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제4의 물결'과 '영원한 생명의 물결'

이형선 2015. 10. 5. 10:22

 

 

청년들의 실업률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이미 시대의 고민이자 사회적 숙제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청년실업문제는 딱히 우리나라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주지하다시피 지구촌 경제의 침체나 저성장의 영향에서 오는 문제이자 ‘제3의 물결’인 지식정보화시대가 낳은 일자리 감소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대학교육을 마친 대부분의 청년들이 일손이 부족한 중소기업 등에서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이른바 3D산업을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비판적 시각도 있습니다만, 그런 기피현상조차도 기존 교육의 파행적 결과이자 기성세대의 그릇된 가치관 내지 성공관의 모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난날 자주 방한하기도 했던 저명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 교수가 중앙일간지와의 ‘2006년 신년대담’에서 언급했던 한국의 교육에 관한 이런 내용의 고언이 다시 떠오릅니다.

 

“한국의 산업은 제3의 물결인 정보화시대에 있는데

 교육은 제2의 물결인 산업화시대에 맞춰져 있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가 수백 명의

 학생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똑같은 기능을 가르치고 있다.

 대량생산체제에나 어울리는 이 같은 (공장식)교육체제를

 정보화시대에 걸맞게 창의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혁명적으로 고쳐야 한다.”

 

그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학생들은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는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하루 10시간 이상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실인즉 오늘의 한국 학생들은 유치원시절부터 학교과 학원 등에서 좋든 싫든, 밤낮 가리지 않고 ‘조기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무한경쟁’의 세상을 배우고 있습니다. 기성세대인 부모님과 어른들에게서 그렇게 배우고 있고, 차라리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부모나 어른들 누구도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삶’은 가르치지도 않고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달달 외는 암기와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오직 일류만을 지향하고 신분상승이라는 성공 내지 출세만을 지향합니다. 남보다 ‘높은 자리에서 지배하는 삶’이 성공이자 출세라고 직접 간접으로 세뇌당하고 그런 목표나 푯대가 멍에처럼 의무처럼 메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키운 자녀들이 대학교육까지 마쳤는데 자녀들의 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이상적인 ‘직업’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통찰이 우리 사회에 적중해서 목하 ‘발등의 불’이 되어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앨빈 토플러가 그의 저서〈제3의 물결〉에서 분류한 대로 지금은 ‘제1의 물결’인 농경화사회도 아니고, ‘제2의 물결’인 산업화사회도 아닙니다. ‘제3의 물결’인 지식정보화사회입니다. 그래서 좋든 싫든 지식과 정보를 열심히 배워야만 하고 거기 적응해야만 개인도 국가도 ‘글로벌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앨빈 토플러가 또한 갈파했던 무한정 쏟아지는, 때론 쓰레기처럼 쏟아지는 각종 다양한 ‘지식과 정보의 과부하(過負荷)’에서 오는 시대적 충격과 폐해에도 주목하고 응분의 대비를 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럴 것이 앨빈 토플러는 1970년에 발표한 그의 저서〈미래의 충격(Future Shock)〉에서 오늘의 지구촌 현상을 이미 이렇게 예견했으니까요.

 

-미래의 충격은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변화에 시달림으로써

 개개인에게 유발되는 지나치게 충격적인

 스트레스와 방향감각의 상실(disorientation)이다.-

 

과연 그렇습니다. 낯선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문화 충격’을 겪듯이 오늘을 사는 우리는 너무 빠른 시간에 너무 많이 변하는 디지털 문화에 시달리며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사이버 영역인 인공지능과 자동화 등으로 인해 일자리는 날로 감소하고 그래서 청년들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청년들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아날로그 세대인 어른들은 디지털 세대인 자녀들의 지식과 정보를 모릅니다. 그래서 서로 가치관도 다르고, 삶의 방식도 다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의 괴리와 간극과 불통은 외국인과의 그것처럼 심화되어갑니다. 날로 사랑의 소통이 단절되어 ‘비정한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청년들은 앨빈 토플러가 강조하는 이런 말을 또한 각별히 유념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는 노인을 공경하고 정직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사회는 병원에서 일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 사회는 그저 인식적인 면뿐만 아니라, 감성적이며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모든 재주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데이터와 컴퓨터만으로는 이 사회를 결코 유지할 수 없다.”

 

물론 지구촌 세상은 시각을 다투며 날로 변해갈 것입니다.

이른바 ‘제4의 물결’이라는 더욱 인공지능화되고 고도화된 지식정보사회의 디지털 문명은 사이버 공간을 통해 지구촌을 하나의 웹으로 연결해서, 역시 앨빈 토플러의 표현처럼 ‘보이지 않는 부’와 ‘보이지 않는 시장’을 더욱 형성해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인간 내지 인격관계나 공동체의 형성과는 분명히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개인주의 내지 이기주의에 의한 고도의 지식정보 자체가 ‘권력’이 되어 군림하는 무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고도의 과학으로 인공지능화 내지 정보화되면 될수록 상대적으로 인간이나 인간의 존엄성은 파괴되고 해체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부 과학자들이 고도로 인공지능화된 로봇의 개발은 금지해야한다고 역설하는 것도 그 단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고도의 인공지능이나 디지털 문명이 핵무기처럼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격관계를 되레 위협하는 파괴적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4의 물결’은 또한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이 빚어낸 인간 중심의 다원주의나 다양성이나 상대성을 더욱 극대화시키겠지요.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성이나 유일성을 떠난 인간은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안식을 맛보지는 못했습니다.

