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 밤에,
EBS(교육방송) TV에서 방영했던
영화〈파계〉를 시청했습니다.
캐더린 흄의 베스트셀러 소설
〈The Nun's Story(수녀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이고,
대장암을 앓다가 1993년에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던
‘청순한 이미지’의 명배우이자 영어 불어 독어 등
대여섯 개국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던 ‘인도주의자’
오드리 헵번이 주연을 맡은 영화인지라 보다
관심을 가지고 밤늦게까지 시청했습니다.
영화의 대략 줄거리인즉 이렇습니다.
주연인 ‘가브리엘’은 벨기에의 유능하고 저명한 의사의 장녀입니다. 그녀는 유복한 집안에서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지만 그러나 연인과의 사랑은 불행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의 어머니가 ‘정신병자’였기에 관계가 꼬여서 결혼할 수 없는 비련으로 귀결된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관계를 비관한 가브리엘은 부모님의 반대를 물리치고, 평소 봉사와 헌신하는 수녀의 삶을 동경하기도 했기에 자원해서 수녀에의 길을 가게 됩니다.
가톨릭 수도원이라는 조직의 엄격하고 까다로운 제도와 규율, 동료 수련수녀들의 시기와 견제 등을 통해 때론 갈등이나 실망이나 고뇌도 하고 억울함도 감수하지만 그러나 가브리엘은 수도원장이 강조하는 ‘순명(順命)’이라는 신앙 미덕을 계속 키워갑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완성’ 내지 ‘완덕(完德)의 길’을 좇는 겸허한 수도자로서의 수련에 충실히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고 힘든 수련과정을 마친 가브리엘은 마침내 공적 서약을 통해 종신수녀가 됩니다.
그리고 당시 벨기에 치하에 있던 아프리카 콩고의 간호사 수녀로 파견됩니다. 모든 환경이 열악한 그 열대지방에서 가브리엘은 헌신적으로 열심히 봉사합니다. 그래서 ‘신도도 아닌’ 까다로운 현지 담당의사나 콩고의 어려운 병자들로부터 호의적인 평가와 칭찬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과로가 겹쳐 폐결핵에 걸립니다. 현지 담당의사의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하지만 그래저래 가브리엘은 결국 본국의 수녀원으로 송환당합니다.
그 무렵, 제2차 대전이 발발하고, 가브리엘은 수녀원에서 종군의사로 전장에 나간 그녀의 아버지가 나치독일군들의 총탄에 맞고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됩니다. 자기가 그토록 사랑했고, 자기를 그토록 사랑했던 아버지가 죽다니? 연노하신 연세임에도 조국과 정의를 위해 전장에 나간 아버지가 독일군의 총탄에 죽다니? 하나님, 왜? 왜? 가브리엘은 기도 및 묵상하며 극심한 갈등을 느낍니다. 세상과는 가치관이 전혀 다른 가톨릭 수도원이라는 거룩하고 엄격한 제도와 규율의 울타리 안에서 그리고 현실적으로 참혹한 세상의 전쟁이나 참담한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수녀’ 곧 ‘그리스도의 신부(新婦)’라는 이름으로 그 모든 것에 대해 순종 내지 순명만 하고 있는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삶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괴로워합니다. 절로 순종 내지 순명이 되지 않았기에 갈등하며 고뇌한 것입니다.
그런 심령을 토로한 가브리엘에게 고해성사를 담당한 지도신부는 “인내하라”고 당부하지만, 인내에 한계를 느낀 가브리엘은 마침내 스스로 수녀복을 벗어버리고 맙니다. ‘파계’를 한 것입니다. 물론 그녀는 세상의 애욕이나 허영이나 미련을 좇고자 수녀복을 벗은 것은 아닙니다. 순종 내지 순명을 강조했던 수녀원 원장이나 신부가 그녀에게 “갈 곳은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가브리일은 주저 없이, 짧게 “예”하고 답합니다. 아버지처럼 전장 일선에서 봉사하는 종군간호사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세상 그 길을 향해 수녀원 정문 앞 좌우가 높은 벽으로 꽉 막힌 좁은 길을 홀로 또박또박 걸어서 나가는 가브리엘의 뒷모습이 인상 깊은 엔딩으로 그려지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자, 그럼 저기서 어느 길이 과연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길일까요?
어느 길이 진정으로 ‘좁은 길’을 가는 삶일까요?
물론 영화에는 그 답이 없습니다. 답은 오직 시청자 내지 관람객 각자의 몫입니다. 그 후, 가브리엘은 혼란한 세상의 전쟁터 그 피 흘리는 현장에 종군간호사로 참전했다가 부상병들을 치료하던 중 그녀의 아버지처럼 나치 독일군의 폭격이나 총탄에 피습당해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세상과 격리된 수녀원의 높은 담 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하며 인내하고 기도하고 있었으면 차라리 생명을 부지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길은 과연 어느 길일까요?
