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 톨스토이가 쓴 민화(民話)에
이런 단편적인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톨스토이가 길을 가고 있는데
거리에 앉아 구걸하는 한 걸인이 한 푼
도와달라고 애걸하며 손을 내밉니다.
톨스토이는 호주머니를 뒤져봅니다.
그러나 하필 돈이 없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정말 미안한 듯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여, 내게 지금 당신을 도울 수 있는
돈이 없구려. 용서하시오.”
그러자 걸인이 의외로 이렇게 받습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형제’라고
불러준 것이 돈을 준 것보다 더 기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돈이나 떡만으로 인간관계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한마디 진실한 말, 한마디 겸손한 말, 한마디 사랑의 말이나 미소로도 선한 인격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근년에 미국카네기연구소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조사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성공하는데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은 15% 정도의 영향을 주었을 뿐이고, 나머지 85%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것이었다”라고 했는데, 저기서 말하는 ‘인간관계’는 어떤 관계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인격적인 ‘신뢰관계’를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그럼 신뢰관계보다 더 진솔한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사랑의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맥락에서 저 톨스토이의 일화를 인간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통찰했던 유태인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지론으로 풀어봅시다. 나치의 박해로 인해 독일을 떠나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고, 원수(?) 내지 적대관계인 이스라엘과 아랍의 평화적 만남과 공존을 유언처럼 역설하기도 했던 마르틴 부버 교수는 잘 알려진 그의 저서〈나와 너〉에서 인간이나 국가를 포함한 모든 관계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목적관계이자 비인간적관계인 ‘나와 그것’의 관계’, 인격관계이자 사랑의 관계인 ‘나와 너’의 관계가 그것입니다. 따라서 톨스토이와 그에게 돈을 구걸한 저 걸인의 관계는 ‘나와 그것’의 관계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다만 돈이나 물질이나 상품이나 노동력 등 ‘그것(事物)’으로 보이거나 그것을 위한 수단으로 보이는 목적관계라는 것입니다. 저기서 톨스토이가 걸인의 부르짖음에 무관심하고 그냥 지나쳤다면 피차 ‘그것과 그것’의 관계가 되었겠지요.
그러나 톨스토이는 ‘지극히 작은 이웃’을 도와주고 싶었으나 당시 소지한 돈이 없었습니다. 그냥 지나쳐도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걸인을 ‘형제’라고 부르며, 돈이 없어 돕지 못한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톨스토이는 저 걸인에게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가 두려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심령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고, ‘사랑(博愛)’이라는 ‘영원한 너’이자 ‘위대한 너’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신(God)’이 살아있었다는 것. 따라서 바로 그 ‘신’이 걸인에게 용서를 구하도록 간섭하신 것이겠지요. 실정법으로는 죄가 아니지만, 신앙인의 ‘양심법’으로는 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양심법’에 의하면, 피를 흘리는 행위적 살인만이 살인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입니다. 행위적 간음만이 간음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음란한 생각을 품는 것도 간음’입니다. 그렇듯 성경의 양심법에 의하면,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해 무관심 내지 비정한 행위 자체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구함도 필요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했던 돈을 얻지는 못했지만 비루한 걸인인 자기에게 ‘형제’라고 부르며 ‘용서’를 구한 톨스토이의 마음을 마음으로 받을 수 있었던 걸인도 소중한 인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그것’으로 시작한 저들의 관계는 ‘그것과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피차 인간성 내지 사랑의 인격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나와 너’의 관계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경우나 상황이야 다르겠지만 저런 관계는 타인 내지 이웃간이나 집단간이나 국가간의 관계는 물론이고, 심지어 ‘한 몸’인 부부간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과 그것’이 되거나 ‘나와 그것’이 되어 이혼하고 헤어지는 경우도 다반사이니까요. 오늘 우리가 만나고 대하는 그 누군가와의 관계는 과연 어떤 관계일까요? 다만 이기적인 목적관계인 ‘나와 그것’의 관계는 아닐까요?
