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충절들의 '님 향한 일편단심'

이형선 2016. 1. 11. 10:42

 

 

반정에 성공해서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그 세조를 폐위시키고 다시 옛 왕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반정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양심 세력을 우리는 ‘사육신(死六臣)’이라고 부릅니다.

그 중 한 사람인 성삼문에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과 배신감도 컸던 세조는 국문현장에서

이렇게 탄식의 일성을 토로합니다.

“네가 나의 녹을 먹으면서 나를 배반하는 모의를 하다니?!”

그때 성삼문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나는 상주(上主)의 신하로서 상왕을 복위시키고자 했던 것이오. 내가 나으리의 신하가 아닌데, 어찌 배반이니 역적이니 할 수가 있단 말이오. 나으리가 준 녹은 한 톨도 먹지 않고 그대로 내 집 곡간에 있으니 뒤져보시오. 나는 상왕을 위해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이니 어서 죽여주시오.”

격노한 세조에 의해 성삼문의 온 몸은 불에 달군 쇠로 단근질을 당해 처참한 만신창이가 됩니다. 그리고 큰칼을 쓴 채 처형장으로 끌려갑니다.

 

제가 여기서 주목해보고 싶은 대목은 그 다음입니다.

그 정도로 잔혹하게 세조에게 당했으면 오기나 감정에 사무쳐서라도 세조에게 원한이나 적개심을 품을 법도 합니다. 그러나 성삼문은 세조를 원수처럼 적대하며 저주하거나 원성 내지 막말을 내뱉지 않습니다. 동지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따라오는 주위 사람들에게 되레 이렇게 당부합니다.

“그대들은 새 임금을 도와 천하를 태평케 하라. 나는 옛 임금을 뵈러 지하로 간다.”

 

과연 그는 큰 선비이자 큰 정치인입니다. ‘충절(忠節)’입니다. 나는 문종과 단종으로 이어지는 상왕(上王)의 부르심을 받은 신하로써 내 몫의 길을 가지만 그러나 정작 ‘큰 길’은 ‘내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태평’ 곧 나라와 민족의 ‘평안’에 있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그래서 그대들은 “새 임금을 도와” 열심히 살라는 것입니다.

저기서 권력이나 패권적 차원이 아닌, 인격적 내지 인품 됨됨이의 차원에서 보자면 정작 이긴 자는 누구일까요? 저는 ‘세조’가 아닌 ‘성삼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작 치욕을 당한 자는 세조라고 생각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저 말을 전해들은 왕 세조는 내심 이렇게 생각했을 법도 합니다. ‘성삼문, 네가 나보다 더 큰 사람이자 의인이다. 너 같은 충절을 신하로 둔 왕은 비명에 죽어도 행복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상대적으로 오늘의 ‘정치판’을 위시한 세상은, 사람들이 다투어 돈이나 권력의 종이나 노예로 전락해 간다 싶습니다. 이기적인 자기 잇속이나 실속을 챙기기 위한 치열한 경쟁 내지 투쟁이나 그것을 위한 기회적 처세가 되레 유능한 능력으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자본주의’ 세상이니까 ‘자본’이 행세하기 마련이겠지만 그러나 사람을 위한 자본이지 자본을 위한 사람의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되잖아요. 사람이 ‘돈’이나 ‘떡’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딱히 군신(君臣)간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관계 및 남녀관계에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충절(忠節)이나 청렴(淸廉) 같은 미덕이 박물관에 안치되어버린 사회는 되레 그만큼 인간성이나 윤리성이나 인간의 존엄성이 메마르고 각박해진 불행한 사회라는 반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또 다른 대표적 ‘충절’이었던 고려말기의 선비 정몽주의 저 유명한 ‘단심가(丹心歌)’를 다시 묵상해봅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물론 정몽주의 저 ‘님’은 주지하다시피 ‘고려왕조’를 의미합니다. 역성(易姓)혁명이나 개혁을 반대하고, 기존 왕조의 체제 및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대쪽 같은 절개나 지조가 ‘일백 번’ 죽음조차 뛰어넘는 ‘일편단심’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럼 오늘 우리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의 대상인 ‘님’은 과연 누구일까요?

연인? 남편? 아내? 자녀? 가정? 직장? 조국? 다 좋겠지요. 그러나 저는 저 모든 인간 및 사회관계를 진실로 복되게 살릴 수 있는 참 생명과 참 행복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저는 저 ‘님’을 신앙인격의 관계이자 차원에서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그럴 것이 금세와 내세의 생사화복을 다스리는 영원한 왕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님 향한 일편단심’이 금세만 알았던 저 정몽주 선생보다 더 못하다면 그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님’이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기득권에 연연하는 유태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와 사주에 의해 체포되어 로마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 심문을 당한 끝에 결국 180kg 정도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의 땅 골고다에 오르셨습니다. 고통스러운 처참한 죽음을 목전에 둔 그리스도께선 그때 울면서 뒤따르는 ‘큰 무리’를 향해 되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누가복음23:28)

 

나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처형의 자리에서는, 자신에게 침을 뱉으며 모욕하고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손과 발에 대못을 박아 죽이는 ‘저들의 죄악’을 되레 용서해 달라고 이렇게 위하여 기원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23:34)

 

