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내가 살고 싶은 생명이요,
비추고 싶은 빛이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요,
내가 표현하고 싶은 사랑이요,
내가 나누고 싶은 기쁨이요,
내 주위에 퍼뜨리고 싶은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전부입니다.
사람들에게
믿음이 부족한 이유는,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을 원한다면,
(*예수 중심적이 되어)
너그럽게 자신을 내주어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함께 갑니다.-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
그렇습니다.
참 ‘예수의 생명’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입니다.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길이자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생명입니다.
‘부활의 생명’이자 그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마더 테레사처럼
‘내가 살고 싶은 생명’이기도 합니다.
또한 마르다처럼 이렇게
신앙고백하고 싶은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한복음11:25-27)
예나 지금이나,
창세기나 지금이나,
자연의 세계는
우리 인간들보다 되레
저 부활의 비밀을,
저 영성(靈性)의 비밀을,
더 잘 알고 있고
더 잘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해서 되레 더 잘 알고
더 잘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순진한 어린아이의 얼굴에 하늘이
더 크게 그려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사흘’ 동안이나 ‘죽어 있던’
거리의 저 나무들도 산야의 저 초목들도
이제는 파릇파릇 푸릇푸릇
제 몫의 새싹을 돋우고
제 몫의 새움을 돋우고 있습니다.
받은바 은혜이자 은사인 고유의 색깔로
자기모습 그대로의 꽃망울을 머금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얼굴처럼 내미는 저 순색의 미소.
언약 그대로 재림하는 새 생명과의 해후.
죄다 ‘부활의 생명’입니다.
그 오늘의 계시입니다.
진화(進化)된 우연의 생명이 아닌,
창조(創造)된 필연의 생명입니다.
진화된 우연의 계시가 아닌
창조된 필연의 계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연례적으로
보여주시고 현재적으로 보여주시는
자연 속의 생명이자 계시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일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오늘도 역사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
삭막한 세상을 아름답게 살리고자 베푸시는
늘푸른나라의 빛이자 그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빛이자 그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자연의 초목들은
때와 그 징조를 미리 아는
계절의 퍼포먼서처럼 시대의 선지자처럼,
목하 자기 몫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자기 몫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와서 보라.”
계시를 계시로 와서 보라.
눈이 있는 자는 와서 보라고.
그렇습니다.
저 자연에의 일반계시도
‘성경의 말씀’이라는 특별계시도
그 모든 부활도 천국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현재부터
우리에게 주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하나님과 나와 이웃’이라는
삼위가 ‘사랑의 관계 안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가야할 공존의 길이자
‘하늘의 복이 있는 길’이라는 것.
믿음과 사랑을 통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용서와 배려를 통해
함께 나누어야 할,
그리스도의 생명이자
그리스도의 평화이자
그리스도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잠시 머물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 인생,
우리 모두가 삶으로 구현해야 할
사명이자 책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더 테레사는
“인생은 사명을 수행하는 여정”이라고
또한 고백했던 것이겠지요.
“사명을 수행한다”는 것은
삶으로 실천하는 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삶으로 실천하는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믿음과 사랑은 함께 갑니다.”
그래서 ‘나의 현재’와 ‘나의 미래’도 함께 갑니다.
그래서 ‘나의 금세’와 ‘나의 내세’도 함께 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이자 허락된 오늘,
겸손하게 회개하고 또한 겸손하게
“깨어 살아야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들을 귀’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말씀이 비로소 들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마태복음2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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