우리가 주목할 것은 ‘나’는 고상하고 유식한 인간이자 인격이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너’를 일개 물건이나 일하는 짐승이나 돈 버는 기계처럼 ‘그것’으로 취급하는 인간이라면 그런 ‘나’ 역시 실상은 일개 ‘그것’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작금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곤 하는 사주(社主)와 노동자나 입점업체나 하청업체와의 관계, 상사(上司)와 부하 직원의 관계 등 이른바 ‘갑을(甲乙)관계’가 바로 그런 사례가 될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힘이 약한 ‘을’을 무시하고 착취하는 ‘갑’이라면 그런 자들은 ‘을’보다 더 못된 ‘그것’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현재적으로 아무리 금실이 좋은 부부간이나 이웃간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그런 ‘나와 너’의 관계는 내일 어떤 어려운 사건이나 상황이니 견해 내지 성격차이나 이해득실(利害得失)에 따라 어떻게 변할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 이미 타락한 인간의 성정 내지 성품은 태생적으로 이기적이고 차라리 간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부버는 그런 ‘나와 너’의 관계를 ‘불안한 관계’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인격으로 믿어주고 당신이 나를 인격으로 믿어주어도, 그런 우리 사이에서는 언제나 그 인격적 관계가 깨질 수 있는 긴장이 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너 사이에는 언제나 이 인간관계를 중매하는 하나의 촉매자가 필요하다.-
저 ‘하나의 촉매자’를 마르틴 부버는 ‘영원한 너’라고 언급했습니다. 철학의 언어들은 늘 난해하고 구름처럼 모호합니다만, 쉽게 말하자면 ‘나와 너’의 관계를 항구적으로 지켜주는 ‘절대 촉매자’ 곧 ‘절대 존재’가 필요하다는 의미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그것은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했던 ‘절대 타자(Absolute Other)’이신 하나님이자 ‘초월적인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실인즉 ‘나와 너의 사랑’이나 ‘나와 이웃의 사랑’의 관계가 현재적으로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내일 어떻게 변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은 현실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와 너의 사랑’ 내지 ‘나와 이웃의 사랑’ 그 관계를 중심에서 지켜줄 수 있는 ‘촉매자’이신 ‘절대 타자’가 절대 필요합니다. ‘영원한 너’이자 ‘위대한 너’를 중심에 모시고 살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나’도 하늘나라와 우주까지 품을 수 있는 ‘위대한 나’이자 ‘영원한 나’이자 ‘선(善)한 나’가 될 수 있고, 그래야만 ‘너’도 그렇게 ‘위대한 너’이자 ‘영원한 너’이자 ‘선(善)한 너’가 될 수 있고, 그런 ‘나와 너’가 만날 때 비로소 사랑의 인격관계가 성취 및 완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 및 강조하고 있는 심오한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막말로 하나님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되레 영적 피조물인 인간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럴 때 ‘나의 자녀’인 너희들이 진실로 행복할 수 있다는 ‘아버지 하나님’의 배려이자 그 비밀의 계시인 것입니다. ‘한 몸’인 부부나 가족도 교회도 공동체도 사회도, 서로 ‘나와 너’의 사랑의 인격관계를 이루며 살기 위해선 먼저 ‘위대한 나’이자 ‘영원한 나’이자 ‘절대선(善)’인 ‘하늘에 있는 나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인간 우리의 ‘사랑’이나 ‘지식’이나 ‘인격’은 이기적인 자기중심이나 자기한계에 머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늘 안식(安息)과는 거리가 먼 ‘불안한 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분수이자 실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22:37-40)
누군가는 또한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라는 것인가?
물론 ‘영(靈)이신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말씀’은 눈에 보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늘 현재적으로 눈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 곧 ‘성육신(成肉身) 사건’을 통해 인격(人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눈에 보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사랑해야 할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부부나 가족간의 사랑도 이웃간의 사랑도 ‘위대한 너’이자 ‘영원한 너’인 ‘주 안에서’ 해야 할 심오한 이유가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인간 상호간의 모든 사랑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보다 ‘큰 믿음 큰 마음’을 가진 사랑으로 성숙 내지 승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라는 인격관계는 한마디로 거룩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기적인 나의 욕심이나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그런 목적관계라면 그것은 ‘나와 그것’의 관계일 뿐입니다.
‘나와 너’라는 인격관계는 그 근원이 남녀관계의 사랑인 ‘에로스’도 아니고, 가족 내지 혈통의 사랑인 ‘스톨게’도 아니고, 친구간의 사랑인 ‘필리오’도 아닙니다.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입니다.
예컨대 ‘에로스’의 사랑 중심의 부부는 남녀간에 어느 한쪽의 매력이나 정욕이 시들면 그 사랑의 관계가 깨지고 맙니다. 그래서 외도도 하고 이혼도 합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 중심의 부부는 고난이나 우환이나 인간적 약함이나 간사함조차도 ‘주 안에서’ 능히 이깁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 자체가 되레 당사자들에게 참 사랑의 관계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는 참 복이 있는 영성의 지혜이자 믿음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는 오늘 우리의 삶은 정작 인격관계를 위한 삶일까요? 다만 ‘내 돈벌이’나 일 자체에 대한 ‘내 성취욕’이나 ‘내 체면’ 등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관계의 삶은 아닐까요?
‘나와 너’라는 사랑의 관계, 타인을 배려하며 공존 및 상생하는 인격관계에 실패한 ‘부자’나 ‘갑(甲)’은 태산 같은 재물이나 위세의 ‘그것’을 얻었다 해도 결국은 허무할 것입니다. 신앙 여부를 떠나서, 인생인 ‘나와 너’는 어차피 빈손으로 죽는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은 결국 ‘사망의 몸’(로마서7:24) 내지 ‘죽음에 이르는 병’에 매인 채 ‘비참한 나’, ‘비참한 너’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만은 분명한 진리이니까요.
초상집에 가보세요. ‘성공한’ 사람의 시체와 짐승의 시체가 무엇이 다르던가요? 그것을 고민해보면서 끝으로, 릭 워렌 목사의 저서〈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에 나오는 이런 내용을 함께 묵상해봅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이나 성취가 아닌,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일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그 관계에 들이는 시간, 에너지 그리고 관심을 줄이려고 한다.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이 급한 일들로 인해 바뀌게 된다.
바쁘게 사는 것은 관계를 맺는데 가장 큰 적이다. 우리는 삶을 영위하고, 일을 하며, 계산서를 지불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삶의 목적인 것처럼 도취되어버리지만 그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다.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삶에서 사랑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가 말했듯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어느 만큼의 사랑을 쏟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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