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인간의 교만'과 '인간의 절망' 사이

이형선 2016. 2. 22. 11:52

 

 

세상 그 어디에도,

문제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사람 그 누구에게도,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늘 비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세상에서,

나름대로의 어려움이나 고난이나 고통 등의

불행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럴 것이 무덤 속에는 문제도 불행도 없으니까요.

 

직면한 그 문제가 청년들의 취학이나 취업에의 실패든,

중년기의 사업실패든, 중한 병고나 신체장애이든,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이든, 과연 나름대로 크고

작은 불행을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불행이나 위기를 만날 때 심지어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기(危機)가 또한 위태로운 기회”인 것처럼,

인간의 절망(絶望) 또한 절대 소망에의 기회일 수 있습니다.

인간적 내지 세상적 절망을 통해 영원한 소망이자 기회의 주체와

날 때 되레 참 복이 있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심령적 체험’을 통해 깨달은 우리의 인생 선배인,

대문호 톨스토이는 이렇게 간략하게 고백했습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이고,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따라서 저런 삶의 고백을 위해서는 이성이나 지식이나 인간 자기 한계를 확실하게 깨닫고, 하나님과 만나는 진솔한 ‘심령적 체험’ 곧 ‘성령 체험’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나 진정한 신앙 인격 곧 그리스도 인격이 되려면 인간의 태생적인 죄악성과 그로 인한 인간 자기의 무력하고 비참한 정체성 그 ‘자기 한계’를 뼈저리게 절감하고, 대단한 지식인이었던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심오한 자기 성찰 및 통찰과 처절한 절망 내지 ‘거룩한 절망’의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罪)니라.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7:)

 

물론 신학자 칼 바르트는 저 경지를 ‘거룩한 슬픔(Holy Sadness)’ 내지 ‘거룩한 비애(悲哀)’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사망의 몸’이라는 자기 이해 및 자기 선고는 절망 그 자체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하간 여기서 중요한 절대 명제는, 인간 우리의 ‘심령적 체험’이 ‘곤고한(*비참한) 사람’이자 ‘사망의 몸’이라는 저 실존적 절망의 지경 거기서 끝나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대속의 구원자’이신 주님과의 인격적이자 개인적인 만남의 체험 곧 심령 내지 성령의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나의 나 살아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고, 그래서 또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자세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겸손한 종으로써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파스칼은 그의 유작

〈명상록〉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하나님만 알고 인간의 비참을 모르면 교만에 빠진다.

 인간의 비참만 알고 하나님을 모르면 절망에 빠진다.-

 

과연 명언입니다.

타락해서 자기(自己) 중심의 이기적이자 탐욕적이자 정욕적인 존재 곧 ‘비본래적인 존재’가 된 인간의 심령의 세계를 깊이 성찰 및 통찰한 명언입니다. 실인즉 인간은 누구나 자기 비참이나 불행만 알면 절망에 빠집니다. 상대적으로 인간 자기의 비참을 모르고, 이성적 내지 이론적 하나님이나 교리적 내지 신학적 하나님만 알면 ‘지적 교만’에 빠집니다. 객관적 말씀(*로고스)이자 사랑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주관적 자기 믿음이나 자기 체험의 하나님만 알면 ‘영적 교만’에 빠집니다. 그것은 바다의 세계나 그 마음을 모르고 우물 안에 갇히거나 우주의 세계나 그 마음을 모르고 지구촌(*천동설)에 갇히는 삶처럼 실인즉 어리석은 삶이자 교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한계’를 사는 인간 자기의 비참한 정체성과 ‘영원’을 사는 창조주 하나님의 정체성 그 온전한 이해와 만남이 하나가 되어야만 겸손한 신앙인격이자 ‘그리스도 인격’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및 하나님과의 만남의 ‘심령적 체험’을 아울러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7:25-)

 

저렇게 ‘인간의 비참’을 알고

아울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알았던

사도 바울의 체험적 고백과 같은 맥락으로,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역시

그의 ‘심령적 체험’을 고백했는데 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고삼아 주의 깊게 들어봅시다.

 

-역설처럼 보이면서도 진리 중의 진리는, 사람이 스스로 힘쓴다고 해서 선인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죄 가운데 잉태되고, 죄 가운데서 자란 사람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시냇물이 수원지보다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하는 것처럼, 선원이 바람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지와 동작만으로 범선을 조종하려는 것처럼 도저히 바랄 수 없는 (*교만한) 일이다.

 

우리의 구원은 (*죄인인 우리 대신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결되는 데서부터 온다. 그런데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일이지만, 기독교의 복음이 시종여일하게 확신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생애 및 그의 죽음과 죄인인 우리 인생들의 영혼 구원과의 관계는 필수적이며,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인생이 하나님과 일체가 될 수 없으며, 또한 인생이 하나님께 대하여 범한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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