물론 가톨릭과 개신교의 견해 차이는 있겠지만, 참 신은 그런 종파나 교파나 조직의 벽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초월 내지 포용하지 못하면 참 하나님도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말씀을 다시 묵상해 보았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10:)
저 ‘세 사람’ 곧 ‘한 제사장, 한 레위인, 어떤 사마리아인’ 중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성전 사역에 전념하는 성직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직자들은 강도에게 피습당해 ‘거의 죽은’ 가사상태로 버려진 한 행인을 모른 척 외면하고 지나쳐 가버렸습니다. 저들은 이렇게 기도하면서(?) 갔을 지도 모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정체 모를 행인의 부정한 피를 손에 묻히거나 시체를 만져서 제 몸이 불결하게 되지 않게 하소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사랑하기 위해서 제 손과 몸이 성결하게 하소서.’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고 축복하신 사람은 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제 몸처럼 보살펴준 ‘어떤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선민 유태인들이 동족(同族)이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은 혼혈족’이라고 이방인 취급을 하며 멸시 천대하던 ‘사마리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는 왠지 6년 전에 하늘나라로 가신
이태석 신부에 대한 생각이 또한 떠올랐습니다.
아프리카 남수단 오지마을 톤즈에서 의사이자 신부로 7년여 동안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다가 일시 귀국길에 대장암 질환이 발견되어 투병하다가 48세를 일기로 선종하신 이태석 신부. 그는 평소에 저 가브리엘 수녀처럼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삶의 현장에서 봉사 및 헌신하는 성직자가 되기를 소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사라는 전문직에 안주하지 않고 그 후 신부가 되어 내전(內戰)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남수단 오지마을 톤즈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열심히 봉사하다가 암 질환에 걸렸으면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법도 합니다. 가브리엘 수녀가 걸린 저 폐병이나 독일군의 총탄에 죽은 그녀 아버지의 죽음보다 더 절망적일 수 있습니다. 정녕 신은 존재하는가? 정녕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왜? 왜?
여기서 그 답으로 이태석 신부가 직접 작사 작곡했다는 노래〈묵상〉의 가사를 들어봅시다.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 말씀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그렇습니다.
우리의 몫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때론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도 끝까지 순종 내지 순명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자세로 ‘오직 서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사도들이나 성인 성녀들을 위시한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결정적이자 최종적으로 들은 ‘성령의 음성’이자 ‘절대 계명’입니다. 그것이 ‘희생양’이 되어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처참하게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일만 달란트’라는 ‘빚진 자’의 당연한 채무이자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 때론 ‘Why?, 왜?’라는 회의나 불신이나 갈등이나 원망 등의 고뇌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거기 한사코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레 낙엽처럼 허무한 한계를 살다가는 ‘티끌 같은 인생’ 자기의 교만이 되고 그래서 자기의 비극이자 불행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 가브리엘 수녀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신부(新婦)’가 되어 헌신과 순명의 삶을 살고자 공적으로 서원 내지 맹세한 종신수녀인 바, 하나님과의 그 서원 그 언약을 ‘파계’하지 않고 신실하게 지키면서 저 이태석 신부처럼 ‘묵상’을 노래하며 간호사 수녀로 자원해서 전쟁 일선에 종군하는 ‘제3의 길’(?)을 갔더라면, 수녀원에서 독선적인 폐쇄성을 버리고 그런 길을 허락 내지 배려했더라면 하나님이 훨씬 더 기뻐하셨으리라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럴 것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공적 서원 내지 맹세는 자기에게 불리하고 해로울지라도 그대로 지키는 것이 ‘복 있는 자’의 자세이니까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수령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니라.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민수기30:1-2)
끝으로 제가 이 글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저 가브리엘 수녀가 택한 길에 대한 최종 판단 내지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신부나 수녀원장이나 목사나 그 어떤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해서, 인간 우리 모두가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창세기2:17)를 먹고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어’ 특정 인간의 ‘선악’을 함부로 그리고 섣불리 판단 내지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세기부터 금지하신 가장 무서운 교만이자 독선이자 인간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정욕 및 탐욕에 빠지는 ‘뱀’ 곧 ‘교활한 사탄’의 시험이자 함정이기 때문입니다.
피차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진 죄인들인 인간 우리의 몫은 이웃이나 탕자(蕩子)나 탕녀(蕩女)나 심지어 악인이나 원수의 선악조차도 판단 내지 심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종말적 판단 내지 심판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 겸손하게 전적으로 맡기는 그것이 신앙인의 절대 덕목인 참 순종이자 참 순명(順命)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절대선(絶對善)’이자 ‘절대의(絶對義)’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고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누가복음18:19)
따라서 상대적으로 우리의 몫은, 역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웃은 물론이고 심지어 원수조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그런 삶의 실천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곧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선악(善惡)에 대한 ‘거룩한 구별’ 내지 ‘거룩한 분별’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한일서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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