“신(神)은 죽었다”며 ‘신의 자리’를 인간 중심의 ‘초인(超人)’으로 대신하고자했던 철인 니체도 결국엔 미쳐서 축었고, 스스로 ‘초인’이 되고자했던 히틀러도 결국 ‘홀로코스트’의 살인마가 되어 불행하게 죽었습니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동원되어 전장(戰場)에서 살상의 허무를 앓으며 죽어야했던 그 시대 청년들의 삶도 불행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밀려오고 있는 ‘제3의 물결’이라는 지식정보사회와 ‘제4의 물결’이라는 포스트지식정보사회가 인간의 심령(心靈)을 그저 컴퓨터나 로봇처럼 물질화 내지 기계화시키고, 전쟁의 무대처럼 황폐화시킬 수 있다는 그것에 주목하고 또한 경계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저 ‘물결’이 인간성이나 인간의 존엄성을 대량 학살하는 저 니체나 저 히틀러의 현대판 다른 얼굴이자 다른 모습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럴 것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역시 저 물결이 이는 ‘세상이라는 전장’에서 살아야만 할 청년들의 자살률이 실업률과 함께 또한 날로 높아가는 데서 그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돈이나 떡만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경제나 지식정보만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3의 물결’이나 ‘제4의 물결’이 우리에게 ‘충격’이자 적응해야할 시대의 불가피한 상황일 수는 있어도, 영원한 시대의 가치나 물결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니라는 것. 시대에 따라 변하는 저런 ‘물결’ 자체가 우리를 진정한 행복이나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인 컴퓨터를 만든 빌 게이츠나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를 만든 스티브잡스는 잘 알면서, 인간 자체나 자연의 만물 자체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그런 사람이 과연 유식한 사람일까요? 능력이 있어 행복한 사람일까요? ‘하늘’은 모른 채 ‘지구촌 개구리’처럼 제 멋의 한계를 살다가는 실인즉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은 아닐까요? 

유태인이나 이스라엘에 대한 선입감이 좋든 나쁘든,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 중 유태인 수상 비율이 35%를 차지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지구촌의 경제이론을 주도하고 거기 공헌하는 노벨경제학상 분야에선 무려 65%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을 알 때 창의적인 교육, 상상력과 사고력을 키우는 교육이 실현될 수 있다는 이 증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알 때 비로소 금세와 내세를 포괄하는 참 꿈과 비전을 가진 참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태인은 아니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거대한 산'이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에 나타난 세상의 물결을 따라 살면서 방황했던 그의 청년 시절에 관한 고백 한 구절을 들어봅시다.

 

-그때 나는 명예와 돈과 결혼을 열망하고 있었고,

 당신은 나를 보고 웃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욕망을

 추구해 나갈 때 나는 아주 쓰디쓴 곤경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그 곤경을 통해 크게 역사하셔서

 내가 당신이 아닌 다른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안식은 오직 하나님의 품안에 안길 때 비로소 온다”는 내용의 체험적 고백입니다. ‘영(靈)이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곧 영적 피조물로 창조하신 본래적 인간의 창조원리부터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명예나 돈이나 결혼’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구하라”는 것.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저 모든 세상살이의 필요를 더해주신다”(마태복음6:33)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창조주 하나님 및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의 물결을 구하면, 세상의 저 ‘제3의 물결’도 ‘제4의 물결’도 능히 이기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이나 바다의 풍랑이나 물결조차도 말씀으로 '꾸짖어 아주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이가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마태복음825-27)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것이 진정한 인생의 해법이자 비밀한 구원의 해법입니다. 파고가 높고 충격이 큰 제3, 제4의 ‘물결이 배를 뒤덮는’ 상황에서 제자들은 아니 오늘의 인생 우리들은 무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무시는 예수’를 깨우며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아우성을 지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로 사랑하는 제자들을 교육시킨 주님의 공생애 교육 방법입니다.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세상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광야 훈련'이자 낮은 자리에서의 현장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그런 세상의 현장에서 또한 구원의 체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의 물결도, 세상의 물결도 순종하는가?!”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인간 개개인과 우리(We)를 위한 참 구원과 성공과 행복과 안식의 길은 그리고  그 교육도 해법도, 오직 세상의 각종 ‘거센 물결’이 이는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영원한 생명 자체이자 그 물결이신 그리스도의 영성의 비밀에 대한 앎과 믿음에 있다는 그것이 우리의 인생 선배들이자 신앙 선배들의 참된 지혜이자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타락했다"는 기독교를 위해서도 아니고, "세속화 되었다"는 어떤 목회자들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자 '생명의 관계'이자 '사랑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저는 물론이고 이 글을 읽는 '바로 그대' 역시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 내지 비판적인 이 시대의 풍조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물결'을 타고 세상의 물결을 넉넉히 이기는 진실한 그리스도인,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영생(eternal life)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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