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인공지능 '알파고'와 '신(神)의 한 수'

이형선 2016. 3. 14. 10:14

 

 

명인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바둑대결.

목하 ‘세기의 대결’에 언론과 세상의 관심이 뜨겁습니다.

‘구글’이 제조한 ‘알파고’에게 바둑 최고의 명인이

5기전 중 3연패의 수모를 당한 후 현재 1승을 얻긴 했지만,

인공지능이 대단하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자계산기처럼 단순히 계산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인간처럼 스스로 학습하며 분석 및 적용하는 승부수까지

던져 ‘인간의 머리’ 내지 ‘인간의 수’를 누르고 외려 이길 수

있다는 현실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까지 느끼게 됩니다.

 

어차피 컴퓨터나 인터넷, 스마트폰, 그리고 로봇으로 발전해나가는 오늘의 알고리즘(algorism)이나 인공지능 영역은 시대의 대세입니다. ‘바다’라는 세상에 살면서 밀려오는 ‘제3의 물결’ 내지 ‘제4의 물결’을 그 누구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는 공장에서 노동력을 대체하는 단순 로봇은 물론이고, 저런 인공지능이 알아서 자동차 운전도 하고, 심지어 인간 이상의 사고력을 가지고 말도 하고, 글이나 기사도 쓰고, 의사나 변호사나 예술가 같은 전문 영역도 대신하게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견해는 더 이상 새로운 뉴스도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인공지능이라는 첨단문명에 밀려 일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는 다수의 인간들은, 좋든 싫든 다시 옛날처럼 농경사회로 돌아가서 농업이나 어업이나 목축업 등에 종사해야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각설하고,

제가 여기서 주목해보고 싶은 것은,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가 이세돌 명인을 이긴 결정적 승부수를 언론이나 바둑 관계자들이 ‘신(神)의 한 수’라고 그 경지를 표현했다는 데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이자 신앙인인 저로서 왠지 거부반응이 일더라고요. 그것이 과연 ‘신의 한 수’일까? ‘2년간에 걸쳐 16만 개의 대국 기보(棋譜)’가 입력된 빅데이터에 의해 작동되는 알파고가 둔 승부수가 과연 ‘신의 한 수’일까요? ‘기계의 한 수’이자 ‘데이터의 묘수’일 수는 있어도 결코 ‘신의 한 수’는 아닙니다.

물론 세상의 언론이나 바둑관계자들의 그런 표현이 극적이자 결정적인 수를 선정적 내지 자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수사(修辭)라는 것 정도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것은, 알파고의 대단한 인공지능이나 승부수가 ‘신의 영역’ 내지 ‘신의 한 수’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되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만물의 영장’이자 ‘교만한 인간’은 끊임없이 ‘신의 영역’ 내지 ‘신의 한 수’를 동경하며 그 경지를 염탐해왔고 또한 염탐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神)과 같이 되는”(창세기3:5), 그런 영역 내지 경지에의 욕망을 자의 및 타의에 의해 끊임없이 품어왔고 또한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선악과 사건‘이 바로 인간 우리의 그런 속성 및 타성을 계시적으로 언급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유일한 말씀이자 금기의 말씀을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the man)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2:16-17)

 

저 ‘그 사람’ 곧 ‘아담’이 단수로 명기되어 있으니까, 아내인 ‘하와’는 저 말씀을 직접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 후 남편 아담으로부터 들었겠지요. 따라서 ‘뱀’ 곧 ‘사탄’은 아담이 아닌 하와의 그 허점이나 허영을 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 그 말씀으로 장난을 칩니다. 이렇게 미혹한 것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3:4-5)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는 그것을 ‘한 몸’인 남편 아담에게도 먹게 합니다. 그것은 ‘선악과’로 대변되는 당시 인생에게 주어진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이자 ‘말씀’에 불순종한 거역사건이자 반역사건에 다름 아닙니다. 그럼 ‘선악과’라는 ‘하나님의 말씀(*계명)’을 그대로 지키지 않고 ‘따먹어버린’ 아담과 하와는 과연 사탄의 미혹처럼 아울러 그들의 욕망 내지 탐욕처럼,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는가? 전혀 아닙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세기3:7)

