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행복을 가져다주는 황새'를 위하여

이형선 2016. 2. 1. 09:32

 

 

금년 겨울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지구촌 곳곳이 혹한이나 폭설 등 ‘기록적인 한파’로 인해

몸살을 앓았습니다. 기상전문가들에 의하면 이런 극심한

기상이변은 ‘엘리뇨’와 북극의 한기 변화 탓이라고 하더군요.

지구 온난화에서 시작된 기상이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 모든 자연 재앙이 자연 환경 파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미인데, 과연 지구촌 자연 환경과의 관계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다 그 ‘선한(good) 관계’가 파괴되면 결국 자기의

고통, 우리의 고통이 되고 불행이 된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20세기 영국작가 M. 디영이 쓴〈황새와 여섯 아이들〉.

여기서 온 몸이 하얗고 날개 끝의 깃털과 부리가 검은 색인,

우아하고 고상한 황새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새’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황새가 소녀 리나가 살고 있는 바닷가 어촌인 숄러에 지금은

살고 있지 않습니다. 벌써 수십 년 동안이나 오지 않고 있는 것.

그러니까 전설 속의 황새로만 구전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그런 ‘황새’에 관심이 없습니다. 돈이나 권력 등을 남보다 더 많이 차지해서 남보다 더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온통 관심이 있을 뿐,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작 생명이나 평화나 화목의 상징이자 ‘행복을 가져다주는 새’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숙모가 사는 마을에는 황새가 오는데 왜 우리 숄러 마을에는 황새가 전혀 오지 않는 것일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소녀 리나의 제의로 급우인 여섯 명의 아이들과 선생님은 “왜 그럴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마을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우리 마을에 오지 않는 ‘황새’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황새가 오지 않는 우리 마을의 환경을 탓하며 그 요인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네 탓’이 아닌, ‘내 탓’ 내지 ‘우리의 탓‘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집들의 지붕이 너무 뾰쪽해서 황새가 둥지를 틀지 못한다. 숙모가 사는 네스 마을의 집들처럼 지붕에 짐수레바퀴를 얹어주면 되겠다’ 싶어, 리나는 마을에서 가장 연로하신 시브르 할머니를 찾아가 그런 의견을 털어놓습니다. 그때 시브르 할머니는 어린 시절 황새가 살던 숄러 마을의 아름다운 추억담을 들려주면서 이렇게 ‘노인의 지혜’를 들려줍니다.

“이것은 지붕이 뾰쪽한 탓이라고만 생각해선 안 된단다. 나무가 없는 것이라든지, 폭풍우 … 같은 것 등 여러모로 생각해봐야 한단다. 그리고 우리들이 황새에 대해 바르게 알려면 황새라면 어떻게 할까? 하고, 황새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단다.”

 

그렇습니다.

해결의 핵심은 “황새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풀리는 문제입니다. 그 후 ‘황새의 입장에서 생각’을 한 리나를 위시한 아이들의 기특한 노력에 마을어른들도 호응하면서, 마침내 마을에 찾아왔지만 폭풍에 의해 바닷가 모래톱에 처박혀버린 한 쌍의 황새를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리나를 위시한 마을사람들은 그 황새를 정성껏 구조하여 학교 지붕 위에 마련해둔 수레바퀴에 둥지를 틀도록 놓아줍니다. 그렇게 숄러 마을에 다시 황새가 돌아온 것입니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새’가 다시 돌아와 둥지를 튼 것입니다. 감격한 리나가 기뻐서 중얼거립니다.

“우리 마을에 황새가 살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아.”

 

지금 우리 마음, 우리 집, 우리 마을에는

과연 ‘황새’가 살고 있는 것일까요?

전설 속의 ‘황새’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심령의 파괴, 자연 환경의 파괴 등으로 인해

황새는 이미 ‘천연기념물’이자 ‘국제보호조’가 되어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부부 혹은 모든 인간관계의 살벌한 불화나 갈등, 외적으로는 자본주의적 무한경쟁논리,  ‘바벨탑’(?) 같은  대형건설을 위한 대형파괴공학 등으로 인해 이미 설 자리를 잃은 ‘황새’.

자연환경이 죽으면 ‘황새’도 죽고 ‘인간’도 죽어간다고 했지요? 마음의 환경이 죽으면 ‘황새’도 죽고 인간‘도 죽어가는 것이겠지요?

설령 ‘황새’가 모처럼 우리 마을 내지 우리나라에 찾아왔다고 해도, 여야(與野) 내지 보수 진보라는 정치적 이념이나 지역 간의 뿌리 깊은 반목이나 대립, 계층 간의 불화 등의 ‘폭풍’을 맞고 ‘모래톱’ 어딘가에 지금 처박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황새’는 밀물이 닥치면 아예 죽고 맙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심령의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황새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황새’와의 관계도, 인간과의 관계도,

진실로 선하고 복된 모든 관계는 ‘역지사지(易地思之)’ 곧 “서로 입장이나 처지를 바꿔 놓고 생각하는” 그런 선한 마음과 그 배려 그 여유에서 비롯됩니다. 동서양을 포함한 그런 ‘역지사지’의 절정이자 정점이 바로 죄인인 우리를 위해 ‘희생양’이 되어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形像)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로새서1:)

 

그렇습니다.

우리는 ‘역지사지’의 절정이자 정점인 ‘십자가의 비밀’ 곧 ‘대속(代贖)의 비밀’에 열릴 때, 비로소 하나님과 그리고 인간을 위시한 땅이나 하늘에 있는 모든 ‘만물’과 평화 곧 ‘화평’할 수 있고, ‘화목’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비밀, “살아도 평안이요 죽어도 평안”인 영성(靈性)의 비밀이자 구원의 비밀이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대접(*사랑)’하고, ‘남’ 혹은 ‘지극히 작은 이웃’을 ‘네 몸처럼 대접(*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황금률’이라고 일컫는 아래의 말씀 역시 그런 ‘역지사지’의 구현입니다. ‘그리스도의 크고 높고 깊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먼저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고, 이웃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삶이 ‘진실로 하늘의 복이 있는 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먼저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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