저기서 권력이나 패권적이 아닌, 인격적 내지 영원한 생명의 차원에서 이긴 자는 누구일까요? 저기서 정작 조롱과 치욕을 당한 자들은 누구일까요?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다. 정작 조롱과 치욕을 당한 자들은 가해자들인 종교권력자들과 정치적 권력자들과 유태인들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긴 자는 되레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저 말을 전해들은 당대 대제사장들이나 로마 총독 빌라도 등도 역시 내심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십자가 현장을 지켜본 로마군 장교 ‘백부장’의 실토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누가복음23:47)

 

그러나 진정한 ‘예수 이해’는 “정녕 의인(a righteous man)이었다”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거기서 끝나서도 안 됩니다. 거기서 끝나면 저 유가(儒家)의 선비인 ‘의인’ 성삼문이나 정몽주의 죽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저들과 다른 것은 생전시 그분이 또한 말씀하신 그대로, “죽은 후 사흘 만에 부활(復活)하셨다”는 것입니다. 저 ‘의인’ 정몽주나 성삼문 같은 이름의 부활, 명예의 부활이 아닙니다. 영과 육의 온전한 부활 곧 ‘전인적(全人的) 부활’이자 ‘신령한 부활’입니다.

따라서 그런 예수 그리스도는 저 성삼문처럼 ‘상왕(上王)’ 곧 “옛 임금을 뵈러 지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흑암의 세계인 무덤이자 땅의 세계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지하’ 곧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상왕’ 곧 ‘아버지 하나님’을 뵙고자 ‘승천(昇天)’하십니다.

 

물론 인류 역사상 ‘죽음의 권세’를 이긴 인간의 전인적 부활이자 신령한 부활과 승천의 사건은 전무후무한 기적 그 자체이지만, 그래서 되레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세상에 오신 메시야’라는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증명이자 증언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예수 이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비신화화(非神話化)’나 ‘역사 비평’ 운운하는 ‘유식한’ 현대 자유주의신학자들은 성경 속에서 말씀하는 부활이나 승천 등의 신비사건을 믿지 않습니다. 신약시대의 ‘사두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저 예수의 죽음도 저 성삼문 유형의 여느 ‘의인들’의 죽음과 다 같은 유형의 죽음 정도로 취급합니다. 그리고 사후에 ‘의인’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한다는 그 자체를 ‘진리’이자 ‘복음’으로 여깁니다. 하긴 저도 청년 시절엔 그런 식으로, 인간의 이성 중심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삼각산에서 기묘한 성령 체험을 하고난 후부터 가치관이나 우주관의 중심이 확 뒤집어지면서 성경의 신비 사건들이 액면 그대로 믿어지더라고요.

성경은 인본주의 유형이나 영혼과 육신을 이원화시킨 영지주의(靈知主義)의 ‘가현설(假顯說)’ 같은 ‘예수 이해’를 ‘거짓복음’ 내지 ‘다른 복음’이라고 정의하며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미혹으로 인도하는 그릇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실인즉 그렇습니다. 부활과 승천이 없으면 기독교도 없습니다. 부활과 승천이 없으면 오순절의 성령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행전’인 ‘사도행전’도 없고, 초대교회도 없고, 오늘의 교회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헌신도 순교조차도 다 헛것입니다. 교회도 개개인의 신앙도 인간들의 인본주의적인 지식이나 힘이나 의지나 열심만으로 성사되는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인간적인 자기 힘이나 의지나 열심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와 함께 죽겠나이다”라고 호언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체포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집 뜰에서 심문 당하실 때, 그는 “예수를 모른다”고 닭 울기 전에 세 차례나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고 맙니다. 그토록 ‘비겁하고 못난’ 수제자 베드로.  

그러나 그런 그도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은 후 놀랍도록 ‘담대한 사도’로 변화됩니다. 성령 충만한 그가 증언했던 것은 인간 자기의 대단한 신령함이나 열심이나 의지나 지식이나 능력이나 선행이나 공적이나 수행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종이자 일꾼으로, 오직 보고 듣고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증언 및 선포할 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부활을 통해 예수께서 인류의 메시야 곧 구원자 되심 곧 ‘생명의 주’ 되심을 증명하신데 대한 증언을 했을 뿐입니다. ‘수제자’라는 인간 ‘자기의 증인’이 아닌, ‘왕중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일편단심 일관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진정한 ‘예수 이해’이자 진정한 ‘예수 복음’입니다. 베드로의 ‘증언’을 다시 들어봅시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the author of life)’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사도행전3:14-15)

 

저 ‘증인’ 곧 헬라어 ‘말튀스’에서 ‘순교자(martyr)’라는 단어가 유래되었습니다. 따라서 ‘순교자적 증인’을 의미합니다. 조작된 거짓말을 증언하려고 순교까지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부활, 승천하지도 않은 그리스도를 신격화시키려고 순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한두 사람도 아니고, 사도들 모두가 죄다 순교할 수 있을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초월적 부활 및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는 처참한 순교라는 죽음에의 공포나 두려움조차 이긴다는 것.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풍파를 “넉넉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로 그 길을 따른다면 ‘님 향한 일편단심’을 가진 저 충절들처럼, 아니 그 이상의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에 열린 저 ‘증인들’처럼 순교자적 각오를 가지고 확실하게 그리고 ‘뜨겁게’ 믿고 따라야 할 터인데 기실 저부터도 걱정입니다. 그럴 것이 ‘미지근한 신앙’은 세상에서도 하늘나라에서도 ‘토하여 버려지는’, 어중간한 ‘회색분자’ 신세가 되기 마련이니까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요한계시록3: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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