 

“눈은 밝아졌지만” 그 눈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고상한 눈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되레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아는”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죄악의 결과인 인간의 수치와 비참을 보는, 부끄러운 눈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음으로써 인간 자기의 비참과 수치를 가리려고 했습니다. 회개하기는커녕 합리화시키려고 했던 것. 그러나 그런다고 인간 기존의 죄악이나 허물이 가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벌거벗은 수치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이 허락하신 ‘낙원’ 곧 ‘에덴 동산’이자 ‘하나님 나라(天國)’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창세기3:22)

 

따라서 인류의 조상 아담의 후손인 인생 우리 모두는 진정한 낙원이자 천국인 ‘에덴 동산’을 상실하고 세상이라는 ‘땅’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 한계를 살다가 죽음의 길을 가는, 비참하고 허무하고 무의미한 존재이자 ‘나그네 인생’이 되고만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인 우리 속에는 예나 지금이나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속성이자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순종) 이웃을 사랑하기(*섬김)보다는, 스스로 ‘신’이 되어 이웃 위에 군림하고자하는 타락한 정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무력 등을 남들보다 더 소유해서 그것으로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어”, 남들 위에 앉아 “신처럼” 행세하고자 하는 세상 지도자들의 욕망이 그렇고, 인간 자기가 ‘신’이 되고 ‘주인’이 되어 남들 위에 앉아 “신처럼” 행세하고자 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욕망도 그렇고, 인공지능이라는 첨단문명을 통해 인간이 신이 되고 주인이 되어 “신처럼” 행세하려는 디지털 문명 내지 (뇌)과학의 산물 역시 다 그런 맥락입니다.

 

‘실낙원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인생 우리의 저런 실존적 욕망과 노력과 열심에 의해 과연 낙원이자 천국이자 에덴 동산이 회복될 수 있을까요? 미래적으로 무인자동차가 땅을 누비고, 무인비행기가 하늘을 누비면 과연 ‘지상낙원’이 성취될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 아닙니까?

인간의 저 모든 욕망이나 시도는 한 마디로,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는” 정도의 노력이나 열심에 불과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낙원(天國)과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회복을 위해서, 진정한 ‘신의 한 수’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보내실 때 계시해주신, 아래의 결정적인 ‘참 신의 한 수’이자 ‘참 구원의 한 수’에 주목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garments of skin)을 지어 입히시니라.-(창세기3:21)

 

하나님이 친히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은 치마’를 벗기고 그래도 ‘내 자식’인지라 ‘가죽옷’이라는 ‘은혜의 옷’을 입혀서 험한 세상으로 내보내신 것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이른바 ‘최초의 원시복음(原始福音)’입니다. 부연하자면, 인간의 죄를 대속한 ‘희생양의 가죽옷’을 입히신 것입니다. 장차 세상에 오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자 징표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종교 천재’가 결코 아닙니다. 구약 창세기부터 선지자들에 의해 대대로 계시 및 예언된 ‘말씀’이자 ‘메시아’입니다. 마침내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왔을 때, ‘거듭난 생명(重生)’의 세계이자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자 ‘둘째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왔을 때, 저 ‘사탄’은 ‘첫째아담’에게 그랬던 것처럼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 그 말씀으로 장난을 칩니다. 이른바 ‘광야의 시험’(마태복음(4:1-11)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둘째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첫째아담’처럼 ‘선악과’를 따먹지 않습니다. 식욕을 위시한 육신의 욕망이나,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는” 자기과시욕이나, ‘천하만국과 그 영광’ 등의 화려한 허영과 허세로 현혹하는 사탄의 시험을 시종일관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칩니다. 오직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기록된’ 곧 ‘계시된’ 말씀의 본질에 순종한 것. 그렇게 사탄의 대단한 세력을 이긴 것입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맨 처음 말씀이자 복음인즉 이렇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니라.-(마태복음4:17)

 

‘천국’ 곧 ‘낙원’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 회복을 위해 먼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저 ‘회개하라’ 곧 헬라어 ‘메타노에오’는 세상이나 인간 자기중심의 삶이나 가치관의 “방향을 바꾸라”는 의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및 그리스도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라”는 것. 나아가 그리스도께선 진실로 복된 ‘하나님의 나라’이자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삶의 길을 이렇게 설파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永生)하리라.

