-한번은 기차를 타고 용케 자리를 잡았는데,

누가 앞에 와서 자리를 못잡고 서있으니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다른 데 가서 자리를 잡고 있다가 또 양보하고는 밀리고 밀려, 열차의 출입문 밖까지 밀려나가 엉거주춤하고 앉아 있었다. 마침 험상궂게 생긴 한 사람이 자리를 못 잡고 밀려나와 바닥에 앉아있었는데, 이현필을 보더니 곁에 와서 말을 건넸다.

“형씨, 우리 통성합시다.”

“예.”

“형씨, 성이 뭡니까?”

이현필은 시침을 떼고 이렇게 받았다.

“예, 저는 헌가입니다.”

“헌가요? 그래 이름은 뭐라 합니까?”

“예, 신짝이올시다.”

험상궂게 생긴 그 사나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헌신짝, 헌신짝?

 옛기, 여보 그런 이름이 어디 있소?”라고 했다.-

 

다른 일화를 하나 더 읽어봅시다.

 

-경기도 모처에서 농촌 문제를 위한 전국적인 강연회가 개최되었다. 능곡에 사는 이현필의 제자가 보니, 여러 쟁쟁한 강사들이 연단 위에 앉았는데, 그중에 이현필도 끼여 있었다. 다른 강사들은 양복을 입고 안경 쓰고 그럴 듯하게 앉아있었는데, 이현필만은 괴상하고 형편없었다.

헌 무명바지 저고리를 입고 앉았는데, 저고리는 어찌 작은지 팔굽이 나오고 바지도 무릎 위로 올라가 있었다. 게다가 발은 맨발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이현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버젓이 신사들 속에 섞여 앉았다가. 자기 강연 순서가 되니 버젓이 나가서 열변을 토했다.

제자가 알아보니 이현필은 지방에 있다가 강사로 초청되어 올라오는 도중에, 기차에서 고아를 만나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고아에게 입히고 그 고아의 옷을 대신 입고 그 중대한 모임의 강사로 나선 것이었다.-

 

‘여러 쟁쟁한 강사들’ 속에서 걸인과 진배없던 고아의 작은 옷을 대신 입은 채 좌정해있는 저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실로 ‘기인(奇人)’의 모습이자 ‘헌신짝’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식이나 체면이나 지성 운운하며 허세에 잡히기 쉬운 속물인 우리로서는 좀체 흉내 낼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현필 선생의 저런 삶은 위선적 혹은 과시용의 ‘일회성 이벤트’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일생의 삶 자체가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헌신짝’의 삶이었다는 것. 그래서 되레 어려운 이웃 누구의 발에나 헤프게 신겨질 수 있는 ‘섬김의 삶’이자 ‘자유의 삶’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신짝’ 곧 ‘신’의 정체성이 뭡니까?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사람의 발을 섬기는

‘종’ 아닙니까. 발을 보호하고 살리는 ‘종’ 아닙니까.

그것도 ‘새신짝’이 아닌 ‘헌신짝’이라면?

물론 사람들은 누구나 ‘헌신짝’이 되기를 싫어합니다.

헌신짝처럼 버려진 인생은 실인즉 비참합니다. 쓸모없는 ‘헌신짝 인생’ 그 자체는 결코 자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스스로 ‘헌신짝’이 되어버릴 수만 있다면, 그런 ‘나’는 누구에게 쓰임을 받아 신겨져도 좋고, 쓰레기통에 버려져도 좋습니다. 신겨지면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요, 버려지면 그것조차도 주인 혹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유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심오한 영성(靈性)에의 열림이자 ‘그리스도의 자유’에의 깨달음이 과연 거기 있습니다.

실인즉 이현필 선생은 버려진 병자들을 섬기는 과정에서 옮은 폐병과 후두결핵으로 인해 말년에 성 프란치스코처럼 모진 병고를 앓다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만, 임종시 “오 기쁘다! 기쁘다!”라고 연방 하늘을 향해 소리 지르며 가셨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의 열림이자 참 자유인의 탄성이었다고 저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편,

‘헌신짝’에 대한 ‘국어사전’의 해설인즉 이렇습니다.

-오래 신어서 낡거나 못 쓰게 된 신발이라는 뜻으로,

 값어치가 없어서 버려도 아깝지 않은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따라서 이현필 선생의 저 ‘헌신짝’이라는 고백을 성경적 언어로 풀어보자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을 했을 뿐인 무익한 종”(누가복음17:10)이라는 신앙고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베소서3:8)라는 자기 정체성의 고백과 같은 맥락의 말씀이자 진실로 ‘하늘의 복’이 있는 심령의 겸손과 평안과 자유에의 경지 그 열림이자 발견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slave)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20:26-28)

 

저 ‘대속물(代贖物)’ 곧 헬라어 ‘뤼트론’은 종이나 죄인 등을 대신 구원해주는 ‘몸값, 속전’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죄인인 인간 너희들의 ‘몸값’을 대신하는 ‘희생양’이 되기 위해서 온 것이다”라는 선포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만이 아니라 ‘제자’인 너희들도 나를 본받아 그런 ‘종의 삶’을 살라”는 강조의 말씀인 것입니다.

‘희생양’이나 ‘종’의 삶이 어떤 삶입니까? 미천한 ‘마구간’에서 시작해서 ‘십자가’에서 끝난 예수 그리스도의 '비움과 낮아짐(*케노시스)'의 삶 자체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낮은 자리에서 낮은 마음으로 섬기는 ‘헌신짝’의 삶과 같은 맥락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억억(億億)’이 능력이 되고,

‘스스로 배부름’을 자랑하는 시대가 되어갈수록,

‘헌신짝’ 같은 의인(義人)이 진실로 그리워집니다.

저런 의인이 단 몇 분만 살아계셨다면 오늘의 기독교 신앙풍토가 이토록 ‘속물들이 설쳐대는 어둠의 때’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싶기 때문입니다.

하긴 저 자신부터 그렇게 ‘세상의 빛’ 내지 ‘세상의 소금’이 되는 삶을 현재적이자 실존적으로 살지 못하고, 과거적인 저 ‘성인’ 저 어른의 삶만을 그리워하고 말하고 있는 이런 행태 자체도 죄송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성령의 은혜나 은사나 그 분량이나 분수도 각각 다른 법이고 보면,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우리의 중심 그 자체를 하나님은 부족한 대로나마 또한 기뻐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산 지혜이자 역설의 비결이 되었기에 저도 예나 지금이나 각별히 좋아하고, 사도 바울의 또 다른 고백 같다 싶기도 한 이현필 선생의 이런 말씀을 함께 묵상해봅시다.

 

-언제나 언짢은 일을 좋아하게 하소서.

 궂은일을 즐겨하게 하소서.

 쓴 것을 달게 여기게 하소서.

 대접받는 일을 중심으로 싫어하고

 핍박과 수치와 천대를 꿀처럼 달게 여기고

 악평과 훼방을 금싸라기 같이 여기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여, 비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