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길(道)을 찾는 나그네와 주모

이형선 2016. 3. 7. 10:25

 

 

대낮인 때문일까. 주막은 한산했다.

국밥을 다 먹고 난 인생 나그네가

밥값을 치르면서 주모에게 물었다.

“이 고을에 길을 물을 만한 목자가 있는지요?”

주모가 좀 수다스럽게 받았다.

“길은 길잡이에게 물어야지 목자 타령 할 건 또 뭐다우.

 이 고을에선 내가 척하면 삼천리우.

 어느 길을 찾수?”

 

나그네가 독백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살 때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고, 죽을 때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삶의 길을 찾습니다.”

주모가 어려운 듯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되레 퉁명스럽게 물었다.

“세상에 원! 죽을 때도 진정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우?

 그런 삶의 길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수?”

나그네는 담담하게 이렇게 받았다.

“그래서 참 목자를 찾는 거지요.

 그 길을 위해 준비된 사람들은 고난이나

 죽음조차도 기뻐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나그네는 괴나리봇짐을 다시 메고 주먹을 나섰다.

그런 나그네의 등을 향해 주모가 소리쳤다.

“목자를 찾는다면, 앞산 너머 안골에 큰 양떼를

 거느린 유명한 목자가 거기 있긴 있수다!”

인생 나그네가 돌아서며 받았다.

“유명한 목자?”

“그 유명한 양반을 모르셔?

 조선 팔도에서 소문난 그

 ‘배부른 목장’을 모르면 간잔디!”

“고맙소. 한 번 가보리다.”

 

나그네는 곧장 산을 넘어 예의 ‘유명한 목자’를 찾아갔다.

과연 그 ‘배부른 목장’에는 꼴이나 물이 좋아서인지 수천수만의 큰 양떼가 살고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목장을 경영하려면 남다른 능력도 재주도 수완도 있어야 한다 싶었다. 물론 나그네의 관심은 그런 외형이나 외식의 문제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그네의 관심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길을 가는 허무한 인생 여정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길’이자 ‘살 때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고, 죽을 때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속사람의 길’을 구하는 문제였다.

 

문득 갈증을 느낀 나그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쯤 골짜기에서 양들이 거기 흐르는 물을 마시고 있었다. 나그네도 그곳으로 가서 양들과 어울려 담소를 나누다가 엎드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여느 산골의 물이 다 그런 것처럼 맑고 시원했다. 그래서 목의 갈증은 풀렸다. 그렇다고 해묵은 심령의 갈증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인생 나그네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목의 갈증이야 여념집 깊은 우물물로도 능히 풀 수 있고, 배의 고픔이야 주막집 국밥 한 그릇으로도 능히 풀 수 있다는 것을.

 

해서 나그네는 자기의 그 해묵은 숙제를 풀고자 목자를 찾았다. 그러나 정작 만나서 묻고 배우고 싶었던 ‘유명한 목자’는 그 모습조차 볼 수가 없었다. 항상 거기 사는 양떼들조차도 친밀한 인격의 관계나 교제는 고사하고 얼굴조차 대면하기 어려운 지경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무대 위에 선 연예계 유명 스타와 관객 사이 같은 그런 선망의 관계나 교제 정도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목장의 양들은 ‘유명한 목자’가 무대 위에서 조석으로 강조 및 선포한다는 소원성취형의 이른바 ‘성공복음’에 이미 길들여져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무한 경쟁하는 세상에서 최고급 양이 되어 최고급 행세를 하며 비싼 값에 잘 팔리는 것이 바로 ‘성공’이자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세상에서 잘 나가는 그것이 성공”이자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그런 ‘복음’이 득세하는 신앙풍토의 목장에선 상대적으로 ‘지극히 작은 이웃’이나 ‘길 잃은 한 마리 양’이나 이런 저런 우환이나 사고 등으로 실패하거나 죽어가는 양들이나 그 가족은 현실 그대로 실패한 인생이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식의 부정적 이해나 인식이 암암리에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온전한 복음’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잘 나가던 ‘부자’보다도 그 부잣집 대문 앞에서 빌어먹던 ‘병든 거지 나사로’가 하나님 앞에서 되레 성공한 신앙인격이자 축복받은 자녀가 되어 ‘낙원’에서 잘 살고 있지 않던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언하신 그 영성의 비밀한 세계 및 그 가치관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올바르게 설파하지 못하면, 그 어떤 복음도 참 복음은 아니고 그 어떤 ‘유명한 목자’도 참 목자는 아니다 싶었다.

 

나그네는 인생들에게 ‘일용할 양식’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눈에 보이는 금세(今世)라는 세상의 소유적 내지 탐욕적인 ‘떡’이나 부귀영화 때문에 진정으로 기뻐하며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럴 것이 산해진미도 사흘 계속 먹으면 질려서 싫어지지 않던가. 미모의 애인과 결혼해도 반년 정도 지나면 되레 다투거나 한 눈 팔지 않던가. 새 집을 사도 그 기쁨은 석 달 채 못가지 않던가. 최고 권좌에 앉아도 그 기쁨 그 생명은 불과 수 년 아니던가. 나아가 초상집에 가면 분명 그 모든 것은 별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허무한 것이었다. 죄다 “헛되고 헛된” 것들이었다.

 

나그네는 그럴수록 세상에 보냄을 받은 인생이 더 늦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인 참 영성(靈性)의 회복 곧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온전한 심령의 회복이자 내세(來世)를 위한 ‘선한 준비’가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회복과 ‘선한 준비’에 온전하게 ‘성공한’ 신앙인격만이 세상에서 살 때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고, 실패할 때나 병들 때나 고난을 받을 때나 죽을 때조차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는”(요한복음10:3), ‘선한 목자’와의 인격적 만남의 관계가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나그네는 그 산골 그 맑은 물 그 좋은 꼴 앞에서 되레 더 극심한 기갈(飢渴)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나그네는 그 ‘유명한 목자’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접고 그만 그 ‘배부른 목장’에서 돌아서 나오고 말았다.

 

인생 나그네가 다시 주막집 가까이에 이르자, 주모가 우물에서 갓 떠온 냉수 한 그릇을 들고 나왔다. 먼발치에서 그를 먼저 알아보고 기다렸다는 듯 나온 터였다. 나그네가 바짝 다가오자 주모가 대뜸 물었다.

“길은 찾았수? '살 때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고,

 죽을 때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삶의 길', 그 길 말이우?

 나도 제발 그런 길 쫌 배웁시다!”

나그네는 냉수를 받아 벌컥벌컥 마신 후 이렇게 말했다.

“저도 아직 못 찾았습니다.

 내가 찾는 목자는 ‘유명한 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거든요.”

“왜 대형이라 싫수? 소심한 사람들은 대형을 안 좋아허든디?”

“대형이냐 소형이냐가 문제일 건 없지요.

 그 목장 안에 소외된 ‘지극히 작은 양’이나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조차 자기 몸처럼 살피며 섬길 수 있는

 ‘선한 목자’가 있느냐의 여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니까요.”

“그러닝께 ‘선한 목자’가 ‘죽을 때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삶의 길’을 알고 있다 그 말이우?”

나그네는 짐짓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그러나 주모는 이 험한 양육강식의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객이다 싶었는지 딱하다는 듯 서너 번 혀를 차다가 이내 푸념하듯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도 길 찾기 정말 어렵겠수다.

 벌써 해가 기우는데 어떡 허시려구?”

 

  

   *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하나님)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그리스도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