 내가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한복음6:48-51)

 

그렇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세상에서 남보다 더 많은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주색을 ‘먹었어도’ 죄다 죽었습니다. 첨단 뇌과학인 인공지능을 ‘먹어도’ 결국 허무하게 죽습니다. 상대적으로 ‘영(靈)이신 하나님(神)의 비밀’인 ‘예수 자체’가 ‘영원한 생명’이자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 그렇기에 저주의 십자가에서 죄인인 인간 우리 대신 ‘희생양’이 되신 예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가죽옷’을 입으라고 오늘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구약에 계시된 복음이자 언약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 성취되었습니다. 그렇게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성취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구속사는 앞으로도 성령의 역사(役事)와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해 세상 끝날까지 계속 성취되어갈 것입니다.

 

한편,

‘바벨탑 사건’ 역시 인간들이 “눈이 높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사건에 다름 아닙니다. ‘바벨탑’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속권세나 집단, 무신론이나 진화론이나 인간의 과학을 운위하는 세속문명 등을 일컫는 의미일 수도 있는데, 성경은 그런 인간들의 교만이나 명예욕이나 그 열심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세기11:4-5)

 

‘돌’이나 ‘진흙’은 창조주 하나님의 자연적 산물입니다. ‘벽돌’이나 ‘역청’은 인간들의 인위적 산물입니다. 인간들의 인위적인 산물이나 지식이나 과학이 창조주 하나님의 산물이나 말씀을 “대신하는” 바벨탑 사회나 문명은 대단한 것 같아도 그 결국은 죄다 불행합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인간들은 저 ‘벽돌’에 자기들의 이름을 각각 새겼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자기 이름이나 생명이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속 문명’이라는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는 말은 곧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자”는 의미에 다름 아닙니다. 인간 ‘교만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현장을 친히 내려와 살피신 하나님은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창11:6)라고 탄식 및 우려하십니다. 그래서 당시까지 하나였던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후, 인간들을 온 지면으로 각각 흩어버리십니다. ‘바벨’은 ‘섞다, 혼잡하게하다’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동사 ‘바랄’에서 파생된 고유명사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Babel)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세기11:9)

 

오늘 우리는 인간들의 인위적인 첨단 과학의 산물인 ‘인공지능’이라는 ‘벽돌’이자 ‘신의 한 수’를 우상처럼 신뢰하며, “아성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고 나서는 사람들은 아닐까요? 그러나 그런 ‘벽돌’은 진정한 ‘반석’도 아니고, 진정한 ‘신의 한 수’도 아닙니다. 인위적인 산물이나 지식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비밀을 ‘대신’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 시도를 자행한 모든 집단이나 권세나 문명의 끝은 죄다 불행했고 허무했습니다.

 

인공지능 ‘알파고’에겐 과연 명인이나 박사들 이상의 대단한 ‘머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심령이나 자의식이나 감정은 없습니다. 전투에서 오직 “이겨라”는 주인의 알고리즘 내지 명령어를 수행하는 빅데이터이자 슈퍼컴퓨터이자 용기(用器)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것 역시 고도로 발전하면 되레 인간 및 인류를 파멸로 인도하는 또 다른 ‘핵무기’가 될 수도 있고, 무신론으로 인도하는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제발 그런 재앙을 초래하지 않는 ‘겸손한’ 인공지능의 세계가 될 수 있기를! 제발 저와 당신을 포함한 현대인들이 대단히 유식한 ‘머리’는 있어도 따뜻한 심령(心靈)이나 피나 살이나 눈물은 없는, ‘알파고’ 같은 저런 기계적 인간형이나 전문가가 되지 않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